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수재 2007. 5. 27. 06:55

 

 

팔영산(八影山)  /  임보

 

 

전남 고흥에 팔영산이란 명산이 있다. 여덟 봉우리가 올망졸망 솟아 있는 돌산인데 오르는 길이 아기자기 다양해서 등산객들이 즐겨 찾는다. 문인산악회 회원 몇 사람이 지난 정월 초승께 팔영산에 올라 시산제(始山祭)를 드린 바 있는데, 세속에 전한 그 산의 전설은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이 산의 여덟 봉우리가 중국 어느 임금의 세숫대야에 어른거려서 사람을 풀어 탐색을 해 본 바, 바로 조선의 이 산이기로 이름을 팔영(八影)이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어딘가 좀 모자란 듯한 엉성한 느낌이 든다. 말하자면 이야기의 머리든 꼬리든 어느 부분이 잘려 나간 것만 같다. 어쩌면 머리와 꼬리가 다 떨어져 나가고 가운데도막만 남아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산 아래에 능가사(楞伽寺)라는 절이 있기에 승방의 더운 아랫목에서 언 몸을 지지며 하룻밤 지내는데, 마침 오래 묵은 한 노승이 곁에 있기에 그를 졸라 이것저것 산에 얽힌 얘기들을 들어 보았다. 그가 들려 준 말에 조리가 잘 닿지 않은 부분도 있어 그대로 다 믿기는 어렵지만 내 나름대로 다시 엮어 보이면 대강 이러하다.

 

옛날도 옛적에 한 호호백발의 도승(道僧)이 이 산골에 살고 있었는데 그는 천년 묵은 산삼밭을 가꾸고 있었다. 그 소문을 듣고 어느 날 장대 같은 장정 여덟 놈이 이 산골을 찾았다. 장정들은 그 도승 앞에 꿇어 엎드려 청하기를 그들은 진시황의 명을 받아 삼천갑자 동방삭을 찾아 불로초를 구하러 동방에 왔노라고 아뢰면서 신약의 한 뿌리를 간청했다. 이에 도승이 이르기를 그대들의 정성이 갸륵하니 그냥 보낼 수 없겠구나. 허나 이 영약은 내 것이 아니라 신명의 것이니 천지신명께 천일기도를 하고 얻어 가라고 했다. 그러나 그들의 기도는 백일도 채 못 되어 거덜이 나고 말았다. 그동안 삼밭을 몰래 염탐한 놈이 있어서 어느 날 밤 그들은 삼을 훔쳐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그러나 어이된 일인지 도망간 그놈들은 밤새도록 산봉우리만 빙빙 맴돌다 드디어는 얼어붙어 바위로 굳어지고 말았으니 역시 그 산삼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신명의 것이었던가 싶더라. 그리고 이 산의 모습이 진시황의 세숫물에 비친 것은 아마도 그의 어리석은 욕심을 꾸짖기 위한 것이나 아니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래서 팔영의 ‘영’자를 ‘影’ 대신 ‘靈’자를 쓰기도 한다.

 

자, 어떤가. 이렇게 고쳐 놓고 보니 이야기의 아구가 좀 맞아떨어진 것 같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