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 임보
무릇 세상의 모든 것들은 제 나름의 신발들을 신고 있다.
배는 물의 신발 위에 있고
달은 구름의 신발을 달고 있는 셈이다.
지금의 차는 둥근 수레의 신발을 굴리며 단숨에 천 리를 달리기도 하지만
옛날의 가마는 사람의 어깨를 신고 하루에 백 리를 가기도 했다.
어떤 것들은 너무 크고 무거운 신발에 갇혀 움직이지 못하기도 한다.
넓은 대지의 신발을 신고 있는 산들이 그러하고
깊은 흙의 신발을 신고 있는 나무들이 또한 그러하다.
일찍이 내 조부께서는 잘 마른 오동나무 조각으로 나막신을 만들어 내게 신겼다.
때로는 삼과 왕골속을 촘촘히 엮어 곱게 물을 들인 미투리를 신기기도 했다.
그분이 세상을 뜨고, 내 나이 들어 어지러운 저자 골목을 굴러다니면서
내 발목에 끼운 신발들은 모두 선량한 짐승들의 가죽이었다.
그동안 내 몇 놈의 소와 말의 가죽에 얹혀 세상을 살아 왔던가.
문득 오늘 아침 내 발이 사뭇 부끄러워
잠시 맨발로 땅에 내려 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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