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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부지 인생론 / 유공희

운수재 2007. 7. 6. 05:38

 

철부지의 인생론  /    유공희

 

학생들과 함께 근교(近郊)의 사찰로 소풍을 갔다.

문득 활짝 열어 제친 대웅전 앞에 모여 서서 절의 창건 연대, 거기 모셔 놓은 부처님 등에 대하여 유창하게 설명하는 스님의 말소리를 모두 경건한 자세로 경청하고 있는데,

학생들 틈에 끼어서 우람한 불상을 바라다보고 있던 내 머릿속에 문득 ‘부처님의 상호(相好)란 꼭 천치(天癡) 같구나!’하는 불손한 생각이 떠올랐다.

생각 자체가 부처님께 대한 용서 못할 모독임이 틀림없기 때문에 순간 황공해져서 곧 고개를 돌리고 말았지만,

서울로 돌아오는 도중 나는 그 당돌한 발상의 근거를 탐구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탐구 결과 결론은 대강 이러했다.

부처님의 상호와 천치의 얼굴에는 분명히 어떠한 공통성이 있다.

그것은 사고(思考)의 빛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부처님은 이미 해탈을 하신 분이니까 사고의 빛이 얼굴에 남아있을 리가 없고, 천치의 얼굴은 애초부터 사고의 빛이 떠오를 수 없게 되어 있으니, 두 얼굴은 닮을 수밖에 없지 않는가!

부처님도 아니요, 천치도 아닌 ‘중간자’인 인간은 도저히 그렇게 태평한 얼굴을 하고 살 수는 없다.

내 머릿속에는 대조적으로 저 유명한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 보면 꼭 ‘똥 누는 사람’ 같기도 한 그 조상(彫像)에다 로댕은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아담의 후예의 처참한 숙명을 표현하려 한 것임에 틀림없다.

아무리 별에서 별로 왕래하면서 사는 세상이 온대도 인간에게는 저 처량하리만치 심각한 얼굴을 벗어날 길은 영원히 없는 것이 아닐까?

공자의 정신적 이력사라고 할 만한 구절이 『논어』에 보인다.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慾不踰矩’

공자는 칠십에 도통했다는 이야기 같은데 이 구절이 가끔 나를 슬프게 만든다.

‘불혹(不惑)’이니 ‘이순(耳順)’이니 하는 말들이 내 인격의 현실로서는 도무지 아득한 개념들이기 때문이다.

위대한 합리주의자의 정신적 편력(遍歷)의 일단이라고 보면 그뿐인지 모르나 내게는 티끌만한 인간미조차 느껴지지 않는 문자들이다.

내게 보다 인간적인 공감이 가는 것은 차라리 저 사도(使徒) 바울의 절규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이를 행하지 아니하고 내가 원하지 않는 바 악은 이를 행하도다. 나를 구해 줄 이는 누구뇨!”

이때 바울의 나이 몇이었는가 알 바 없으나 나이가 문제랴?

진실하게 살려는 사람일수록 그러한 정신의 몸부림은 더 심각한 것이 아닌가 싶다.

정신생활이 턱없이 비어있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한신들 부처님 같은 얼굴을 닮을 수 있겠는가.

 

내 구우(舊友) S씨는 아호를 삼소(三笑)라 했다.

내가 세상을 웃고, 세상이 나를 웃고, 내가 또한 나 자신을 웃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삼소 씨는 혼자 있게 되면 누구보다도 깊이 자기와 인생을 우는 심정을 가진 친구였다.

프랑스의 어느 호사자(好事者)가 편저(編著)한 『인간 최후의 말』이란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고금동서의 유명한 인간들이 죽는 순간에 남긴 말들을 모은 책이다.

공자 같은 도통한 성인들의 말만 늘어놓았다면 따분한 책이 되고 말았을 것을 프랑스 사람답게 유명한 범죄자의 유언까지 모아 놓았으니 인간미 물씬 넘치는 책이었다.

읽어 가면서 나는 위대한 철학자도 죽음에 임해서는 약간 인간의 본색을 드러내고 만다는 사실을 알았다.

대개는 몸을 섞었거나 피를 나눈 아내나 아들딸을, 때로는 하나님을 부르면서 이 세상을 떠나가는 것이었다.

그 중에는 죽는 순간에도 수사(修辭)를 하는 허영가도 없지 않다.

파스칼의 말처럼 ‘명예심은 허망한 것이라고 열심히 외친 자도 말 잘한다는 칭찬을 받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숨김없는 모습이라면,

유언을 수사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일말의 동정심이 우러나는 것이 인정이 아닐까?

가장 재미있었던 것으로 생각나는 것은 프랑스의 소설가 발작의 유언이다.

그는 “비앙숑, 비앙숑을 불러 주어. 그 사람 같으면 내 병을 고쳐 줄 수 있을 거야!” 했다는데, ‘비앙숑’은 실재 인물이 아니라 자기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의사의 이름이었다니 그는 죽는 순간까지 소설가였다고나 할까.

아직 그럴 처지는 아니지만 나도 유언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가 더러 있다.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을 하직하는 마당에 어찌 말 한 마디 없을손가!

그러나 적당히 좋은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나도 수사(修辭)에 구애하는 탓인지 쑥스럽고 우스운 말들만이 아물거린다.

언젠가는 “죽는 순간에 말은 무슨 말! 차라리 한번 웃고 눈감는 것이 멋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드는데, 죽는 순간에 ‘멋’은 또 무슨 놈의 ‘멋’인고?

그 웃음이 어떤 것이 될 것인지. 보기에도 흉하게 이글어진 억지웃음이 되어 버린다면 멋은커녕 그야말로 돌이킬 수 없는 큰 실수가 아니고 무엇이랴!

나는 잠시 여러 가지 웃음에 대하여 연구해 본다. 문득 관음보살 같은 웃음이 최고라고 깨닫는다.

그러나 그런 그윽한 웃음을 웃을 수 있는 자신이 현재의 나로서는 추호도 없음은 물론이다.

애당초 ‘도통’이라는 것과는 인연이 없는 나에게 그런 차원 높은 웃음이 그 기막힌 순간에 내 얼굴과 어울릴 턱이 없는 것이다.

도대체 ‘웃는 데드마스크(death mask)'라는 것이 있을 수 있는가?

나의 언행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로부터 나는 ‘철’이 안 든 인간이란 말을 더러 듣는다.

‘웃는 데드마스크’를 꿈꾸는 것도 철부지나 하는 짓일지 모른다.

 ‘철이 든다’는 것이 무엇이 어떻게 되는 상태를 뜻하는 것인지도 분명하게 알 수 없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철든 어른들의 말보다 철없는 어린애의 잠꼬대에 관심이 쏠릴 때가 많다.

한 녀석이 ‘도통’이라는 것이 정말 있는거냐고 진지한 얼굴로 묻기에 짐짓

“암, 있고말고! 내가 도통을 두어 번 해보았지!”했더니

“정말이셔요? 그래 어떠셨어요?”

“다시는 도통 같은 것 안 하기로 결심했지!”

“네! 어째서요?”

“도통을 해 보았더니 술을 마셔도 맹물 같고, 예쁜 여자를 보아도 하품만 나오고… 심심해서 견딜 수가 없더라. 그러니 그런 것을 누가 또 해 보고 싶어지겠니!”

한숨짓는 나를 쳐다보고 있는 녀석의 표정은 ‘감히 더불어 말할 스승이 못 되는구나!’하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