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있는 풍경
물이 있는 풍경 / 임보
고등학교 시절― 우금 40년 전의 일이지만 지금도 눈에 선하다. 월요일 아침이면 애국조회를 하던 널따란 운동장, 그리고 조용 조용 말씀하시던 교장 선생님의 훈화, 그 훈화 말씀이 가슴에 와 닿아 애국조회시간이 기다려지기도 하지 않았던가. 도대체 그때 장준한(張俊翰) 교장 선생님께서는 무슨 말씀을 하셨기에 학생들을 그토록 사로잡았던 것일까. 방학 동안이면 담임 선생님은 제쳐두고 교장 선생님께 장문의 편지를 보내곤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아마 어린 우리들에게 아름다운 꿈과 희망을 불어넣어 주셨으리라. 교정 위에 늘어서 있던 아름드리 벚나무들은 지금도 잘 자라고 있는가. 새로 지은 도서관 건물이 무척 정겨웠었는데 지금은 아마 낡아서 볼품이 없게 되지나 않았을까.
호남의 수재들이 모인 광주고등학교에는 선생님들 또한 훌륭한 분들이 많이 계셨다. 그 가운데서도 학생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던 분이 국어를 담당하셨던 유공희(柳孔熙) 선생님이다. 문학에 관심이 있었던 학생들에겐 더욱 그랬다. 그분은 교과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학생들에게 인생과 문학과 철학을 말씀하셨는데, 보들레르를 위시해서 랭보와 베를렌 발레리 등 프랑스의 상징파 시인들에 대한 얘기며, 『생활의 발견』의 저자인 생의 철학자 린위탕(林語堂) 그리고 『사랑과 인식의 출발』의 구라다 하쿠조(倉田百三) 등을 소개해 주시기도 했다. 내가 문학을 선택하게 된 것도 그렇고 세상을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삶의 여유로운 자세를 배운 것도 바로 그분의 영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이미 문학병에 걸려 있었다. 『태광(胎光)』이라는 동인지를 만들고 지방신문에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으니 얼마나 거드름을 피웠겠는가. 나는 떨어진 모자를 눈이 보이지 않게 눌러 쓰고, 어머님께서 무명베에 검정물을 들여 손수 지어 주신 교복을 입고, 검정 고무신짝을 끌고 다녔다. 선생님이나 동료들이 보기에 얼마나 꼴불견이었을까 마는 간섭하지 않았다. 다만 깡패가 많았던 시절이라 길거리를 지나다 거만하다고 얻어맞은 적은 더러 있었다.
그 시절도 학교에서는 대학 입시 준비를 열심히 시켰던 것 같다. 매달 모의고사를 보아 100등 이내의 학생들의 명단을 학교의 현관 위에 써 붙이곤 했다. 여름 방학이 시작되기 얼마 전이었다. 유공희 선생님께서 나를 부르셨다. 묻는 말씀이 요새 네 이름이 걸리지 않으니 무슨 연고냐는 것이다. 모의고사 100등 이내의 명단에서 내 이름이 빠진 걸 보시고 걱정하는 말씀이다.
“선생님, 저는 진학할 생각을 그만 두었습니다.”
사실 나는 그때 대학을 우습게 생각하고 있었다. 문학을 하는데 굳이 대학이 무슨 필요인가. 그 비싼 등록금 가지고 책이나 많이 사서 읽고 열심히 글이나 쓰면 되는 것 아닌가. 당시 내 가정 형편도 넉넉지 못한 터라 그렇게 작정하고 학과 공부는 밀쳐둔 채 문학서적만 탐독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얘기를 다 듣고 나서 선생님께서는 빙그레 웃으셨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대학 가서 배울 게 별로 없을지 몰라.”
선생님께서는 내 생각에 동의하시듯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어서 덧붙이시길
“그런데 말이다. 대학엘 가지 않고도 지식은 책을 통해서 얻을 수 있지만 대학에는 지식 못지않게 소중한 대학 생활이라는 것도 있다. 그 대학 생활이라는 것조차도 네가 마음내키지 않는다면 네 결심대로 하려무나.”
그 말씀을 듣고 나온 나는 며칠을 두고 잠을 설치며 고민을 했다. 그 ‘대학 생활’이라는 것을 체험하지 않더라도 정말 후회스럽지 않을 것인가? 이런 저런 여러 가지 생각을 하다가 드디어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일단 대학에 들어가 대학 생활이란 것이 어떤 것인가 한번 체험을 해 보자. 그리고 그 대학이라는 것이 별로 재미없으면 그때 그만 두어도 될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그 여름방학부터 다시 입시 공부를 시작해서 용케도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다.
보통의 교사들 같으면 제자들이 그런 건방진 얘기를 했을 때 아마 이렇게 나무랐을 것이다.
