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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에 관한 단상 / 유공희

운수재 2007. 6. 29. 06:41

 

교양에 관한 단상(斷想)   /   유공희

― 청년에게 필요한 것들

 

독서 및 예술 감상을 통한 10대 청소년들의 교양 향상의 방법에 대하여―라는 것이 청탁 받은 주제이었으나,

이 문제로 고민하는 학생들이 많은 줄은 알고 있지만, 그러한 고민을 곧 씻어줄 수 있는 비방(秘方)이 내 머릿속에서 선뜻 나올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보다는 그 교양이라는 문제에 대하여 피차 좀 생각해 보자고 내 머릿속에 오고가는 토막생각을 두서없이 적어보자는 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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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이란 말을 생각할 때 얼핏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휴머니즘(Humanism)이란 말입니다.

교양이라는 것을 나는 이상적인 인간성의 형성이라는 뜻으로 얼른 생각하는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인간적인 인간성이라기보다는 인간다운 인간성이라는 뜻으로 휴머니티(Humanity)라는 말을 해석하는 것이고,

그러한 인간다운 인간이 되는 것이 교양의 목적이라 보는 것입니다.

인간의, 인간으로서의 자연성도 인간성이 아닐 수 없고, 또 인간의 인간다운 이상적인 소양도 인간성이 아닐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이란 참 알 수 없는 스핑크스 같은 존재이지만,

교양이라고 할 때, 우리는 자연성을 무엇인가의 가치성으로 형성한다는 생각을 그 속에서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교양이란 말의 고전적 의의는 우선 인간의 인간으로서의 자연성을 인간다운 가치성으로 순화시키는 데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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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철학 사상에서 교양의 개념과 가장 밀접한 위치에 있는 사상은 이른바 네오·휴머니즘이라고 일컫는 18,9세기의 독일에서 일어난 사상일 것입니다.

빈켈만(Winkelmann). 헤르더(Herder), 괴테(Goethe), 실러(Schiller), 훔볼트(Humbolt) 등이 그 대표적인 사상가들인데, 그들의 머릿속에는 한결같이 아름다운 인간성의 조화(調和)라는 꿈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들 중에서도 괴테와 실러는 ‘개성을 될 수 있는 데까지 고귀하게 높여서 순수한 인간성을 형성하는 것’을 교양의 이상으로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이 형성된 순수한 인간성이라는 것은 곧 이상적인 인격을 의미하는 것이고, 괴테는 그러한 인격이 이 지상의 최고의 행복이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이성과 감성을 엄격하게 대립시키고, 이성으로써 감성을 억제하는 엄숙한 학설을 내세운 칸트 식의 철학에 대하여 이성과 감성의 조화와 융합 속에서 아름다운 인간성,

곧 참다운 교양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괴테의 자서적인 소설 『빌헬름 마이스터(Wilhelm Meister)』가운데에 ‘아름다운 영혼의 고백’이라는 한 장(章)이 있는데,

이 ‘아름다운 영혼’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풍부한 감성과 정열이 영롱한 이성과 아름답게 조화된 이상적인 인간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러한 이상은 그 당시의 독일 문학의 사상적 배경을 이루고 있었고, 특히 괴테의 여러 작품 속에서 그와 같은 ‘아름다운 영혼’의 구체적 또는 소개적 형상으로서의 허다한 여성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여성의 모델이 된 것은 모두 괴테에게 영향을 끼친 그의 애인들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괴테의 작품 속에 중요한 핵심적 요소가 되는 것은 여성입니다.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들을 인도한다’라는 『파우스트』의 결구(結句)는 너무도 유명하지만,

괴테의 이른바 ‘전인(全人)’으로서의 인간 형성은 아마 그의 열세 명이나 되었다는 애인들로부터 받아들인 ‘여성적인 것’에 입은 바가 크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지 않은 학생은 아마 거의 없을 줄 압니다만, 여주인공 롯데에서도 여러분은 ‘괴테적인 여성(?)’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괴테의 문학은 모두 그의 체험의 기념비(記念碑)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그의 작품은 모두 그의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의 작품의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것은 결과적으로는 그의 인간을 위대하게 형성시킨 온갖 감동적인 체험인 것입니다.

『베르테르의 슬픔』을 단순한 짝사랑의 이야기로만 받아들이는 학생이 있다면 딱한 일입니다.

