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힘으로소의 시의 존재 / 강웅식

운수재 2007. 11. 9. 05:06

 

힘으로서의 시의 존재

                                                ―김수영의 ‘온몸시론’에 대한 짧은 주석

강 웅 식(평론가)

1

시란 무엇인가?

이 매력적인 문제 앞에서 평론가인 나는 절망적인 무력감을 느낀다.

평론가란 시를 쓰는 사람이 아니다. 시를 쓰는 사람은 시인이다. 평론가가 하는 일이란 시인의 작품에 주석을 다는 것, 작품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것이다.

과거의 작품들에 대한 주석과 분석과 해석의 내용에 역사적인 맥락과 질서를 부여하는 이른바 문학사의 정리도 평론가가 하는 일이다.

그렇다, 그것은 기존의 것들에 대한 정리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평론가의 역할에 그 나름의 의미가 없지 않음은 물론이다.

예술작품에는 어떤 아름다움과 진리 내용이 담겨 있지만, 예술작품은 그것들을 스스로 설명하지 못한다. 예술작품은 그 자체의 존재를 통하여 아름다움이나 진리내용과 한 몸을 이룬다.

하나의 예술작품은 어떤 아름다움이나 진리내용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들 자체’이다. 예술작품에 대해 말할 때 편의상 형식과 내용을 나누어 설명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예술작품을 형식과 내용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없는 것도 하나의 예술작품을 바로 그것이게 만드는 ‘형식’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과 정확히 한 몸을 이루기 때문이다.

예술작품이란 그것을 이루게 될 다양한 구성의 계기들이 나름으로 시간의 운동을 전개하다가 한 시점에서 정지된 것이다. 그 매듭점 또는 응고점에서 김수영의 말처럼 내용은 형식이 되고 형식은 내용이 된다.

지금 나는 시란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라는 말에 지나치게 장황한 주석을 붙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예술작품은 스스로 자신의 미와 진리에 대하여 설명하지 못한다. 예술작품의 그와 같은 본질적 속성 때문에 예술작품의 미와 진리를 설명할 수 있는 ‘해석하는 정신과 양식’이 필연적으로 요청된다.

내가 생각하는 평론이란 바로 그와 같이 해석하는 정신과 양식을 가리킨다. 평론의 구체적인 작업을 매개해주는 것이 주석과 분석과 해석이다. 그것들에도 나름의 의미와 가치는 있다. 그러나 평론에는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를 풀 수 있는 능력이 결여돼 있다. 이미 발표된 작품을 놓고 평론가의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시인의 작업은 저만큼 멀리 달아난다.

기존의 작품들에 대한 반성을 통해 시가 그 어떤 것이라고 규정해 놓아도 새롭게 생성된 작품들은 그러한 규정의 울타리를 훌쩍 뛰어 넘어버린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평론의 자화상이다. 해석하는 정신은 황혼이 되어서야 겨우 날개를 펼 수 있을 뿐이다. 평론의 ‘해석하는 정신’은 시의 ‘생성하는 정신’의 그림자이다. 이것이 평론의 비애이고 시의 영광이다.

 ‘시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다룰 자격은 본질적으로 시인에게 있고, 궁극적으로 그 문제에 대한 잠정적인 답은 작품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 나는 시를 쓰는 시인이 아니라 시를 해석하는 평론가이다. 나는 ‘시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풀 능력과 자격이 애초부터 없는 사람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시인의 작품에 주석을 달고, 그 작품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것이다.

 이 글에서 나는 ‘시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의 성찰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판단되는 김수영 시인의 시론에 대한 짧은 주석을 붙이고자 한다.

 

2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이라는 지나치게 평범해 보이기까지 하는 존재론적 규정은 김수영 시인이 한 것이다. 그는 어째서 거의 동어반복에 가까운 사실을 유난히 강조하는 것일까? 김수영의 규정에는 지극히 평범하고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항상 놓치곤 하는 진실이 담겨 있다.

사실은 나는 20여 년의 시작 생활을 경험하고 나서도 아직도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이 되지만,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 다음 시를 못 쓰게 된다. 다음 시를 쓰기 위해서는 여태까지의 시에 대한 사변을 모조리 파산을 시켜야 한다. 혹은 파산을 시켰다고 생각해야 한다.

