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란 / 임보
호란(胡亂) / 임보
간자웅(肝子熊)주에
이상한 침략자가 나타났다고
파발마가 급히 달려와 중앙에 보고를 했다
놈들은 검은 두건을 쓴 괴한들로
산의 바위틈에 구멍을 뚫고 기생을 하며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갉아먹고 사는데
놈들이 지나간 자리는 흑사병의 유적지처럼 폐허가 되고 만다
용맹스런 붉은 홍위병들이 달려가
목숨을 걸고 토벌을 벌였으나
침략자 흑군을 섬멸하기는 만만치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한 놈을 죽이면 어이된 일인지
그놈의 심장 속에서 수백 마리의 벌레들이 쏟아져 나와
그놈들이 다시 검은 병사들로 일어섰다
그러니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난처한 처지가 아닌가
중앙에서 특공지원군이 달려가
최신의 화학 무기로 초토화 작전을 시도했다
레이저 무기로 포격을 하고
화염방사기로 놈들의 기지를 온통 잿더미로 만들었다
검게 탄 진지는 거대한 무덤처럼 잠잠했다
그러나 그러한 섬멸 작전도 아무런 효력이 없었다
홍군들의 총구가 채 식기도 전에
흑군들은 검은 폐허의 무덤 속에서
다시 머리를 들고 돋아났다
그들은 마치 콩나물시루 속의 그 콩나물 대가리들처럼
더욱 무성하고 빽빽이 지상의 검은 표피를 뚫고 일어섰다
막강한 장비도 무용지물
홍군들은 점차 지쳐 쓰러지고
드디어 간자웅의 심장부도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간자웅은 거대한 대식국(大食國)의 내륙에 자리한
조그만 주에 불과하지만
전 국민의 주식으로 공급되는 막중한 식품 가공공장이 자리한
절대절명의 요충지
흑군의 침탈로 공장의 기능이 마비되어
전국의 식량 공급이 중단되자
유통질서의 혼란과 함께 곳곳에 소요가 발생하고
세상이 흉흉해졌다
황제가 대로하여 전국에 계엄을 선포하고
인내와 결속을 호소했지만
굶주린 백성들을 거둘 길이 없다
외국에서 화급히 구급식량을 끌어다 대지만
그것도 역부족
길가에는 무기도 제대로 가누지 못한 홍군들이
즐비하게 쓰러져 눕고
그들의 등을 밟고 흑군들은
일사천리 전국으로 진군해 나갔다
도대체 저 작은 흑두병(黑頭兵)들을 다스리는 자가 누구란 말인가
거대한 나라 대식국(大食國)의 황제는 드디어 넘어지면서
그보다 더 힘이 센 어떤 손이
그의 목을 짓누르고 있음을 비로소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