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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반항의 윤리 / 유공희

운수재 2007. 6. 11. 11:33

 

반항(反抗)의 윤리(倫理)  /   유공희

― 까뮈의 『La Peste』에 해하여

 

A. 까뮈가 불의의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는 것은 비단 불란서뿐 아니라 전 세계의 커다란 손실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는 하나의 절망이었을 정도로 그의 죽음은 너무도 의외의 흉보이었으리라.

불과 44세에 노벨상을 받은 이 뛰어난 작가는 소설에 극작(劇作)에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보다 더 위대한 작품을 쓸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그는 현대라는 이 혼돈한 시대에서 가장 성실하게 사색하는 지성인이었고,

세계 각국의 젊은 지식인들이 그의 작품을 통해서 전후의 착잡한 현실 속에서 진실하게 사는 방향에 있어 하나의 계시를 얻었으리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그는 루소 이래 사회에 대하여 반(反) 정립적(定立的)인 위치에서 몸부림하던 개인을 다시 사회에 참여시키는 빛나는 윤리를 수립한 획기적인 작가 중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이미 역사의 인물이 되어 버린 그를 위해서라기보다도 이 어려운 시대를 진실하게 살아보려고 읽고 생각하는 학생들을 위하여 그의 대표적 작품인 『흑사병(黑死病)』(La Peste)을 중심으로 그가 모색한 ‘반항의 윤리’의 아우트라인을 더듬어 보기로 하자.

 

페스트가 만연된 ‘오랑’이란 가공의 도시― 외계(外界)와의 교통을 일체 차단당해 버리고 오직 페스트의 공포에 빠져버린 폐쇄 도시의 상황을 까뮈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흑사병이 우리 시민들에게 가져온 최초의 것은 귀양살이었다.

그리고 필자 자신이 그 즈음에 느꼈던 바는 곧 대부분의 시민들이나 필자나 동시에 느꼈던 바이니만치 필자는 여기서 그것을 모든 사람 이름으로 써 나가도 좋으려니 생각하고 있다.

사실 이 귀양살이 감정이야말로 우리들 마음속에 항시 파여져 있던 그 구렁이었고,

혹은 과거를 되짚어 본다 혹은 그와 반대로 시간의 걸음을 재촉해 본다 하는 그 알뜰한 감정답지 않은 욕망이었고 그 쑤시는 듯한 추억의 화살들이었다. …

그들은 그 결과 살아간다기보다는 차라리 둥둥 떠돌며 갈 바 없는 그날 그날과 열매 맺지 않는 추억 속에 버림받은 채 스스로의 고통의 대지 깊숙이 뿌리박고 살기를 수락하기 전에는 생기(生氣)를 내어 보지 못할 뜬 귀신들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

이렇게 해서 우리는 각기 그날 그날 살이로 그리고 홀로 하늘이나 마주 놓고 살아갈 것을 감수해야 되었다.

이 전반적인 버림받은 상태는 결국에 가서는 사람들의 성격을 단련시키는 도량(道場)이 되었던 것인데 처음에는 그러나 우선 객쩍은 방향으로 이끌어 갔다. …

그들도 몇 주일 전만 해도 이런 약점이나 분간 없는 노예근성을 갖지 않아도 되었던 것인데 그것은 그들이 세계 앞에 자기들 혼자만이 아니고 어떤 의미에서는 또한 자기들과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세계 전면에 놓여 있기 때문이었다.’

 

페스트의 도시 오랑은 곧 까뮈가 이 작품에다 설정한 인간의 실존적 부조리의 상황 그것인 것이다.

그 속에서 인간은 자기가 있을 곳을 찾지 못하는 ‘귀양살이’ 상태에 놓여 있으며 자기 존재의 부조리한 고독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실존주의적 입장에서는 이 같은 부조리의 상태가 바로 인간존재의 상황 그것인 것이다.

언제 올지 모르는 ‘죽음’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확실하게 앞에 두고 있는 모든 인간의 운명은 따지고 보자면 페스트의 도시 오랑의 시민의 그것과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대부분의 인간이 이와 같은 실존적 세계의 실상(實相)에 대해서 맹목(盲目)일 뿐인 것이다.

오랑의 시민들은 말하자면 페스트의 덕택(?)으로 그와 같은 실존적 세계의 진상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부조리한 실존적 현실에 익면하게 된 인간은 어떠한 행위로써 대처해야 하는가?

여기에 까뮈의 실존주의적인 행위의 윤리가 표명되는 것이다. 까뮈는 말할 것도 없이 무신론자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우선 오랑의 시민들을 향하여 기독교의 원죄사상으로써 종교적인 구원을 시도하는 신부(神父) 빠느루의 설교를 말살하는 것이다.

빠느루 신부의 기독교적인 사상으로서는 페스트 때문에 인간이 고통을 받고 죽어간다는 것은 ‘좋은’ 일인 것이다. 그는 페스트의 공포에 전율하는 오랑의 시민들 앞에서 이렇게 설교하는 것이다.