“이놈아, 네가 무얼 안다고 그래, 대학 안 나오면 아무 것도 못해, 쓸데없는 생각 말고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갈 준비나 하라구, 문학은 대학에 가서 해도 늦지 않아.”
만약 이런 평범한 꾸중을 들었더라면 나는 선생님의 의사를 좇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선생님께서는 제자의 의사를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잘못된 판단을 스스로 고쳐 가도록 지도를 하셨던 것이다. 그 뒤 나도 교직에 있으면서 학생들과 상담을 할 경우 선생님의 그런 교육방법을 되뇌이며 늘 생각은 하지만 실천에 옮기는 일은 쉽지 않았다. 아무튼 선생님의 그 조언이 아니었드라면 아마 나는 대학을 포기한 채 반거들충이가 되어 평생을 방황하고 지냈을 지도 모른다.
고등학교 친구들 가운데서도 특별히 가까이 지냈던 오우(五友)가 있다. 문학을 좋아하던 친구들이었는데 키가 작은 다섯 놈들이었다. 우리들은 방과 후면 도서관에서 열심히 책을 읽고 서로 토론을 벌이기도 하고 인생과 꿈을 얘기하기도 했다. 그때 우리가 즐겨 읽었던 작가들이 도스토에브스키, 사르트르, 카뮈 등으로 기억된다. 의과대학 잔디밭에 들어가 뒹굴면서 혹은 무등산 증심사 계곡에 주저앉아 막걸리를 마시면서 문학과 철학을 떠들어댔다. 그러면서 우리 다섯 친구들은 ‘五’자가 들어간 호를 지어 나누어 갖기도 했으니 제법 조숙했다고나 할까. 콩처럼 영글었던 오병선(吳炳善) 군은 오두(五豆), 찝차처럼 작고 부지런했던 이이화(李離和) 군은 오집(五集), 바위처럼 단단하고 어른스럽던 정영식(鄭永植) 군은 오암(五岩), 허풍과 재기가 번득였던 박봉간(朴俸墾) 군은 오공(五空) 그리고 나는 데데하고 거만타고 해서 오대(五臺)라는 이름을 달았다. 모두가 뚜렷한 개성과 자존심이 대단했던 친구들인데 당시 우리들 인생의 목표는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40여 년이 흘러간 지금 그 친구들은 여러 곳에 흩어져서 제 갈 길들을 열심히 가고 있다. 오두(五豆)는 법과대학에 진학하여 사법고시를 수석으로 합격하여 명판사가 되었다. 지금은 퇴직하여 유능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오집(五集)은 규장각에 들어가 한학을 열심히 공부하더니 유명한 재야 사학자가 되어 역사문제연구소를 이끌면서 이미 많은 저서들을 내놓았다. 요즈음은 방대한 한국사 저술에 매달려 있다. 오공(五空)은 오래 언론사에서 활동을 해 왔다. 광주 MBC방송국의 이사를 거쳐 지금은 한국방송개발원에서 일하고 있다. 오암(五岩)의 생애는 평탄하지 않았다. 사업도 해 보고, 목사가 되어 목회일도 하고, 번역도 하는 등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거치며 어렵게 살아 왔는데 이 세상과는 궁합이 잘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무절제한 과음으로 그는 연전에 세상을 먼저 떠났다.
한평생 문학을 못 버리고 지금까지 살아온 유일한 사람은 나 오대(五臺)뿐이다. 어찌 보면 초지일관의 지조가 있는 것도 같지만 사실 보다 나은 다른 길을 선택할 만한 능력이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아파트를 찾아 몇 년이 멀다고 이사들을 다니는데 나는 우이동 내 집에서 30여 년을 붙박여 살고 있는 것만 보아도 얼마나 융통성이 없는 사람인가를 짐작하리라. 그러나 나도 그 동안 시인이 되어 몇 권의 시집을 세상에 내놓았고 국립대학 교수로 내가 좋아하는 시를 강의하면서 살아가고 있으니 크게 불만해 할 것도 없다.
달포 전 광주에 내려갔다가 우연히 공항에서 오집(五集)을 만났다. 강연차 강진에 갔다오는 길이라고 했다. 같은 서울에 살면서도 수 년 동안 격조히 지내다가 문득 고향 땅에서 만나니 옛정이 새삼 솟아올랐다. 가까운 시일 내에 오우(五友)들 서로 연락해서 유(柳) 선생님 모시고 소주라도 한 잔 하자고 약속을 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뒤 오집에게서 전화 연락이 왔다. 내용인 즉슨 유 선생께서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 밖에서 만나기 곤란하니 선생님 댁으로 문병을 가자는 것이다. 그래서 바로 그 다음 일요일 오후에 찾아뵙도록 한 것이다.
