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빼미가 되어 가는 비애 / 유공희
올빼미가 되어 가는 비애 / 유공희
무슨 실존주의 아류의 넋두리처럼 들을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르겠으나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무시(無時)로 창피한 일로만 여겨지는 것이다.
이건 모두 제 멋에 사는 세상에서 아직 이렇다 할 내 멋을 가지지 못한 탓인 지도 모르겠다.
또는 워낙 범골(凡骨)이 되어서 날로 몰라보게만 되어 가는 세상에서 내 속에 무슨 파토스의 여과작용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풍화작용 같은 것을 겪고 있는 셈인 지도 모른다.
“모든 이론(理論)은 회색(灰色)이고 황금빛 나는 생활의 나무는 항상 푸르다.”
메피스토펠레스의 독설이 아니라 괴테 자신의 눈부신 독백으로 알려진 이 『파우스트』 중의 명구가 나의 온 영혼을 사로잡듯 하던 학생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분필 가루를 마시고 살게 된 지 불과 10유여 년에 나는 멋없게도 회색의 철학자가 되어 버린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신이 나야 할 인생이 창피하게만 여겨질 리가 없지 않은가.
‘황금빛 나는 생활의 나무’는커녕 허탈한 올빼미의 눈 같은 회색의 의식이 내 주변의 온갖 삶의 형상을 하나의 희화(戱畵)로 각색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황혼이 되어서 날기 시작하나, 새벽부터 퍼덕거리나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분명히 불길한 새인 것만 같다.
멀쩡하게 뛰노는 염통과 싱싱한 오감(五感)을 지니고 올빼미가 되어 가는 나….
번득거리는 안경 안에 노란 눈동자가 닮았다고 어느 놈이 ‘올빼미’라고 닉네임을 붙여놓은 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 슬픈 올빼미의 생리를 생생한 젊은 놈들에까지 전수(傳授)하려고 했으니 아무리 해도 핏기 없는 아웃사이더로 낙오(落伍)할 것을 면치 못하리라 생각이 든다.
“교양을 풍부하게 하려면 어떠한 책을 많이 읽으면 좋습니까?”
이렇게 자못 근엄한 표정으로 아뢰는 놈이 있었다. 나는 문득 『파우스트』의 제자를 앞에 둔 메피스토펠레스를 생각하면서 올빼미의 눈을 살짝 창밖으로 돌리며
“교양이란 것은 지식에서보다도 감동(感動)에서 더 많이 익는 거다. 숭고한 이모우션 속에서 살아야 한다 말이야. 그러기 때문에 독서보다도 연애가 더 멋이 있다는 거지!”
나의 아득한 어떤 콤플렉스의 발효임이 틀림없다.
내 머릿속엔 단테의 베아트리체를 비롯하여 괴테의 ‘그녀들…’, 실러의 ‘아름다운 영혼’, 심지어 플라톤의 에로스의 형상까지가 꿈결같이 피어나기 시작하는 터인데,
젊은 놈들은 연애 이야기가 나오자 턱주가리를 이상하게 비틀면서 웃는 것이다.
내 꿈결같이 아름다운 아이디어는 이놈들한테는 통하지 않음이 분명했다. 나는 매스꺼워졌다.
저렇게 웃는 놈들은 교양이니 뭐니보다도 마스터베이션을 더 즐기는 놈들임에 틀림없다.
이놈들에게 차라리 올빼미의 생리를 불어넣어 주자.
마침 점심시간 곧 뒤이라 속살머리 없이 수마(睡魔)에 끌려가는 몇 놈이 눈에 띄는 차다.
내 딴으로는 우선 성교육의 필요를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참 어처구니없는 성교육이 되고 만 것이다.
중학교 시절에 지금은 S대 학장이신 G선생이 ‘도를 지나치면 기억력이 준다,’ ‘신경쇠약에 걸린다.’식의 위생학을 들먹거리시던 일을 미지근하게 생각하면서 서서히 입을 열었다.