그것은 젊은 괴테의 천재적인 자연 감정과 생활 감정, 그리고 감동적인 체험의 표현이고,

독자는 거기에서 베르테르 아닌 젊은 괴테 자신의 몸부림치는 아름다운 청춘을 보아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소설을 읽고 여러분은 시험 준비에 골몰하다가도, 하다못해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는 창밖으로 뛰어나가고 싶은 충동―실은 이것이 값진 것입니다―이라도 느껴야 할 것입니다.

 

식물이 공기 속에서, 햇볕 속에서, 또 땅 속에서 모든 영양소를 빨아올려서 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듯이 여러분의 젊은 생애의 의욕과 충동은 모두 여러분의 교양을 위한 훌륭한 소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괴테를 흔히 ‘탈피(脫皮)의 천재’니 ‘전신(轉身)의 천재’니 하는 것은 그가 마치 식물처럼 빨아올리고 받아들이고 하면서 한시도 쉬지 않고 자기의 인간을 형성해 갔기 때문입니다.

그의 모든 체험은 말하자면 이 왕성한 식물을 자라게 하는 영양소이었고, 그의 모든 작품은 이 나무에 열린 아름다운 꽃이요 과실이었던 것입니다.

거기에는 높은 이념의 줄기찬 의지와 벅찬 수용(受容)과, 그리고 아름다운 형상화가 있었던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그의 소설 『빌헬름 마이스터』가 일찍이 학생들이 꼭 읽어야 할 교양서였다는 까닭을 여러분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Alain)이 스무 번이나 읽고, 읽을 때마다 새로운 감동을 받았다는 이 소설에는 주인공 마이스터가 독서를 한다는 장면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마이스터라는 청년이 자기의 인간을 형성해 가는 과정이 그려져 있는 이 소설에서 말입니다.

그는 여행을 하고 연애를 하고 상업을 하고 연극을 하고 그러면서 그는 감동하고 고민하고 슬퍼하고 절망하고 하는 것입니다.

독서라는 것이 교양을 얻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의아스럽게 들릴는지 모르겠으나,

그것은 모든 것이 분업화된 현대에서 우리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기현상에 젖어 있는 때문이지, 독서가 결코 교양 향상의 유일한 수단은 아닌 것입니다.

교양이라면 우선 소위 교양서적을 많이 읽고, 명곡 다방의 컴컴한 구석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걸프렌드와 문학담을 나눌 수 있고 해야 한다는 오늘날의 병든 상식으로 본면,

이상적인 인간 형성의 과정이란 짝없이 거칠고 괴롭고 벅찬 도정일 지도 모릅니다.

 

빌헬름식의 인간, 다시 말하면 괴테적인 인간이 즐겨 마시는 영양소가 우리 범인들에게는 하나의 위험한 독이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주변에는 흔히 청년시대에 허다한 로맨스와 놀랄 만한 감동적 체험을 겪은, 왕성한 생명력을 가졌던 사람이, 끈덕지게 서재만 지켜온 초라한 박사님에다 비하면 타다 남은 부지깽이처럼 측은하게 오그라든 늙은이들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불꽃은 인간을 전인(全人)으로 승화시키는 힘이 있는가 하면, 또 인간을 막대기로 만들어 버리는 마력을 가졌는지도 모릅니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고 황금빛 나는 생활의 나무는 항상 푸르다’는 것은 실은 메피스토펠레스의 거만한 궤변이 아니라, 젊은 괴테의 실감나는 독백인데,

항상 푸른 생활의 나무는 끝끝내 막대기 아닌 백골로 변해버릴 인간의 애달픈 꿈인지도 모릅니다.

괴테는 확실히 행운의 시인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자기의 말년의 비서 엑케르만에게 자기는 실은 지옥에 떨어진 시지포스 같은 고난을 겪어 왔다고 하면서, 노력의 미덕을 피력하였다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오늘날은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무불통지의 학자도 생길 수 없고 다빈치 같은 만능에 가까운 천재도 나올 수 없는 시대입니다.

그만치 할 일은 많아지고 사람은 무력한 존재라는 느낌을 주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괴테 같은 이른바 ‘토탈맨(Total man)'이라는 아이디어는 교양을 얻고자 몸부림치는 우리 학생들에게는 그리스의 신들만큼이나 거리가 먼 인간상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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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이란 말을 생각하다가 내 머릿속에 웬일인지 괴테가 떠올라서 두서도 없이 너무나 이상적인 이야기만 해 왔습니다.

내가 학생시대에 괴테를 좋아하였던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나의 주변에서 보고 느끼고 한 것들을 좀 적어 보겠습니다.