 

“이 재앙(페스트)이 처음으로 역사 상에 나타났을 때 그것은 성신(聖神)의 원수들을 박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애급 왕 파라오는 영원하신 뜻을 거역하고 있었는데 그때 흑사병이 그 자를 꿇어앉혔습니다.

모든 역사의 태초로부터 천주의 재앙은 오만한 자들과 눈먼 자들을 그 발아래 꿇어앉혀 놓았습니다.

이 점을 잘 생각들 하시고 모두 꿇어앉으십시오.”

 

이것은 곧 페스트는 신의 처벌이요 신의 섭리라는 기독교적 관념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이 작품의 주인공인 의사 ‘리으으’는 그 재앙(페스트)이 정당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전에 먼저 그것에 반항하고 그것을 치료하는 데 온 생명을 바치는 것이다.

있는지 없는지 알지도 못하는 ‘신’을 핑계로 이 비참한 재앙이 정당하다고 감수할 것을 그의 ‘인간’이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 죄도 없는 소년이 이 무서운 페스트에 걸려서 신음 끝에 무참하게도 죽어버리는 것을 보고 빠느루 신부는

“죽을 때 죽더라도 고생이나마 남보다 더 해 본 셈이지”

라고 말을 내놓자 의사 리으으는 ‘와락 몸을 돌려 신부를 쳐다보고 흥분된 태도로써 격렬한 어조로 내뱉듯이’ 쏘아붙이는 것이다.

“정말 저 애만은 적어도 저 애만은 죄가 없습니다. 신부님도 그건 아실 테지요!”…

빠느루 신부가

“그건 잘 알겠습니다. 정말 화도 나게 되었지요. 우리 힘으로 암만해도 안 되니까. 허지만 아마 우리는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라고 말하자 리으으는 ‘별안간 상반신을 벌떡 일으키고 가능한 모든 힘과 정열을 기울여 신부를 바라보고’ 이렇게 할하는 것이다.

“아닙니다. 신부님! 나는 사랑이라는 것을 달리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까지 조련질을 당하는 이런 따위의 세계를 사랑하다니! 난 죽어도 못합니다.”

이것은 바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가(家)의 형제』 중의 조시마 신부와 이반의 대화를 연상케 하는 장면인데 여하튼 리으으의 반항은 신부 빠느루가 차고 다니는 그 지극히 편리한 ‘신’이라는 것에 향하는 ‘인간’의 절규인 것이다.

빠느루 신부가 패물처럼 차고 다니는 그 ‘신’을 방패로 인간의 참극(慘劇)과 허망(虛妄)과 부조리를 합리화 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의 자기기만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까뮈의 경우에는 똑바로 눈을 뜨고 이 허망과 부조리를 정직하게 받아들이는 동시에 여기에 대하여 줄기차게 반항해야 하는 것이며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유일한 삶의 길인 것이다.

 

평화롭고 아무 일도 없는 듯하던 거리에 페스트(여기서 페스트는 전쟁이라 해도 좋고 그 밖의 예측치 않던 어떤 커다란 재앙으로 바꾸어 놓아도 좋다.)가 창궐(猖獗)하는 것이다.

어느 날 길거리에 쥐 한 마리가 죽어 자빠진다. 모두들 ‘설마…’ 한다. 무서운 재앙이 닥쳐오리라고 생각하기는 싫은 것이다.

이 세상에는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하기를 싫어하는 딱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인정할 용기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아전인수격(我田引水格)으로 좋은 편으로 해석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올 것은 오고야 만다.

어떤 이는 신의 뜻을 말하고 회개(悔改)를 부르짖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애국(愛國)을 또 성스러운 자기희행을 설교하기 시작한다.

불가해(不可解)한 플래카드가 여기저기에서 내걸린다.

그러나 까뮈는 그런 것들을 모두 소용없는 연극 밖의 아무것도 아니다는 것이다.

비극이 이미 일어났으면 일어난 것으로 각오(覺悟)하고 최선을 다하여 정성껏 그것과 싸울 뿐이라는 것이다.

영웅적이니 성스러우니 하지 말고 죄없는 동포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그들의 행복을 지켜주도록 자기의 힘을 다할 뿐이라는 것이다.

