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보 시선

[스크랩] 임보 시선 <눈부신 귀향>에서 2

운수재 2009. 11. 1. 14:33

 

 

    임보 시인  

    시선   <눈부신 귀향>  에서  

 

Street worker

 

 

돌의 나이 / 임보

 

어느 고고학 박사가

땅 속에서 석기를 하나 찾아냈다

몇 만 년 전 것이라고 했다

 

길을 가다 나도

돌멩이 하나 집어들었다

몇 백만 년 전 것이 아닌가? 

 

* 고고학자들이 구석기 유물이라고 해서 특정한 돌에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고, 돌을 즐기는 사람들이 수석이라

해서 특정한 돌멩이를 선택해서 애지중지하는데 도대체

이 세상에 오래된 돌 아닌 것이 어디 있으며, 신비롭지

않은 돌이 어디 있단 말인가?

 

Last Light

 

 

동면(동면) / 임보

 

겨울 산은 눈 속에서

오소리처럼 웅크리고 잠들어 있다.

 

산의 체온을 감싸고 돋아나 있는

빽빽한 빈 잡목의 모발(毛髮)들

 

포르르르

장끼 한 마리

포탄처럼 솟았다 떨어지자

 

산은 잠시 눈을 떴다

다시 감는다.

 

A ROADSIDE MOSQUE

 

신발 / 임보

 

무릇 세상의 모든 것들은 제 나름의 신발들을 신고 있다.

배는 물의 신발 위에 있고

달은 구름의 신발을 달고 있는 셈이다.

지금의 차는 둥근 수레의 신발을 굴리며 단숨에 천 리를 달리기도 하지만

옛날의 가마는 사람의 어깨를 신고 하루에 백 리를 가기도 했다.

어떤 것들은 너무 크고 무거운 신발에 갇혀 움직이지 못하기도 한다.

넓은 대지의 신발을 신고 있는 산들이 그러하고

깊은 흙의 신발을 신고 있는 나무들이 또한 그러하다.

일찍이 내 조부께서는 잘 마른 오동나무 조각으로 나막신을 만들어 내게 신겼다.

때로는 삼과 왕골속을 촘촘히 엮어 곱게 물을 들인 미투리를 신기기도 했다.

그분이 세상을 뜨고, 내 나이 들어 어지러운 저자 골목을 굴러다니면서

내 발목에 끼운 신발들은 모두 선량한 짐승들의 가죽이었다.

그동안 내 몇 놈의 소와 말의 가죽에 얹혀 세상을 살아 왔던가.

문득 오늘 아침 내 발이 사뭇 부끄러워

잠시 맨발로 땅에 내려 서 본다.

 

 

새들을 날개 위에 올려라 / 임보

 

새는 날개로 허공을 받치고 떠오를 때 새다

새는 높은 나뭇가지 위에 올라 반짝이는 눈으로 지상을 응시할 때 새다

 

버려진 먹이를 찾아 인가의 주변을 서성거리거나

먹다 남은 먹이를 얻으러 육식동물의 곁을 어정거리는 놈들은

이미 새가 아니다

 

철원(鐵原)에 가서 겨울 독수리 떼를 보았는데

인간들이 던져둔 고기에 취해 검은 쉼표들처럼 빈 들판에 날개를 접고 있었다

상원사(上院寺)에 가서 고운 멧새들을 보았는데

방문객들의 손바닥에 올라 스스럼없이 모이를 쪼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새가 아니라 가금(家禽)

언젠가는 닭처럼 날개를 잃게 되리라

간악한 인간의 손들이여

새의 날개를 꺾지 말고

그들을 맑은 날개 위에 올려라

 

Mamma Please Listen

 

사슴의 뿔 / 임보

 

사슴의 뿔은 화려하다

소의 그것처럼 단순하지 않고

여러 갈래로 길게 벋어 허공에 치솟아 있다

이 얼마나 빛나는 무기인가

그러나 사슴은 그런 무기를 지니고 있지만

하나의 뿔도 갖지 못한 늑대 사자 무리들에게 먹히며 산다

아니 이 지상에서

사슴에게 지는 동물은 하나도 없다

풀잎만 씹고 사는 초식동물,

이 선량한 친구에게 먹힐 동물은 아무도 없다

사슴의 뿔은 전투용 무기가 아니다

그러면서 왜 거기에 그처럼 화려히 매달렸는가

그것은 하나의 관이다

무엇을 위한 관이냐고?

암컷들에게 보이기 위한 위용의 관

저 수컷들과의 뿔 겨루기를 보라

덜그럭 덜그럭

사슴의 뿔은 암컷을 얻기 위해서만 힘을 쓴다.

