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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 상황의 해명 / 유공희

운수재 2007. 6. 24. 05:53

 

실존 상황의 해명  /   유공희

― 사르트르의 희곡 『Huis clos』에 대하여

 

사르트르 문학의 테마는 인간실존의 본질을 척결(剔抉)하는 데서 시작한다.

실존철학자 하이데거의 성실한 제자인 그로서는 당연한 귀결이다. 문학작품의 사상적 내용으로 인간의 실존 문제를 취급한 작가는 사르트르 이전에도 허다히 있었다.

사르트르의 유니크한 점은

첫째, 그가 이미 ‘신(神)’을 상실한 인간의 실존 상황을 누구보다도 방법적, 체계적으로 다루고 있는 데 있다.

그의 작품을 연대순으로 배열해 놓고 그의 사상의 발전을 더듬어 본다면 인간의 고독, 자유, 책임의 문제가 실로 엄연하고 명확하게 체계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 사르트르는 제2차 세계대전을 겪고 대전의 체험 속에서 인간 실존의 상황을 대전을 겪은 모든 현대인의 지성 앞에 실로 절실한 자기 자신의 문제로서 제시함으로써 현대인으로 하여금 실존의 심연(深淵) 앞에 다시 한 번 저립(佇立)하게 했다.

그리하여 기성 철학 속에서 이미 하등의 생활원리를 찾아낼 수 없게 된 현대인에게 그 실존의 심연에서 다시 출발할 것을 그는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 실존의 근본적 상황을 치근치근하게도 그려내 주는 것이다.

그는 하등의 목적의식도 없이 세상에 내던져진 인간―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살아가게 마련인 운명 앞에 내던져진 인간에게 자기의 시튜에이션(Situation)을 응시할 것을 요구한다.

사르트르의 초기 작품들이 가지고 있는 특징은 이 탈출의 길이 막연한 존재의 부조리성, 다시 말하면 ‘본질에 앞선 실존’의 절망을 때로는 ‘구토(嘔吐)’, 때로는 자조적(自嘲的)인 ‘경련적(痙攣的) 홍소(哄笑)’라는 실감적 표현으로 포착한 데 있다.

여기서 잠시 그의 스승인 하이데거에 의한 실존의 해석을 더듬어 보기로 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인간은 일상생활 가운데서 자기의 실존 앞에서는 눈을 가리고 살고 있다.

인간은 사물에 대한 관심과 주위의 타인에 대한 염려 속에서 살고 있다. 인간은 이 관심 염려(Sorge)에만 정신이 사로잡혀서 자기 실존의 본래의 자태를 바로 보려고 하지 않고 생활의 일상성 속에 유발(誘發)해 간다.

우리는 번화한 거리를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사치스럽게 꾸미고 걸음걸이를 만들어 가면서 오고가는 모던 여성들의 생태를 일별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본래의 자기에 대한 성실을 방기(放棄)한 비 본래적 허위의 생활이다.

인간의 존재라는 것은 한 마디로 말하면 유한(有限) 존재인 것이고, 단적으로 말하면 ‘죽음’을 언제나 앞에 두고 있는 존재인 것이다.

인간은 이 자기존재의 심연(深淵)에 잠겨 있는 허무를 응시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의 실존상황 앞에 눈을 가리고 일상생활의 염려(Sorge)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조르게’ 속에서 인간은 때로 자기의 실존상황에 막연하게나마 마음이 미칠 때가 있다.

그것이 곧 불안(Angst)이라는 것이다. 불안은 일정한 대상이 없다.

막연한 불안이 우리의 마음을 엄습할 때가 있다. 이 불안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그것은 인간의 존재가 본래 허무 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가 원하지도 선택하지도 않았는데 어디서부터인지 이 지상에 내던져졌으며 언젠가는 죽음에 의하여 끝나버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불안의 대상은 바로 허무인 것이며 허무를 가장 뚜렷하게 명시해 주는 것은 ‘죽음’이다.