 ‘사랑’이니 ‘비련(悲戀)’이니 떠들지 말고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괴롭고 슬픈 인간끼리이기 때문에 서로 ‘측은한 마음으로’ 돕고 정직하고 성실하게 자기의 직분을 다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속임없는 지성과 양심의 요구일 뿐이지 어떠한 도덕율이나 신앙이나 이데올로기도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가능한 한도의 바른 식견(識見)이 없이는 진정한 선(善)도 아름다운 사랑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의사 리으으는 약혼한 애인을 파리에 두고 와서 폐쇄(閉鎖)의 도시 오랑에 주저앉지 않을 수 없게 된 신문기자 랑베에르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히로이즘 따위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으로서의 성실의 문제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비웃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으나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도 성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폐병으로 요양원에 보내버린 자기의 아내가 사망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리으으는 자기의 인간으로서의 성실을 다하여 오직 페스트와 싸우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또 애인이 그리워서 그렇게도 참극의 도시 오랑에서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치던 랑베에르도 마침내 ‘혼자만 행복하기가 미안해서’ 페스트와 싸울 것을 결의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리으으를 어떤 독자들이 ‘신 없는 성자(聖者)’라고 일컫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인데 이 ‘신 없는 성자’라는 관념은 사실은 리으으의 친구이며 뛰어난 관찰자인 따루우의 생각인 것이다. 따루우는 리으으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현재 나의 마음에 끌리는 유일한 문제는 인간이 신에 의지하지 않고도 성자가 될 수 있는가 라는 겁니다.”

이에 대해서 리으으는

“성자 따위보다도 패배자 쪽에 훨씬 연대감을 느끼는 겁니다.

나는 암만해도 히로이즘이나 성자의 덕 같은 것에 마음이 끌리지 않습니다.

내 마음을 끄는 것은 오직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과연 페스트와의 투쟁은 리으으로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끝없이 계속하는 패배’인 것이며

그것을 또 또렷하게 인정하는 것이며 그러면서 그는 죽을 때까지 투쟁하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똑똑하게 깨닫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 ‘끝없이 계속하는 패배’라는 관념이야말로 까뮈가 그의 에세이 「시지포스의 신화」(Le Mythe de Sisyphe)에서 밝힌 가장 중요한 까뮈적 명제이었음을 다시 한 번 기억하는 것이다.

그리스의 신화에서 코린트의 왕 시지포스는 신벌(神罰)에 의하여 큰 돌을 산꼭대기에까지 밀어 올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 돌은 반드시 도중에서 골짜기로 굴러내리고 말게 마련이다.

그는 ‘끝없이 계속하여 패배’하면서 언제까지나 이 고역을 견디어 내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이 부조리한 세계 속에서 계속하는 노력은 요컨대 이 시지포스의 고역처럼 성취될 수 없는 추절(捶折)의 연속이다.

그러나 이 무한의 추절 밖에서 인간이 행복을 찾을 길은 없는 것이다.

한없이 계속하는 추(捶)에 반항하여 영원히 노력을 되풀이하는 것이 인간의 유일한 삶의 길인 것이다.

 숙명의 돌을 밀어 올리는 이 시지포스의 고역의 순간 순간에서 인간은 사는 보람을 발견해야 한다.

인생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장래에의 관념적 희망 때문에 ‘현재’를 망각하고 상실한다는 것은 도피이며 생명의 포기다.

따라서 ‘현재’의 확실성이야말로 행위와 창조의 원천인 것이다.

페스트의 주인공 리으으가 말하는 ‘성실’은 바로 이 시시포스의 자각에서 오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 같은 인간으로서의 명확한 자각 앞에서 신부의 설교 따위는 난센스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희망을 ‘죽음’의 저편에 둔다는 것은 암만해도 정직하지 못한 사고방식이며 인생에 대한 불성실이며 따라서 그것은 생에 대한 하나의 배반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신’이 없는 부조리의 세계에 있어서 까뮈가 수립한 반항의 윤리의 아웃라인을 엿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페스트에 대항하는 리으으의 성실한 헌신, 나아가서는 나치의 횡포에 대한 불란서 국민들의 레지스탕스까지도 정의(正義)네, 인도(人道)네, 신이네, 국가네 하는 따위의 플래카드를 추켜세울 하등의 필요가 없는 인간의 양심 그 자체의 반항이요 성실의 줄기찬 표명(表明)으로서 이해하는 곳에 까뮈가 모색한 현대인의 하나의 윤리에 대하여 보다 더 친근해질 수 있는 계기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떠한 피안(彼岸)의 관념에도 절대적 이념에도 속치 않고 어떠한 플래카드에도 현혹되지 않는 똑바로 깨어있는 의식을 가지고 세계의 부조리를 정직하게 받아들이고 그것에 끊임없이 반항하는 인간의 성실― 거기에 행복의 유일한 열쇠가 있다는 것이 까뮈의 사상인 것이다.

끝으로 그의 사상을 좀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페스트』에 앞서서 그보다 먼저 발표된 『이방인』을 읽을 것과 또 아울러서 전기한 『시시포스의 신화』와 다음 『반항의 인간』의 순서로 그의 에세이를 읽어볼 것을 권하는 바이다.

이 원고를 쓰는데 동경 삼일서방(三一書房)에서 간행된 『문예사조사』와 김붕구 저『불문학(佛文學) 산고(産苦)』를 참고로 했음과 인용은 이진구(李鎭求) 역에 의했다는 것을 적어 둔다.

 

출처 : 자연과 시의 이웃들
글쓴이 : 운수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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