교양이란 것이 인생이나 현실에 대한 달관(達觀)을 가질 수 있는 넓고 높은 식견을 의미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상생활적인 일에 지나치게 구애를 받지 않을 수 있는 자유스러운 지성이나 지혜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물에 대하여 많이 알고 있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도 중요한 것은 사물의 옳고 그름을 자유롭게 판단할 수 있고, 옳은 일을 위하여 자신 있게 행동할 수 있는 밝은 지혜인 것입니다.

교양이란 어디까지나 지식보다도 인간성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박식한 학자들이 권력에 아부하다가 일신을 욕되게 한 예는 예나 지금이나 허다합니다.

그러므로 진실한 교양이란 인격이요, 그것은 고고(孤高)한 관조의 생활에서보다도 오히려 가치에 대한 정열과 의지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요,

그것은 소위 인텔리 풍의 현학적(衒學的)인 변설에서보다는 도리어 침착 과묵한 실천과 사회참여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교양이라면 요즘 흔히 현실도피적인 유한(有閑)의 취미로 여기려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나, 소위 유한의 취미라는 것은 타락한 데카당스의 풍속 밖의 아무것도 아닙니다.

타락하지 않은 유한인이라는 것은 생각하기 곤란한 인간상입니다.

예술이나 문학의 딜레탕트는 있을 수 있어도, 인생의 딜레탕트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있다면 그는 이 지구라는 별에 잘못 떨어진 사람이겠습니다.

 ‘논다는 것은 일한다는 것보다 힘든다. 그러니 사람들은 권태하지 않으려면 일을 하라’는 경귀로, 돈만 아는 부르주아들을 비꼰 보들레르 자신, 한시도 편히 놀 수 없었던 슬픈 댄디였습니다.

진실로 편히 놀 수 있는 것은 배부른 천치가 아니면, 천사밖에 없을 것입니다.

또 괴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만 ‘노력하고 있는 한 인간은 미혹하는 것’이고 미혹과 절망 속에서도 목마르게 광명을 희구하는 것이 인간인 것입니다.

그리고 희구하고 노력한 인간에게서만 교양의 표징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시험 감독을 하려고 들어갈 때마다 느끼는 생각을 하나 이야기할까 합니다.

여러분은 점수에 대하여 애착이 많습니다.

점수 몇 점을 더 따려고 개중에는 참 이상한 곡예를 하는 사람도 더러 있습니다.

필요한 것과 근본적인 것을 분간하지 못하는 학생들입니다.

그러나 열심히 자기의 ‘실력’하고만 씨름을 하는 학생들까지도 내 눈에는 측은하게 여겨지는 것은 웬 일일까요.

시험이란 것이 여러분의 공부를 재는 수단이라, 가르친 사람들이 효과를 재는 좋은 방법인지는 알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학생들은 이 시험이라는 역사(役事)에 조금도 싫증이 안 나는 모양입니다.

여러분 앞에는 우선 ‘서울대학교 입학고시’라는 큰 관문이 놓여 있기 때문에 마치 일종의 장애물경기의 선수처럼 수월하게 시험을 치러내는 솜씨가 생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시험이라는 역사에 거의 면역이 되어서 감성이 완전히 마비가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문제는 ‘서울대학교 입학’으로써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학사고시, 고등고시, 또 무슨 고시, 무슨 고시… 이렇게 허다한 관문이 여러분 앞에 가로 놓여 있고,

그래서 여러분은 그러한 온갖 관문의 저편에 꿈같이 어른거리는 ‘출세’라는 '골(goal)‘이라기보다도 하나의 출구(出口)가 은현(隱現)하는 것을 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멀쩡한 젊은 학생의 거개가 그들의 수학 과정을 '출세’라는 골에 도달하는 장애물경기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늘 이 장애물 선수들에게 측은하도록 일종의 분명한 영양의 실조를 느끼는 것입니다. 이 딱한 증상(症狀)이 어떻게 되어 가는 것일까요.

크레틴(Cretin) 병이란 것이 있다 합니다. 머리는 보기 흉하게 왜소하고 몸뚱이만 비대해지는 갑상선(甲狀腺) 이상에서 오는 백치병이라 합니다.