 

Curiosity

 

간월암(看月菴)* / 임보                                                                   

 

간월암 섬절을 물어 물어 갔더니

바다가 미리 알고 물길을 열었네

마른 바다 모래 밟고 건너가 보니

절문은 닫혀 있고 시누대만 으시시

무학(舞鶴)이 났다는 학돌재*는 어디고

만공(滿空)*이 깃들었던 선방은 어딘가

바다 막아 육지 만든 벽해상전(碧海商田)*

굴 파는 여인들만 옷깃을 잡는데

안개 속에 바다는 주저앉아 버리고

하늘엔 낮달도 보이지 않고

간월암 간월암 목탁소리만

나그네 가슴속을 파고드누나

 

* 간월암(看月庵) :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리에 위치한 작은 암자로 조선 초

무학 대사가 창건하였으며, 만공 대사가 중건하였다고 전함.

만조에는 섬이 되고 간조에는 육지와 연결됨.

* 학돌재 : 이태조의 왕사(王師)였던 무학 대사가 태어났다는 곳           

* 만공 : 조선조 말기의 선승          

* 벽해상전(碧海商田) : 상전벽해(桑田碧海)를 패러디한 것임. 

 

Mother With Cubs II

 

주탁(朱鐸) / 임보 

 

라이따이한* 열세 쌍의 합동 주례를 서려고

베트남에 갔던 한 처사가*

올망졸망한 놋쇠 주발 몇 개를 얻어 왔다

주발은 주발인데 식기(食器)가 아니라 악기(樂器)다

절에서 두드리는 타악기라는데

말하자면 놋쇠로 된 목탁인 셈이다

우이동 시낭송회에 그놈들을 몰고와서

청중들의 눈을 감기고 조용히 울린다

딩……

띵…

딩……

팅………

맑고도 탄탄한 명주실 연줄?

살얼음 강물 위의 그믐달빛?

매큼한 동침이 실고추의 아림?

병든 영혼을 갉아먹는

황금벌레의 울음이다

그 울림은 우리의 시들 속에 스며

알 수 없는 슬픔의 알들을 슬었다

장차 어느 고요한 밤 부화하여

꿈속에서 비상하는 나비들을 보리라

라이따이한……

라이따이한……

 

* 라이따이한 

월남전 때 파병 한국군들이 만들어 낸 2세들인데 14,000 명이 넘는다고 함.

* 작곡가 변규백(卞圭百)

 

Sweet Dreams

 

개안차(開眼茶) / 임보

 

삼복염천에 내설악의 백담사(百潭寺) 골짝에서

다회(茶會)가 열렸는데

멀리 일지암(一枝庵)에서 온

한 다승(茶僧)이 논하기를

새벽 일찍 일어나 차밭에 서면

벅국이 소리도 울리고

진달래 기운도 서리는데

이놈들을 찻잎에 담아 갈무려 우린 것이

‘초의선차(艸衣禪茶)’라는 자랑이다

듣는 사람들이 그 선차에 혀를 적시며

황홀히 앉아 있는데

느닷없이 땡추 한놈 불쑥 일어나

서장국(西藏國) 얘기를 꺼내는데

그 나라에서는 찻잎을 땅속에서 띠우는데

두엄자리를 파고 수수백년 묻어 두면

땅속의 온갖 잡동사니 기운들이 서리고 서려

천하의 영물(靈物)이 되는데

어느 조상이 묻어 둔 것을

운 좋은 어느 손자의 손자놈이

꿈에 현몽(現夢)이나 얻어

그 놈을 파낸다고 하는데

생명이 긴 놈은 천 년을 헤아리는 것도 있어서

땡중도 그놈 한 모금 얻어 마시면

세상이 그만 번쩍 열린다고 해서

이를 개안차(開眼茶)라 이른다고 하자

좌중이 그만 박장대소를 하고 웃는다

 

 

두 정자의 말씀 / 임보

 

파주 문산에 갔더니

임진강가 동산 위에 두 정자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반구정(伴鷗亭)과 앙지대(仰止臺)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데

조선조의 명 재상 황희(黃喜, 1363~1452)가 노닐었다고 한다

‘반구(伴鷗)’란 갈매기와 짝을 함이니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悠悠自適)한다는 뜻인가 보다

‘앙지(仰止)’란 ‘지(止)’를 우러른다는 말이니

욕심을 멈추고 안분지족(安分知足)한다는 뜻인가?

몇 임금을 섬기며 60성상의 관직에 정승의 자리 18년

세상을 떠난 90의 세 해 전까지 국록을 누린 분이었는데

언제 갈매기를 벗하고

언제 욕심을 그칠 수 있었단 말인가?

하기사 청백리 그도 평생 이루지 못한 일이었기로

세상 사람들을 향해 그렇게

어려운 문자를 심어 놓은 것이란 말인가?

봄이라고 하건만

3월의 강바람이 이마에 시리다.