시를 짓는 일은, 한편으로, 시라는 사회적 제도에 따르는 것이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시라는 문화적 관습이나 언어의 양식을 따르는 일이다. 그러나 시를 짓는 일은, 다른 한편으로, 그런 관습이나 양식의 규칙들을 의심하면서 그것을 초월하고자 하는 활동이다. 그 자체의 한계를 노출하고 비판하면서 기존의 규칙과 다르게 지을 때 과연 무엇이 일어날 것인지 실험하고 모색하는 반제도적 활동이 바로 시작(詩作)이다.

위의 인용문에서 김수영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바로 ‘반제도적 활동’으로서의 ‘시작’이다. 시인이 시와 연관된 기성의 생각에 맞추어서, 또는 자신이 이미 시도했던 차원에 머무른 상태에서 시를 짓는다면 그것은 시를 창작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틀로 시를 복사해내는 것에 불과하다. 시인은 시를 짓는 사람이며, 진정한 의미에서 시를 짓기 위하여 시인은 “여태까지의 시에 대한 사변을 모조리 파산을 시켜야 한다. 혹은 파산을 시켰다고 생각해야 한다.” 이처럼 기존의 것을 버리는 과정, 또는 버렸다고 생각하는 과정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인의 고통과 영광의 근거이다. 그러한 과정에 대한 감각과 인식이 없는 사람을 우리는 결코 시인으로 여기지 않는다.

 

‘여태까지의 시에 대한 사변’을 버리는 과정은 시의 ‘현대성’을 자각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내가 알기로 우리 근대문학사에서 김수영만큼 ‘현대시’라는 용어를 정확하게 자주 쓴 시인은 많지 않다. 한국근대시사를 기술하면서 1900년대부터 1930년 이전까지 제작된 시들을 ‘근대시’로 1930년 이후에 제작된 시들을 ‘현대시’로 명명하는 따위의 규정은 ‘현대시’의 개념을 근본적으로 오해한 결과이다. ‘현대시’는 단순히 시간적인 계기만으로 규정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현대시’는 ‘현대’(modern)라는 시공간 속에서 씌어진 것이면서 동시에 ‘현대’의 제반 문제들과 연관된 철저한 자의식을 내용으로 하는 것이다.

 ‘현대’라는 시공간에서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물신(物神)의 지배이다. 이 물신의 지배는 심지어 우리의 의식에 침투할 만큼 전면적이고 철저하다. 물신의 지배에서 벗어나 있는 공간이나 사람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현대의 물신지배의 전면성과 철저성이 ‘현대성’의 내용이고, 그러한 ‘현대성’에 대한 자각이 ‘현대시’의 핵심적 주제이다.

시인은 시를 짓는 사람 또는 무엇인가를 말하는 사람이지만, 현대의 시공간에서 물신지배의 의식 형태에 속하지 않는 언어행위의 장소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진정한 창조와 생성의 자유와 가능성이 불가능하게 된다.

현대 예술의 대표적 전략인 ‘유희’나 ‘침묵’은 그러한 불가능성에 대한 자각의 산물이다. 모든 언어행위가 타락한 것이 되는 상황에서는 차라리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최고로 윤리적인 행위가 된다. 언어에서 물신 지배의 흔적을 지우기 위하여 언어의 의미를 하얗게 지워버림으로써 언어로 구축된 언어의 건축물인 시를 의미 부재의 텅 빈 공간으로 만들어 놓으려는 것이 문예 표현 양식으로서의 ‘침묵’의 전략이다. 물신 지배의 의식 형태에 대한 부정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시 그 자체의 폐쇄적 공간을 통하여 물신 지배의 가치들에 대한 유희적 부정을 보증할 수 있는 것들(추문, 추함, 불쾌)을 생산하고자 하는 것이 문예 표현 양식으로서의 ‘유희’의 전략이다. ‘침묵’과 ‘유희’는 20세기초에 서구의 전위 문학이 이미 실험한 바 있는 전략이다.