그러면 ‘죽음’이란 어떠한 것이냐. 하이데거는 ‘죽음’이란 것은 거기서 실존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는 가능성 즉 불가능의 가능성이라고 말하고 ‘죽음’의 성격을 대략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첫째, 사람은 오직 혼자 죽어간다.

함께 죽어주는 사람이 없이, 사랑과도 관련이 없이 ‘혼자’ 죽어간다는 것이다.

둘째로 사람은 ‘죽음’을 넘어설 수가 없는 것이다.

 ‘죽음’이 언제나 내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셋째 ‘죽음’은 가장 확실한 사실이다.

사람은 무엇보다도 확실하게 ‘죽음’의 숙명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끝으로 그렇게 확실한 ‘죽음’은 언제 올지 모른다는 것이다. 나는 내일의 내 생명을 보증할 수 있는 근거가 없는 것이다.

인간의 실존은 이와 같이 ‘죽음’에의 존재, 종말(終末)에의 존재이며 그것이 불안의 이유인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 세상에 내던져져서 얼마 동안 존재하다가 죽어 없어져 버린다는 것―

이것이 인간 실존의 상황이며 사르트르는 특히 그의 초기 작품에서 이 같은 인간 실존의 상황과 고민을 실감 있게 그리면서 그 속에서 성실하게 구원의 길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사르트르가 1938년에 발표한 장편소설 『구토(嘔吐)』나 다음해에 발표한 「벽(壁)」등의 단편에서 상술한 바와 같은 인간 실존의 부조리성에 대한 절망을 그려내고 있는데,

『구토(嘔吐)』에서의 주인공 로갱댕이 불시(不時)로 느끼는 매스꺼움이나 「벽(壁)」에서의 주인공 ‘나’가 죽음을 앞에 둔 정신적 고정상황 속에서 벽을 앞에 두고 경련적으로 터뜨리는 웃음이나 모두 이 절망의 문학적 표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사르트르의 많은 작품 가운데서도 인간실존의 상황과 그 부조리성이 가장 훌륭하게 표현된 작품은 1944년에 발표된 희곡 「Huis clos(닫힌 문)」일 것이다.

 이 작품은 아직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지 않은 것 같고, 또 학생들이 사르트르를 이해하는데 가장 적당한 입문의 구실을 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작품에 대해서 간단한 해설을 붙여볼까 한다.

 

이 작품의 무대는 하류 호텔의 사롱이다. 등장인물은 그 호텔의 보이, 가르생이란 남자, 이네스 에스텔이라는 두 여성뿐이다.

호텔 보이는 제1경에만 잠간 나왔다 사라질 뿐, 연극은 오직 세 사람의 남녀에 의해서 전개된다.

무대가 호텔의 사롱이라 하지만 등장하는 인물들이 모두 죽은 사람(가르생은 징병기피자로 총살당한 사람이고, 이네스는 개스 중독으로, 에스텔은 폐렴으로)들이기 때문에 무대는 실로 지옥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사르트르의 착상으로는 그것이 바로 인간 세계인 것이고 등장인물들은 세상에 내던져진 인간들이며 모두 공통된 실존의 상황 아래 별수 없이 살아가야 할 숙명을 짊어진 인물들인 것이다.

이 세 사람의 인물이 그들의 애매한 실존의 운명을 짊어지고 별수 없이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될 이 사롱에는 세 가지의 극히 상징적인 조건이 있다.

첫째는 언제나 전등이 켜져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거울이 없다는 것이고, 셋째는 하나밖에 없는 문이 밖에서 잠겨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르트르의 인간 실존 상황의 구체적인 분석의 표현으로서,

첫째 인간은 싫어도 타인의 눈을 피할 수 없고 주위의 인간에 대한 조르게(Sorge,念慮)의 속박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과,

둘째로 자기의 모습을 자기가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이고, 셋째로 절대로 이 실존의 상황에서 탈출할 수가 없다는 인간 실존의 운명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상징적인 무대, 숙명의 지옥, 이 하류 호텔의 사롱은 이 세 사람의 남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며 싫더라도 세 사람은 이 음산한 방 안에서 살아가게 마련인 것이다. 가르생의 대사와 같이

“소파 위에 누우면 사르르 잠이 오지. 그런가 하면 눈을 비비고 또 일어나지 않으면 안 돼. 그래서 또 모든 것이 시작된다는 거지!”