 

 

만해화(萬海華) / 임보

 

천만 성운(星雲)의 별들 중 가장 빛나는 지구

지상에서도 제일 아름다운 금수강산

산 가운데 으뜸인 백두대간의 설악

설악의 심장인 맑은 백담의 계곡에서

이 시대의 가장 거룩한 님을 기리는

성스러운 축전을 경건히 펼치노니

 

한때, 이 강토가 어지러웠던 시절

잠든 백의(白衣)의 푸른 혼을 일깨운 지사(志士)로

잔악한 야만(野蠻)의 멱살을 잡아 뒤흔들던 투사(鬪士)로

사찰(寺刹)의 낡은 빗장을 열어젖힌 유신의 선사(禪師)로

만인의 흉금을 사로잡은 사랑의 시인(詩人)으로

섬광처럼 이 땅에 오신 님, 만해(萬海)여,

 

개울이 모여 여울을 만들고

여울이 모여 강물이 되던가?

천의 강하가 모여 바다를 이루고

일만 바다가 모여 만해(萬海)가 아니던가?

만해, 당신은 삼라만상을 다 안은 자비요

억만 중생을 기르는 무궁한 생명수로다

 

님이 뿌린 정기(精氣)의 씨앗은 싹이 돋고 자라

어느덧 한 그루 거목으로 굳게 뿌리를 내렸나니

이제 너울거리는 무성한 가지마다 꽃이 피어나

눈부신 광채, 신묘한 향훈(香薰)이 팔황(八荒)을 감싸도다

의기(義氣)와 자애(慈愛)의 혼이 빚어낸 만다라화(曼茶羅華),

세상을 환히 밝히는 만해화(萬海華)여!

 

산들은 하늘을 향해 더욱 높이 치솟고

강들은 바다를 향해 더욱 도도히 흐르는구나

뭍에 실려가는 무량(無量)의 초목금수(草木禽獸)들도

물에 실려가는 억만(億萬)의 어하해패(魚鰕蟹貝)들도

성하(盛夏)의 눈부신 태양 아래

푸른 등들을 뒤채며 구원(久遠)의 꽃을 찬미하는도다.

 

* 이 글은 2005년 만해축전 행사를 위해 쓴 축시임.

 

 

바람의 스승 / 임보

 

온 세상이 깊은 눈 속에 묻혔을 때

그분은 홀로 이 세상을 뜨셨다

 

1952년 어느 봄날

전라남도 승주군 주암면 창촌리 산골에

짙은 갈색 안경에 검은 베레모를 쓴

바람의 신 같은 젊은 사내가 찾아왔다

 

그리고, 그는 아무 물정도 모르는

열네 살의 어린 한 소년에게 바람을 넣었다

세상을 움직이는 가장 큰 힘을 지닌 사람이 누군 줄 아느냐?

백만 대군을 거느린 장군도 아니고

억만 금을 거머쥔 거부도 아니고

천만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제왕도 아니고

한 자루의 아름다운 펜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소년의 황량한 가슴에 매일 종균을 뿌렸다

소년은 드디어 '글의 병'을 앓으며 고향을 떠났다

읍으로, 큰 도시로, 다시 먼 서울로 떠돌며

거센 세상의 풍파에 시달리면서도

언제나 한 자루의 펜을 삿대처럼 쥐고 있었다

청년을 지나고 장년을 넘어 드디어

아홉 권의 시집을 가진 중견 시인이 되었다

 

어느 날

늙은 소년은 아홉 권의 시집을 들고

바람의 스승을 찾아갔다

도대체 이것들이 세상을 움직이는 무슨 힘이 있습니까?

그러자 스승은 웃으면서 말했다

저 산야를 뒤덮고 있는 거대한 숲들을 보라

저 아름드리의 거목들도 애초의 시작은

눈에 잘 띄지도 않는 작은 씨들로부터 비롯되지 않았느냐

그것들이 수많은 계절들이 흐르는 동안 자라고 자라

거대한 수목들로 지상을 저렇게 덮고 있구나

네가 세상에 뿌린 시의 종자들도

어느 이름 모를 사람들의 가슴속에 뿌리를 내려

말없이 자라고 있으리라

 

그리고, 바람의 스승은 갔다

막상 당신은 한 권의 시집도 이 지상에 남겨 놓지 않은 채

시인도 소설가도 아닌 무명의 한 문학애호가로

한평생 시골에 묻혀 살다가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는 어느 겨울 밤

온 세상이 깊은 눈 속에 묻혔을 때 바람처럼 갔다

한 소년의 가슴속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시의 나무를 한 그루 심어 놓고…

 

 

궁합(宮合) / 임보

 

명인(名人)은 명금(名琴)을 만나

만고의 소리를 빚고

명군(明君)은 충신(忠臣)을 만나

만리의 천하를 얻는다

 

아무리 명궁(名弓) 보검(寶劍)이라도

명장(名將)을 만나지 못하면

보통의 활과 칼에

지나지 않을 뿐

 

몇 억만 세월만에

몇 억만 사람들 틈에서

나와 그대가 만나

빚어낸 이 황홀이여!

 

명궁(名宮)이로다

명금(名琴)이로다

 

 

 

임보 시인

카페    <자연과 시의 이웃들> http://cafe.daum.net/rimpoet

블로그 <시인의 별장> http://blog.daum.net/rimpoet 

출처 : 자연과 시의 이웃들
글쓴이 : 동산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