그것들은 물신 지배에 저항(부정)하고 새로운 사고를 구축하는 방법과 연관된 계기를 마련해 주었지만 그것 자체가 전부는 아니며 목적일 수도 없다. 김수영은 서구 모더니즘과의 대화를 통하여 ‘현대성’의 핵심을 파악하였으며, 동시에 ‘침묵’이나 ‘유희’와 같은 서구의 문예 방법이 참고의 대상은 되나 결코 복사의 대상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물신 지배의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시인이면 누구나 그 자신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모든 것을 통하여 진정한 의미의 ‘창조’와 ‘생성’으로 나아가야만 한다는 사실을 또한 그는 함께 깨달았다.

 “현대에 있어서는 시뿐만 아니라 소설까지도 모험의 발견으로서 자기 형성의 차원에서 그의 ‘새로움’을 제시하는 것이 문학자의 의무로 되어 있다”는 김수영의 발언은 바로 그와 같은 깨달음의 소산이다.

김수영은 ‘현대시’의 본질 또는 ‘현대시’를 쓰는 시인의 임무는 시인 자신이 자기 형성의 차원에서 자신의 새로움을 제시하는 데 있다고 믿었다. 김수영에게 시인이란 ‘제정신을 갖고 사는 사람’이며, “제정신을 갖고 사는 사람이란 끊임없는 창조의 향상을 하면서 순간 속에 진리와 미의 전신(全身)의 이행을 위탁하는 사람”이다. ‘끊임없는 창조의 향상’, 즉 부단한 새로움의 생성은 모든 예술가의 창작 활동의 동기이자 목적이다. 그 ‘창조의 향상’을 보증해주는 것이 바로 ‘전신의 이행’이라고 주장하는 데에 김수영 시론의 특징이 있다.

시를 짓는 일은 단순히 언어를 골라서 잘 다듬어 특별하게 결합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는다. 이제 시작(詩作)은 단순한 지적 조작이나 감정의 표현이라는 차원을 넘어서게 된다. 시를 짓는 일은 스스로를 변화시켜 나가는 과정과 행위 그 자체여야 한다.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라는,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라는 김수영의 이른바 ‘온몸시론’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

김수영 문학의 주제를 흔히 ‘자유’와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그것들은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자기형성’의 필연적인 계기들이다. ‘자기형성’의 과정에서 요구되는 ‘순간을 다투는 윤리’는 어떤 창조의 순간을 구성하고 자유를 이행하는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하여 전제되어야만 하는 윤리적 밀도를 가리킨다. 김수영이 말하는 ‘창조생활’, 즉 ‘자기형성의 차원에서 새로움을 제시하는 것’은 자기 자신과 세계가 맺는 관계를 부단히 새롭게 꾸려 나가고 수행해 나감으로써 향상된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므로, 이 때에 ‘자유’는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한 중요한 매개가 된다. 사실 자유는 어떤 대상 사물처럼 증명될 수도 없고, 거리 두기를 전제로 하는 개념적 객관화에 의해 충분하게 파악될 수도 없다. 그것은 나름의 선택이자 이행이며, 이 수행의 가능성에 근거해서 비로소 그것에 대하여 물음을 던질 수 있고,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실제 수행을 통해 스스로의 자유를 확인하게 된다.

사실 자유와 사랑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그 모든 지배와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의지와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힘을 자유라고 한다면, 절대적 자유의 가장 내적인 핵심은 현재의 자기 자신에 대한 그리고 앞으로의 자기 자신을 향한 절대적 사랑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이 자유와 사랑은 그 누구도 굴종시키려 하지 않는다. ‘순간을 다투는 윤리’에 바탕을 둔 ‘자기 형성’은 다른 사람과 더불어 자기 자신이 됨으로써 ‘창조의 향상’을 이룩한다. 자유와 마찬가지로 사랑 역시 ‘순간을 다투는 윤리’의 구조적 계기이다.