이렇게 창피하게도 똑 같은 생활을 되풀이해야만 되고 혼자 있고 싶어도 혼자 있을 수도 없이 타인의 시선에 주의를 해야만 하는 인생은 확실히 지옥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인생은 어처구니없는 형장인 것이다. 희곡 가운데는 이와 같은 인간 실존의 부조리를 단적으로 폭로하는 상징적인 대사가 얼마든지 나타난다.

그것이 이 작품의 드라마투르기(dramaturgy)에 있어서 조금도 어색함이 없이 자연스럽게 극의 진행과 조화되어 있다는 것은 사르트르의 극작가로서의 재능을 말해주는 것은 물론이다.

예를 들면

 

에스텔 “무엇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같이 있게 된 거에요?”

가르생 “그건 우연이지요. 작자들은 도착순으로 어디에다가라도 내던져버리니까”

……………………………………………………

가르생 “나는 상황을 직시하고 싶단 말이야! 내가 그 정체를 알아내기 전에 불의의 습격을 받기 싫단 말이야!”

 

실존의 상황을 직시(直視)하고 그 정체를 알려고 하면 할수록 알 수 없고 애매한 것이 인간실존의 상황이다. 또

 

이네스 “우리들 하나하나가 나머지 두 사람에게는 도깨비지 뭐야!”

가르생 “각자가 타인과 함께 있다는 것을 잊어버립시다.”

이네스 “잊어버리자고요? 체! … 기가 막혀라. 난 당신이라는 것을 뼛속까지 느끼고 있는 거예요! 당신이 침묵하고 있는 것이 내 귓속에 쨍쨍 들려오는 거예요. 입에 자물 쇠를 잠그고 혓바닥을 자르고 있어도 당신은 역시 거기 있거든요. 당신은 내 얼굴 까지 훔쳐버렸어요! 당신은 내 얼굴을 알고 있는데 나는 내 얼굴을 모른단 말이에 요!”

에스텔 “언제까지나 체! 언제까지나 거울도 없이 어떻게 산담…”

 

자기의 정체를 알 길도 없이 싫어도 타인에 대한 관심의 속박을 벗어날 수 없는 인간 실존의 고민을 여실히 그려내는 대사들이다. 그래서 그 고민은 동시에 절망인 것이다.

 

가르생 “우리들은 혼자서는 도저히 구호되지는 못해! 세 사람이 같이 파멸하든가 같이 돌 파해 가든가…자 어느 쪽이냐 말이야 응?”

 

그러나 돌파해 나갈 방법은 무엇인가?

사르트르는 이 작품에서 그것을 명시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의 다음 희곡 「파리떼(Les Mouches)」 또 장편소설 『자유에의 길(Les Chemins de la Liberte)』등을 읽어야 할 것이다.

이네스보다 젊고 아름다운 에스텔은 가르생의 남성이 그리워서 그를 유혹한다.

그러나 이네스가 보고 있고 또 전등을 끌 수 없기 때문에 가르생은 에스텔을 껴안을 수가 없고 이네스는 자기 외의 두 사람의 포옹을 보고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가르생은 참다못하여 이 방에서 나가려고 도어를 두드린다.

그러나 도어는 열릴 리가 없는 것이다. 탈출은 허락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가르생이 악을 쓰면서 도어를 흔들고 두드리고 할 때 의외로 꼭 한번 도어가 밖으로 열리는 순간이 있다.

이것이 탈출의 기회가, 탈출의 방법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 것인지 혹은 자살(自殺)을 의미하는 것인지 그것은 확실치 않으나 아무튼 매우 의미 깊은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도어가 의외로 열리자 가르생은 주춤하면서 놀란다.

이네스가 나가버리라고 하자 가르생은 주저하다가 그대로 머문다.

