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驪州)에 다녀와서/ 임보
지난 주말 여주에 가서
그릇 굽는 구경을 했다.
묽은 진흙을 밟고 밟아
숨을 죽인 다음
물레로 물레로 돌려
흙의 혼을 훑어 내고
항아리 그 새 형상을 빚어
천 도의 불에 태우고 태웠다.
그리고
인고(忍苦)의 그 영혼에서 태어난
백자 그 흰 빛을 보았다.
(무슨 영문인지 그 후 며칠 동안
영 마음이 내키지 않아
굶은 사람처럼 그렇게
허허롭게 빈둥거렸는데
오늘 아침 산을 오르다
드디어 그것을 알았다.)
천 년을 밟히고 밟힌
이 땅의 사람들이
어이해서 항아리를 즐겨 빚고
천 년을 태우고 태운
이 땅의 서민들이
어이해서 흰 옷을 입었는지,
그렇구나
인고의 불길이 뜨거울수록
굳은 도기가 태어나듯
오늘쯤 이 땅에
눈부신 명기(明器)들이 쏟아져 나와
인제는 세상을 울릴 만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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