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 유공희의 글/유공희의 산문

피카소의 눈 / 유공희

운수재 2007. 7. 3. 03:50

 

피카소의 눈  /   유공희

 

실러는 예술의 기원이 인간의 유희(遊戱) 본능에 있다고 하였다.

다른 동물들은 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먹을 것을 찾고,

제 종족을 잇기 위해서 생식(生殖)하는 데 쓰고 나면 남는 에너지가 없기 때문에 휴식이 있을 뿐인데,

인간은 제 생명의 유지와 종족의 번식에 쓰고도 에너지가 남고도 넘치기 때문에 유희 본능이 생기게 되고, 그것이 예술의 기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도 원시 미개시대에 있어서는 다른 동물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겠지만,

문화가 발달함에 따라서 그러한 유희 본능은 여러 가지 형태로 표현되었을 것이니,

흔히 그 대표적인 것으로 원시적 종교 의식(儀式)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종교 의식 속에서 그들이 맛보았을 만족감은, 막연한 그들의 수호신에 대해서 할 짓을 다했다는 데보다도 오히려 재미있게 놀았다는 데 더 컸던 것이 아닐까?

그들의 발라드 댄스(Ballad Dance)는 인류의 에너지가 초과잉 상태에 있는 오늘날, 얼마나 찬란하게 부활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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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에 만약 저 화려한 고딕(gothic) 예술과 저 장엄한 미사(missa)와 그 풍성한 명곡 찬미가와 한가한 주일날 화려하게 아침 하늘을 누비는 종소리가 없었다면

그것은 참으로 쓸쓸하고도 지루한 집회가 되고 말지 않았을까?

또 불교에 만약 저 그윽한 향내와 풍경소리와 고담(枯淡)한 석탑과 아름다운 불화(佛畵)와 은은한 목탁 소리가 없었더라면

그것은 얼마나 삭막한 회색의 세계가 되고 말았을 것인가!

‘하나님’과 ‘부처님’도 언제나 노래를 타시고 그림을 타시고 우리의 마음속에 어필해 오시곤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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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동네 길을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는 개를 어쩌면 산보하는 개로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뼈다귀 조각이라도 떨어져 있지나 않나 하는 기대와 실망이 왕래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또 처마 밑에 외다리로 움츠리고 서서 깊은 명상에 잠겨 있는 듯한 장닭을 볼 수 있으나 실은 새벽에 다 못 잔 잠을 보충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쉴 새 없이 잘도 유희로만 나날을 사는 우리들 자신의 자손들을 본다.

손가락으로 창구멍을 뚫었다고 따귀를 맞고 벽에다 개발 새발 낙서를 했다고 종아리를 맞는 개구쟁이 꼬마들에게서 우리는 먼저 만물지영장으로서의 건전한 생리를 보아야 할 것이다.

이해 있는 부모라면 거기서 내 자손들의 영장(靈長)됨의 확증(確證)을 얻고, 먼저 엄숙한 안도감을 맛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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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문명의 메커니즘 속에서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는 오늘날에는 전에 없이 기진맥진해서 허덕이는 인생이 없지도 않겠지만,

한편 문명의 혜택을 배부르게 먹고 마시는 축들은 에너지가 남고 또 남아서 형언하기도 어려운 온갖 유희를 발명해 내기에 바쁘다.

그 눈부신 쇼에 손발도 가누지 못하면서 장단을 맞추려고 우쭐대는 어중이떠중이들보다야 산보 아닌 산보로 시간을 채우는 개 쪽이 더 착실하다 할 것이다.

사람은 자기 자신의 유희를 가질 줄 알아야 한다. 거기에 저절로 사는 재미가 있는 것이다.

슬기로운 사람은 모든 시간을 자기의 여유로 만들려고 할 것이고, 자기 자신의 유희에 엄숙하게 골몰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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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는 낡은 자전거의 손잡이와 안장을 가지고 황소의 머리를 만들었다.

그는 참으로 재미있는 장난을 해 본 것이다.

예술의 본질이 실은 그러한 재미있는 장난이라고 한다면 화를 내고 덤빌 예술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고로 천재적인 예술가에게는 언제나 혼자 외로이, 그러나 엄숙하게 자기의 유희에 골몰하는 어린이 같은 점이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들의 눈은 장난 좋아하는 순진한 어린이의 눈을 닮고 있다.

그 눈은 어른들의 눈보다 좀 더 크고 깊고 맑다. 그 속에는 상처받기 쉬운 황금의 마음이 넘쳐흐르고 있다. 여든세 살의 노인 피카소는 지금도 여덟 살 먹은 소년의 큼직한 눈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장난꾸러기다.

예술이 재미나는 형상을 만드는 시도(試圖)라고 한다면 예술가는 먼저 큼직하고 맑은 눈과 심심한 열 손가락을 가진 소년이 되어야 할 것이다.

혼돈 속에서 즐거운 형상을 창조해 내며 스스로 자족할 줄 아는 예술가에게서 나는 이따금 조물주의 솜씨를 엿볼 수가 있다.

조물주는, 아무리 생각해도 심심풀이로 인간과 만물을 창조해 놓은 것 같이만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는 전능의 지혜와 에너지를 가지고 너무도 심심해서, 정성껏 만상을 창조해 본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의 창조물들이 이렇게 풍부하게 아름다울 수가 없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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