“에에, 그런 일인일기(一人一技)를 인류의 92%가 한다는 통계가 있다니까 부끄러울 게 없는 것인지. 모르거니와… ”
젊은 놈들이 거의가 홍당무가 되면서 낄낄거리고 금시에 코방아질을 할 것 같던 놈까지도 두 눈을 개구리같이 뜨고 쳐다보는 것이다.
“그런 충동은 쉬 물리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아는가?”
한 놈이 불쑥
“냉수마찰이 좋습니다.”
한다. 이놈은 상습임에 틀림없다.
“그건 유치하다. 이렇게 한단 말이야. 그런 충동이 신체상으로 구체화되어 갈 때…”
이내 또 폭소다. 그러나 이 올빼미의 위엄이 추호도 가시지 않음을 보자 곧 뒤를 기다리는 눈치다.
“그건 말하자면 내 자신의 의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야! 이 때 잠간 철학자가 될 수 없는 놈은 노예나 다름없다. 체! 내가 바야흐로 조물주의 희롱거리가 되려는군! 이렇게 잠시 관조하라는 말이지. 적어도 지성을 가진 자의 육신이라면 그만 창피해지고 무색해져서 서서히 bow하고 말 게 아닌가!”
교실이 떠나가게 폭소가 터지는 것을 보면 효과는 100%이다.
그러나 이것이 슬프게도 올빼미가 되어버린 나의 아이러니임을 어느 놈이 알아 줄 것인가!
자리에 와서 앉으니 왠지 한없이 우울해지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마치 무대에서 돌아온 피에로의 비애 그것이다.
이 올빼미의 비애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언젠가 한 놈이 놀러 와서 앨범을 펴놓고 놀았다.
마침 내 열두 살 때의 사진이 어디선지 튀어나왔다.
그놈이 그 퇴색한 사진을 한참 들고 보더니 “애가 사진도 참 영리하게 됐네요.” 하는 것이다.
아마 초등학교 6학년에 다니는 큰놈의 사진인 줄 아는 모양이다.
나는 그놈의 속없이 하는 말이 귀에 거슬렸다기보다 기가 막혀서 “이 놈아 그건 나야!” 했더니 “하하하 참 희한하게도 닮았네요!” 하는 것이었다.
닮았다는 말에 나는 금시에 또 올빼미가 되고 만 것이다.
“닮았다 희한하게도…” 이거 나도 멘델의 법칙을 벗어나지 못하는 생물이란 말이지!
그놈은 눈치를 채기는커녕 싱글거리면서 사진을 뒤적이고 있었지만 나는 무참하게도 창피해지고 말았다.
나를 닮은 놈이 제 애비나 제 의사에 따라서 생겨난 놈이 아님은 물론이요, 더구나 ‘황금빛 나는 생활의 나무’에서 맺어진 열매가 아님은 두말 할 것도 없다.
닮았다는 이야기가 나오니 또 생각나는 일이 있다.
언젠가 학생과에 호출된 한 놈이 제 부친을 모시고 나온 일이 있었다.
무심코 바라보자니 두 개의 얼굴이 어떻게 희한하게도 상사형(相似形)인지 터지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으면서 기막힌 조물주의 장난에 탄복하고 있는데,
이야기를 마치고 복도로 나가는 두 피조물(被造物)의 걸음걸이가 이것이 또 온전하게 완급(緩急)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었다.
“어쩌면 걸음걸이까지도…” 나는 그만 장탄식(長歎息)을 하고 말았다.
G. 멘델 씨도 이런 멜랑커리에 젖어본 일이 있었을까?
이때처럼 나를 포함한 이 지구 위의 온 동포에게 측은한 동정이 내 가슴속에서 솟아본 적은 없었다.
나는 이러다가 정말 무미하게도 그 도통이라는 걸 하게 되는 것인가?
이런 망상이 생길 지경이었다.
올빼미가 되어 가는 비애와 고독…. 교사란 이래서 또 이모저모로 슬프기만 한 직업인가 보다.
(1959. 크리스마스 저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