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시

[스크랩] 술의 길[酒門] / 임보

운수재 2007. 6. 11. 11:41

 

 

술의 길 [酒門]  /   임보

 

술을 드실 줄 모른다고요?

한 모금만 마셔도 얼굴이 붉어지며

골치가 아프고 가슴이 답답하여 견딜 수 없다고요?

술과 친하는 일이 다람쥐 이웃 사귀듯 어디 그리 쉬운 줄 아셨나요?

 

소주 두 홉쯤 마실 수 있으려면 수십 년의 독공을 쌓아야 합니다

술꾼들과 더불어 자정이 넘도록 버틸 수 있는 실력에 이르려면

한평생 기만 냥의 주세(酒稅)를 지불해야 하고

끝도 없는 아내의 바가지를 마이동풍으로 이겨낼 수 있는 도사가 되어야 합니다

밤늦게 돌아가는 취객이 비틀거리며 전봇대를 붙들고 있는 모습을 보셨나요?

술의 길이 얼마나 험난한 역경인가를 짐작했을 것입니다

 

내가 술의 길에 들어선 것은 네댓 살부터서 인데

조부님과 겸상을 했던 나는 그분이 자시던 반주와 일찍 만났습니다

혀가 타는 것 같은 독한 화주, 오만상을 찌푸리며 진저리를 치는

어린 손자가 귀여웠든지 그분은 자주 내 입술에 술잔을 댔습니다

신동들이라면 사서(四書)를 익히기 시작할 나이에

나는 그렇게 술과 씨름하며 술을 익혔습니다

 

아직도 바깥양반이 귀가하지 않으셨다고요?

한 주일에 삼사 일은 곤드래가 된다고요?

참 어지간하시군요.

그 정도의 실력이면 가히 주현(酒賢)이라고 이를 만합니다

바둑으로 따지면 3, 4단쯤 되는 격이지요

 

그래도 아직 술의 길은 요원합니다

매일 거르지 않고 마시는 주성(酒聖)도 있고

종일 술병을 끼고 사는 주선(酒仙)도 있습니다

그러는 너는 어디쯤에 해당하냐고요?

일찍 입문하여 한평생 수련은 했지만 이제

겨우 주사(酒士)라고나 할까요?

주붕(酒朋)을 만나면 멋모르고 마시지만

혼자서는 저녁에 반주 한 잔 정도

바둑으로 따지면 겨우 아마추어 초단쯤 될까?

 

남편이 귀가하거든 위로해 주십시오.

당신이 그렇게 받아들이기 힘든 술과

밤늦도록 사귀느라

얼마나 고생했겠습니까?

 

 

출처 : 자연과 시의 이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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