오공은 일이 있어 못 나오고, 오집과 오두 그리고 나 셋이서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비를 맞으며 선생님 댁을 묻고 물어 찾아갔다. 우리가 찾아간 역촌동의 선생님 댁은 20여 년 전에 자리잡고 사시던 바로 그 집이었다. 나처럼 선생님께서도 이사에는 별로 취미가 없으신 모양이다. 초인종을 눌러도 아무런 대답이 없다. 분명 며칠 전에 전화로 찾아뵙겠다고 연락을 드리긴 했는데 오늘은 전화조차 불통이다. 치료를 받으러 병원에 가신 것인가. 우리가 찾아온다는 걸 잊고 외출을 하신 것인가. 문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는데 옆집의 젊은이가 나오더니 조금 전에 선생님이 밖에 계신 걸 보았다고 일러준다. 그래서 다시 세차게 대문을 두드려 보았더니 그제서야 집안에서 인기척이 났다.
몸을 잘 가누지 못하고 비척거리며 나오시는 선생님을 보자 가슴이 아팠다. 선생님께서는 무척 반가워하시면서 우리를 맞았다.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그 동안 겪었던 일들을 재미있게 말씀하신다. 귀가 멀어 잘 들리지 않는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작년에 사모님을 먼저 떠나보내고 혼자 사신다는 얘기며, 당신께서는 전립선암을 앓아 오줌통을 매달고 다니는 신세여서 외출하기도 곤란타고 하셨다. 2남 2녀 자녀들은 잘 길러 의사도 있고 교수도 있지만 혼자 지내는 것이 편해서 자식들과 함께 사는 걸 마다한다고 하셨다. 기력은 많이 쇠하셨지만 유머와 위트에 넘친 구수한 말솜씨는 여전하다. 선생님께서는 아직도 약주를 즐기시기에 우리는 댁 근처의 조그만 음식점으로 자리를 옮겨 옛 추억담들을 나누었다. 술이 몇 순배 돌아갔을 때 나는 선생님께 은근히 여쭈어 보았다.
“선생님, 원고는 다 모아 두셨지요?”
선생님께서는 수필을 잘 쓰신다. 세상을 관조하며 여유롭게 살아가는 지혜와 해학이 넘친 글이어서 보는 이의 마음을 흐뭇하게 한다. 그래서 어떤 라디오 방송국에서는 선생님의 작품 코너를 만들어 연속 낭독을 시도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아직 선생님의 작품이 책으로 묶여 나오지 않고 있다. 나는 20여 년 전부터 선생님을 뵈올 때마다 수필집을 만들어 내자고 청을 드렸지만 선생님께서는 고개를 흔드신다. 이유인즉슨 당신 생전에 어찌 부끄러워 문집을 엮느냐는 것이다. 문집이라고 하는 것은 본인이 세상을 떠난 뒤 후손이나 후배들이 만든 것이지 어찌 손수 만든단 말인가. 이것이 선생님의 지론이다. 책을 출판해 내는 일에 있어서는 옛 선비들이 지녔던 그런 완고한 기질을 지닌 분이다. 나는 아직도 선생님의 그 생각이 바뀌지 않았나 살펴보려고 은근히 물었던 것이다.
“원고야 다 정리를 해 놓았지만…”
선생님의 생각은 아직도 변함이 없었다. 당신도 욕심같아서야 당신 생전에 작품집을 보는 것이 어찌 싫겠는가. 그러나 지조가 헛된 욕망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리라. 이 얼마나 서슬 푸른 마음의 고고함인가. 나는 보잘 것 없는 작품들 모이기가 무섭게 시집으로 묶어 세상에 내 놓는데 선생님 보시기에 얼마나 가소롭겠는가 생각하니 심히 부끄러웠다.
세상은 온통 자기 현시의 욕망 속에 사로잡혀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허황된 책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온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신문이나 텔레비전 등 매스컴을 통해 제 얼굴 내밀려고 얼마나 야단법석들을 떨고 있는가. 어떤 자들은 손수 제 향리에 자신의 시비를 세워 놓고 잔치를 베풀기도 하니 욕심이 극에 달한 세상임을 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선생님의 이러한 고집스런 지조는 무너져 가는 세상을 향한 날카로운 경종인 지도 모른다.
선생님의 뜻이 그러하지만 다음에 찾아뵐 때는 선생님의 원고를 받아들고 나올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골목길엔 내리는 빗물이 고여 유리처럼 반짝이고, 그 속에 곱게 잘 익은 감들의 그림자가 그림처럼 박혀 있었다. 「물이 있는 풍경」 선생님이 언젠가 말씀하시던 수필의 제목이 떠올랐다. 작품집의 이름을 그렇게 다는 것도 괜찮으리라.
“건강만 하면 인생은 역시 즐거운 거야.”
돌아가는 우리들의 등을 향해 선생님이 웃으시며 던지는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