에스텔도 나가려고 하지 않는다. 거기에서 이네스가 웃음을 터뜨리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네스 “그럼 누가 나간단 말이야? 세 사람 중의 누가? 길은 열려 있는데 왜 안 나가는 거 지? 아이 우스워라! 우리 세 사람은 떨어질 수 없는 사이란 말이군!”

 

세 사람은 아무도 이 숨 막히는 지옥에서 나가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서로 미워하고 서로의 자유를 침해하면서도 결국 이 지옥에 머물러 있을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우리가 내던져진 이 세상! 그것은 우리에게 유일한 것이며, 거기서 우리는 우리의 행위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행위하지도 않고 이 세상에서 존재해 있을 수는 또 없는 것이다.

가르생은 에스텔을 안으려고 하면서 이네스의 존재를 깨닫고 그녀를 향하여 부르짖는다.

“너는 언제까지나 보고 있는 거냐?”

그는 에스텔의 어깨에서 손을 떼면서 절망적으로 중얼거린다.

“지옥(地獄)이란 타인(他人)이란 것이다…”

이네스는 가르생과 에스텔을 향해서 경련적으로 웃음을 터뜨리면서 말을 던진다.

“우리들은 함께 있는 거예요 언제까지라도!”

그러자 에스텔도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역시 경련적인 웃음을 터뜨리면서 독백한다.

“언제까지라도 아이 기가 막혀라! 언제까지라도…”

인간 실존의 운명을 깨닫자, 그것은 지울 수 없는 부조리임을 알게 된다.

실존의 부조리는 이를 의식한 인간에게 기가 막힌 일이며 구토이며 또 경련적인 웃음일 수밖에 없다.

가르생도 두 여자를 보고 자조적(自嘲的)인 홍소(哄笑)를 터뜨리면서 “체! 언제까지라도?” 하고 뇌까리자 한참 동안 극히 상징적인 침묵이 흐른다.

세 사람은 처음 보듯이 서로 번갈아 쳐다본다.

그러자 가르생이 갑자기 벌떡 일어서면서 다음과 같이 부르짖고 나면 막이 내리면서 이 연극은 끝나는 것이다.

“자! 계속하자!”

 

이 연극의 마지막 장면에는 실존의 상황에 대한 인간의 자각과 절망이 가장 절실하게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더구나 가르생의 마지막 대사는 이 연극이 다시 말하면 인생이 실존의 부조리성을 내포한 채 언제까지나 계속한다는 절망을 극히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하겠다.

이 작품이 처음 상연된 것은 1944년 5월이니까 파리가 나치스의 정령으로부터 해방되기 전 4개월, 곧 엄중한 나치스의 검렬 아래 상연된 것이다.

따라서 나치스 점령하의 숨 막히는 답답한 분위기, 출구(出口)가 없는 프랑스의 당시의 상태를 이 희곡의 배후에 상상해 보는 것도 부질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끊임없이 타인과의 대결 속에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될 인간적 실존의 고민과 절망을 그리려고 한 것은 물론이다.

바라지도 않는 세계 가운데 내던져지고 선택하지도 않은 상황 속에 합목적성이 없는 실존을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될 인간― 그래서 불가피한 ‘타인’에 대한 끊임없는 ‘조르게(Sorge)'의 구속 속에 포즈를 취해 가면서 또 상호간의 자유를 침해하려고 몸부림치게 마련인 인간관계를 사르트르는 이 작품 속에서 천재적인 극작가의 수법으로 형상화했다.

사르트르는 이후 오늘까지 이 같은 절망적인 인간 실존의 상황 속에서 인간의 진실한 자유의 길을 줄기차게 모색하고 있는데 그가 어떻게 해서 인류의 자유를 위한 힘찬 실천의 원리를 보여줄 것인가.

또 이 절망적인 실존상황에서 인간의 윤리를 지향하려고 할 때 우리가 부딪치게 되는 어쩔 수 없는 단층(斷層)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등의 문제는 그의 다른 작품들 또는 앞으로 쓰여질 작품에서 살펴보기로 하고,

사르트르의 하나의 출발점을 더듬어봄으로써 학생들이 사르트르 문학을 이해하고 감상하는데 다소라도 플러스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