점수 따기로만 기록을 낸 선수가 누구보다도 기술적으로 ‘경기’에서 해방되어 ‘출세’를 하게 되면 그의(그 동안에 도무지 거들떠볼 겨를도 없었던) 사상과 교양의 결핍은, 그의 ‘출세’와 더불어 비대해지는 본능에 작용하여, 점차로 일종 크레틴의 증상을 보이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이것은 일개의 무명 교사의 터무니없는 기우(杞憂)가 아닙니다.

이른바 ‘출세’라는 것을 해버린 덕택으로 독서는 청승맞은 수면제로나 이용되고 날이 갈수록 사상이 고갈되어 가는 반면에 애매하게 체중만 늘어가는 왕년의 명선수들을 나는 허다하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거의가 일찍이 ‘수재’라는 빛나는 칭호를 받던 사람들이고 그 칭호를 훈장처럼 뽐내기도 하던 분들입니다.

 

순진한 나의 학생들을 앞에 두고 나의 억측이 너무 지나쳤나 봅니다.

여러분한테서 그러한 억측을 갖게 된다는 것은 결코 여러분의 탓은 아닙니다.

언젠가 어떤 학생이 “선생님 말씀을 들으면 머릿속이 혼란해져서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몰라집니다”라고 말을 걸어왔습니다.

그 학생이 나의 무슨 이야기를 듣고 한 이야기인지는 확실히 기억하지 않습니다만, 나는 나대로 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래, 하다못해 그대들의 머릿속을 휘휘 내저어 주리라. 싱겁게 벌써 머리가 굳어져서야 되겠나. 그래서 그대들의 머릿속에 식어 빠진 타산이나 유행가보다도 땀나는 젊음의 몸부림이 있게 하리라”

여러분에게는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가 많을 줄 압니다.

대학의 무슨 학과를 선택하느냐, 어떻게 하면 미국 유학을 할 수 있느냐, 어떻게 하면 훌륭한 교양을 쌓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보다도 더 중요한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인류의 지성이 오늘날까지 땀을 흘려가면서 생각해 온 문제가 있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와 사회를 옳게 인식하려고 할 때에 또 여러분의 영혼에 덤벼드는 허다한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세계는 여러분이 가슴에 품는 문제에 따라서 모양을 달리할 것입니다.

소경이 코끼리를 더듬는 이야기는 공연한 만담이 아닙니다.

서로 사색하는 친구끼리 교정의 서늘한 나무 그늘에서 진지하고도 다정하게 한나절을 담화로 보낼 수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교양의 표징입니다.

인류가 살고 생각해 온 자취를 흥미있게 더듬어 보고 고요하게 흐르는 강가에서 혼자서도 외롭지 않게 몇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교양의 표징입니다.

존경하는 스승이 일러준 위대한 문학 작품을 읽고 나서 며칠을 감동 속에 지나다가 같은 작가의 다른 작품을 읽고 싶어진다면 그것도 여러분의 교양의 표징일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영혼이 감동과 고민과 몸부림 속에서 자라가게 되면 단풍든 가랑잎 하나라도 여러분의 눈과 귀에 속삭일 말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하물며 아름다운 인간의 마음과 마음끼리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렇게 해서 독서니 예술 감상이니 하는 것은 여러분에게는 한가한 유한인의 취미의 대상 같은 것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전문은 시험공부고 취미는 독서’라는 식의 말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삶의 감동과 삶의 문제 속에서 항상 약동하는 동안 생활이 그대로 학습이고, 학습이 그대로 생활로 변할 것입니다.

 어찌 부질없는 허영과 망동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값싼 출세주의가 얼마나 구역질나는 인간으로서의 자기모독인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생활을 진실로 즐길 수 있는 조건은 소위 ‘출세’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불꽃 속에 뛰어들어 타 죽는 부나비를 보고 가치의 세계에서 영생을 찾는 지고(至高)한 삶의 아이디어를 읊은 괴테의 시가 있습니다.

그러한 순교적인 심볼로서가 아니라도, 쉴 새 없이 아름다운 불꽃을 낳으며 고요히 제 육체를 태우는 촛불을 보고 즐겁겠다고 느껴 보십시오.

언제고 참되고 아름다운 것을 찾고 차지하고 하는 생활을 상상해 보십시오.

단풍든 교정을 거닐며 나무들과 가을꽃들의 얼굴에서 속삭임을 들어 보십시오.

“예술가가 독특한 인간인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독특한 예술가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영국의 살아있는 시인 H. 리드의 말입니다.

독특한 예술가로서 자기의 생활을 즐길 수 있는 지혜― 그것은 또한 교양이요 인격인 것입니다.

 (1962. 10.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