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비판

김수영의 <풀>

운수재 2007. 4. 5. 09:35
 [명시비판]

김수영의「풀」 /   임보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뿌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풀」전문


 「풀」은 김수영(金洙暎; 1921~1968)이 4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기 바로 전에 발표했던 시인데 그의 어떠한 작품보다도 독자들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아오고 있다. 나약한 민중과 거센 세파(世波), 넓게는 미약한 생명체와 거대한 자연과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다루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야유와 독설이 주도한 그의 일반적인 작품과는 달리 비교적 온건하고 쉽게 만들어진 가작이다.

 유사한 구절들의 반복이 즐겨 구사되고 있는 이 작품의 의미 구조는 단순하다. 풀이 눕고․울고․일어나고․웃는다는 내용이다. 풀이 눕고 우는 것은 바람과 비와 흐린 날씨 때문이다. 그러나 풀이 일어나고 웃는 요인은 밝혀져 있지 않다. 이는 비와 바람이 그치고 날씨가 맑아지는 외적인 변화를 상대적으로 상정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런 외적 요인뿐만 아니라, 내적 요인인 풀의 의지도 관여하고 있음을 우리는 감지할 수 있다.


 제1연은 비 바람에 대한 풀의 1차적 체험이다. 비 바람을 못 이겨 함께 눕고 운다.

 제2연은 제1차적 체험에서 민감해진 풀이 바람이 불 징조를 보이면 바람도 불기 전에 먼저 눕는다. 또한 바람이 그칠 기미를 보이면 바람이 채 그치기도 전에 먼저 일어나기도 한다. 바람에 길들여진 풀이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제2연에서는 풀의 의지가 작용한다.

 제3연의 풀은 잘 단련된 풀이다. 바람이 어느 정도 불어도 버티며 있다가 나중에 눕는다. 일어나는 것도 바람이 아직 그치지 않았는데도 일어나서 웃는다. 좀더 강인해졌다고 할까, 아니면 약삭빨라졌다고나 할까. 그런데 눕는 것은 제1, 2연에서보다도 더 적극적이다. 날만 흐려도 발목까지 발밑까지 아니 풀뿌리까지 눕는다고 한다.

 제2연은 풀의 바람에 대한 순응 혹은 적응을 모색하고 있다면 제3연은 바람에 대한 저항 곧 적극적 대응 자세를 보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가 된 것은 제3연의 제1,2,3행(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과 맨 끝행(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의 내용이다. 흐린 날씨 때문에 풀이 눕는 모습을 점층적으로 심화시켜 표현하고 있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드디어는 뿌리까지 눕는다고 했다. ‘눕는다’는 풀의 굴복적 행위가 날씨만 흐려도(아직 바람이 불지 않고) 적극적으로 감행된다. 바람에 대한 능동적인 대응자세(제4,5,6,7행)와는 상반된 굴욕의 자세가 아닐 수 없다. 왜 같은 연 속에 이처럼 이율배반의 모순 구조를 지니게 했는가. 생명체(풀)와 환경(바람)의 역설적인 실존적 정황을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능률적이라고 생각해서 일부러 그런 것일까. 그러나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풀이 굴욕적으로 눕는 정황은 차라리 제2연(풀의 순응)과 아우르든지 아니면 제2연 다음에 새로운 한 연으로 독립시켜 삽입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지 않았을까.

 제2연을 바람에 대한 순응 구조로 본다면 맨 끝행의 ‘먼저’도 ‘늦게’로 바꾼 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시는 이성보다는 감성이 주도하는 글이기 때문에 시에서 논리적 구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지 모른다. 그러나 감성적인 글도 가급적 논리적 구조를 지닐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는 편이 그렇지 못한 쪽보다 더 설득력을 갖는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뿌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더 늦게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제2연 제4행의 ‘먼저’를 ‘늦게’로 바꾸고, 제3연의 제1,2,3행과 8행을 하나로 묶어 새로운 한 연으로 독립시켜 전체 작품을 4연으로 재구성해 본 것이다. 굳이 이처럼 무모한 시도를 감행한 것은 이 작품의 전개 구조가 ‘시련→ 순응→ 굴욕→ 극복’의 통일성을 가졌더라면 하는 아쉬움 때문에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