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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와 심장 / 유공희

운수재 2007. 7. 18. 07:09

 

시계와 심장   /    유공희

―어느 밤의 기억

 

잠을 자고 싶은 대로 잘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 중의 하나일 것이다.

세상에는 밤잠도 못 자고 생업(生業)에 쫓기는 사람이 많을 터이기 때문이다.

잠만 오면 어디서나 잘 수 있는 사람도 복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정해진 내 자리에서 완전히 조명을 끄고 주위가 조용해진 다음이 아니면 잠을 잘 수가 없는 못된 생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휴식 시간에 의자에 앉은 채 팔에다 턱을 괴기가 무섭게 코를 골아대는 친구를 더러 보는데, 참 부러운 생태가 아닐 수 없다.

원래 시신경(視神經)이 약해선지, 내가 잠을 제대로 자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어둠의 장막이 나와 세상을 격리(隔離)해 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광명한 천지 속에서 탈없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감사히 여기면서 잠자리에 몸을 눕혔을 때 나를 포근히 감싸주는 어둠처럼 서늘하고 신비로운 것이 없는 것이다.

잠의 심연에 잠기기 전에 내 영혼은 이를테면 그윽한 잠의 전주곡 속에서 일종의 정화(淨化)를 맛보는 것이다.

가슴에 두 손을 얹고 누워서 그 서늘한 전주곡에 끌려 나는 서서히 이 세상을 잠시 떠나는 무아경(無我境)에 빠져 가는 것이다.

이렇게 되자니 이튿날의 삶이 남들보다 늦게 시작되는 것은 자연한 일이 되어버렸고 늦잠 버릇은 나의 어쩔 수 없는 생리로 변하고 만 것이다.

휴일 아침의 등산, 테니스, 낚시 등 건강에 좋다는 온갖 취미가 아예 나를 넘어다 볼 수 없게 되었어도 아직 건강에 별 고장을 느끼지 않는 이유는 그 동안 자신의 생리에 그만큼 충실하였던 덕이 아닌가 한다.

그러므로 내 생활 속에 늦잠을 못 자게 되는 날이 끼어 있다는 사실같이 우울한 일이 없는 것이다.

그런 우울한 날을 싫어도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어느 날 밤. 나는 아이들이 쓰는 자명종(自鳴鐘)을 머리맡에 조작(操作)해 놓고 여느 밤과 다름없이 자리에 누웠다.

그런데 이 요망스러운 기계는 이튿날 나를 일찍 깨워 주기는커녕 그날 밤 잠자는 행복마저도 무자비하게 박탈해 버리고 말았다.

내가 평화로운 잠의 전주곡에 은밀히 취해 들려는 순간 머리맡에서 시각을 헤아리는 그 불길한 기계소리가 처음에는 재깍재깍하는 것 같더니 이윽고 싹독싹독으로 변해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 후부터 줄곧 ‘싹독싹독’하면서 내 주위에 감미롭게 우거져 가는 잠의 전주곡을 여지없이 교란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날 밤 내가 잠을 못 잔 것은 그 단순한 ‘싹독’ 때문만이 아니었다.

귀에 쉴 새 없이 ‘싹독’이 파고드는데 가슴에 놓인 오른손에 전해 오는 심장의 고동이 웬일인지 내 귀에 ‘독근독근’으로 번역되기 때문이었다.

쉴 새 없이 생명을 갉아먹는 이 비정(非情)의 ‘싹독싹독’ 앞에 이 ‘독근독근’은 참으로 미덥지 못한, 위태롭기 그지없는 내 생명의 소리였기 때문이다.

이 무자비한 ‘싹독싹독’은 영원히 그칠 리가 없고, 내 가슴속의 ‘독근독근’은 언젠가는 그치고 만다.

세상에 태어난 지 반 세기 동안 잘도 멎지 않고 독근거려 왔다는 것이 오히려 희한한 기적 같기만 하다. 내 눈앞의 시원스러운 어둠의 장막은 어느덧 온갖 상념(想念)의 파노라마로, 내게 잠의 행복을 거부하는 불길한 만화경(萬華鏡)으로 변해 버리고 만 것이다.

 

심산유곡(深山幽谷)에 오막살이가 하나 있다. 거기에 밤이 온다.

한밤의 산골에 가냘픈 등불이 하나 켜져 있다. 등불은 어둠에 항거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사람들은 소낙비처럼 밀려드는 어둠이 싫어 한낱, 등불에 매달려 제 삶을 증거(證據)하려고 몸부림친다.

천지에 가득 찬 어둠은 모든 생명의 형자(形姿)를 싹독싹독 씹어 삼키는데 사람이 켜 놓은 등불은 독근독근 위태롭게 허덕거리고 있는 것이다.

몇 해 전, 사월 초파일 밤, 북악스카이웨이 팔각정(八角亭)에서 내려다본 서울의 밤거리가 떠오른다.

깜깜한 암흑의 천지 속의, 서울이라는 등불의 도가니―

그것은 내 앞에 펼쳐진 엄청난 슬픔의 호수(湖水). 절망의 오아시스.

망망대해(茫茫大海)에 기우뚱거리면서 저어가는 한 척의 범선(帆船).

스크린 가득히 펼쳐진 막막한 아프리카의 사막 위에 움직이고 있는 깨알만한 한 개의 점.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퍼스트 신. 하늘의 저주(詛呪)처럼 쏟아지는 폭우(暴雨) 속을 곤두박질하며 달려가는 어린 소년의 모습.

파도소리만 가득 찬 끝없는 어느 동해 바닷가에서 파도와 구름과 소금이 될 수 없는 나의 고독.

‘이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내 영혼을 전율케 한다’고 파스칼이 속삭인다.

무한히 번식하는 무기질(無機質) 속에서 몸부림치는 한 개의 몰랑한 유기체(有機體)… 싹둑거리는 비정의 비수 앞에 독근거리고 있는 ‘나’라는 실존(實存)… 주먹만한 나의 심장.

 

나는 더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벌떡 일어나서 불을 켰다.

나는 무엇인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모차르트의 심포니를 틀었다.

이윽고 기막히게 아름다운 선율이 방 안에 범람한다. ‘싹독싹독’이 여지없이 말살되어 버린다.

무서운 연옥(煉獄)에서 벗어나 천국에 발을 들여 놓은 느낌이다.

모차르트는 참 시원스럽게도 ‘시간’을 죽여 놓았다. 멋들어진 ‘시간’의 장송(葬送)! 어둠의 카오스가 등불 따위로 정복될 수 있을까마는, 모차르트는 참 신묘하게도 ‘시간’의 카오스를 쾌적한 코스모스로 요리해 간다.

전축에서는 쉴 새 없이 ‘시간’이 천사가 되어 춤추며 쏟아져 나온다.

희한하게 유기질을 씹어 먹는 유기체의 승리! 나는 문득 음악이야말로 인간 최고의 생(生)임을 터득한다.

인생을 음악처럼 살고 죽을 수는 없을까!

그날 밤 나는 잠을 설쳤고, 이튿날은 직책상의 의무를 저버리는 실수를 저질렀지만, 살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위태롭고, 슬프고, 허무한 것이며 또한 얼마나 기막힌 일이고, 벅차고 희한한 사실이냐는 것을 실감으로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죽음에 임해서 ‘이럴 리가 없을 텐데…’하는 멍청스런 독백을 하지 않을 것 같다.

(1974. 수필문학,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