‘온몸시론’은 예술가(시인)에게 특별한 존재론적 위상을 부여해 준다. 김수영에게 예술가는 자기만의 독특한 개성을 지키기 위하여 예술을 직업으로 택한 사람이며, 그러한 체질의 순수성을 보존하고 발전시키기 위하여 ‘순간을 다투는 윤리’에 헌신하는 사람이다. 그는 예술가의 그런 창조생활을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이라는 명제로 정식화하였다. 예술가의 존재 근거이자 존재 목표인 ‘새로움’은 민족과 인류와 문화에 대한 기존의 이해와 인식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주도면밀하게 조직된 현대사회의 지배질서의 척도에서 볼 때 그러한 ‘새로움’의 추구는 불온하거나 혼란스러운 것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 균질화와 획일화를 목표로 하는 지배질서의 관점에서 그러한 새로움은 병적이거나 빗나간 것이거나 미친 것으로 규정되고 분류된다. 그러나 새로움의 추구를 병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지배질서의 건강함이 오히려 병든 것임이 판명되는 순간 이제까지 병적인 것으로 치부되던 것이 사실은 진정한 건강함(생명)을 위한 변증법적 회복 세포였음이 드러난다.

 「시여, 침을 뱉어라」에서 ‘자유와 사랑의 동의어인 혼란은 문화의 본질적 근원이고, 그것을 발효시키는 누룩의 역할을 하는 것이 진정한 시의 임무’라는 취지의 주장을 하였을 때, 그는 현대사회에서 시인의 존재론적 위상이 바로 ‘변증법적 회복 세포’와 같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시는 문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민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인류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문화와 민족과 인류에 공헌하고 평화에 공헌한다.” 그리고 “그러면서도”의 전환을 통해 ‘미학주의’ 자체가 ‘현실주의’와 겹쳐지면서 이루어지는 초월적 종합을 가능하게 하는 매개 요인은 바로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라는 ‘온몸시론’의 핵심 명제이다.

 

3

이 글의 과제는 ‘시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풀어보는 것이었다. 시를 논하는 사람이지 시를 쓰는 사람은 아닌 나는 그 과제를 수행하기 위하여 김수영의 ‘온몸시론’에 짧은 주석을 다는 방법을 택하였다. 시란 무엇인가? 김수영에 따르면, ‘시는 온몸으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을 통하여 시인이 자기형성의 차원에서 새로움을 제시하는 것이 시다. 사실 새로움이란 본질적으로 모호하고 추상적인 것일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새로움이란 현실에서 실제로 이루어진 것 자체라기보다는 언제나 새로움에 대한 동경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여태껏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이자 앞으로도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이기도 하다. 김수영의 ‘온몸시론’에는 새로움을 현대성과 연관된 문제의식으로 설정하지 못하는 시인들에 대한 부정과 비판은 무성한 반면에 새로움 자체에 대한 내용상의 규정은 거의 보이지 않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김수영의 ‘온몸시론’은 지나치게 원론적인 사실들만을 강조하고 있는 시론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에는 새로움을 추구하지 못했던 사람들을 반성하게 하고 나아가 새로움을 동경하게 하는 힘이 들어 있다. 그 힘은 ‘온몸시론’을 구성하는 다양한 계기들을 통해 이루어진 밀도와 긴장에서 나온다. 그러한 밀도와 긴장이야말로 ‘온몸시론’의 본질적인 주제라 할 수 있다.

김수영은 ‘온몸’과 함께 ‘이행’을 강조한다. ‘이행’ 또는 실천이란 주장도 아니고 설명도 아니다. 그것은 시로써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것, 아니 ‘시가’ 자유와 사랑과 새로움을 수행하는 것, 아니 시가 자유와 사랑과 새로움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김수영의 말처럼, 지금 이 순간에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시와 자유와 사랑과 새로움에 대한 지루한 횡설수설을 그치고, 서로의 얼굴에 ‘침을 뱉는 일’, 진정한 이행을 하지 못하는 우리를 반성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다음엔? 김수영은 이렇게 말하였다.

시도 시인도 시작(始作)하는 것이다. 나도 여러분도 시작하는 것이다. 자유의 과잉을, 혼돈을 시작하는 것이다. 모기소리보다 더 작은 목소리로 시작하는 것이다. 모기소리보다 더 작은 목소리로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시작하는 것이다.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그것을……

                                                                                                                  (우이시 제19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