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러움의 힘 / 임보
부드러움의 힘 / 임보
―선시(仙詩) 「전」에 대한 사족(蛇足)
전(犭田 )이라는 짐승은 선하기 이를 데 없다
사나운 뿔도 날카로운 이빨도 없다
작은 몸통에 짧은 다리
체구도 볼 품 없는 느림보다
다만 털과 눈매가 곱다
어떤 맹수(猛獸)가 달려들면
몸을 공손히 도사린다
먹으면 먹히고
그냥 두면 다시 간다
그런데 만일 어떤 놈이 그를 삼키면
그의 뱃속에 들어가 알을 낳는다
며칠이 지나 그 알들이 깨이면
전의 새끼들은 그 맹수의 등을 뚫고 세상에 나온다
그렇게 그는 천의 몸뚱이로 다시 살아난다
그래서 영리한 표범은 전을 멀리서 보기만 해도
무서워 줄행랑을 친다.
― 졸시 「전(犭田 )」
얼마 전에 선시집(仙詩集) 『구름 위의 다락마을』을 세상에 내놓았다.
불교의 선시(禪詩)가 아닌 신선사상(神仙思想)을 담은 선시(仙詩)다.
내딴에는 새로운 것이라고 생각해서 만들어 낸 것인데 세상 사람들은 별로 관심이 없는 듯하다.
현실과는 동떨어진 기상천외의 망상쯤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지금이 어느 때라고 그런 백일몽에 사로잡혀 있는 건가고 빈정대는 사람도 더러는 있을지 모르겠다.
『구름 위의 다락마을』은 시적 화자가 선경(仙境)을 주유하면서 그가 보고 느낀 것을 기록한 연작 형식의 작품들로 되어 있다.
물론 이 선경은 작자의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 세상은 단순한 망상의 소산은 아니다.
선경이란 한마디로 말하자면 인간이 꿈꾸는 가장 이상적인 세계다.
지상에서 인간이 겪고 있는 모든 제한과 구속으로부터 벗어난 자유의 세상이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으로부터도 자유스럽고, 의식주의 괴로운 문제로부터도 해방된다.
힘과 악이 기승을 부리고 있는 현실과는 달리 그곳은 선이 지배하는 무욕청정한 세상이다.
신선사상은 모순당착한 현세를 간접적으로 비판하는 아이러니와 상징성을 담고 있기도 하다.
현실을 부정하는 허무사상이 아니라 승화 극복하려는 긍정적인 사상이다.
그러니 단순히 허황된 생각이라고 밀쳐 버릴 일이 아니라 오늘의 각박한 현실을 누그러뜨리는 정신적인 청량제로 삼을 만도 하다.
「전(犭田 )」은 『구름 위의 다락마을』에 수록된 한 작품이다.
전은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진 하나의 동물이다.
‘犭田 ’이라는 한자 역시 ‘犭’과 ‘田’을 끌어다 붙여 만든 새로운 조자(造字)다.
이 전은 ‘부드러움(柔)’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유(柔)’에 관한 사상은 노자(老子) 사상의 핵심의 하나인데 열자(列子)는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천하에는 언제나 이기는 도(道)가 있고, 언제나 이지지 못하는 도가 있다.
언제나 이기는 도를 유(柔)함이라 부르며, 언제나 이기지 못하는 도를 강(强)함이라 부른다.
이 두 가지는 알기 쉬운 것인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주 옛날 말에 ‘강함은 자기만 못한 자에게 앞서지만, 유함은 자기보다 뛰어난 자에게 앞선다’ 하였다.
자기만 못한 자에게 앞서는 사람은 자기와 같은 상대를 만나게 되면 곧 위태로울 것이다.
자기보다 뛰어난 자에게 앞서는 사람은 위태롭게 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도로써 한 몸을 이기는 것은 아무 것도 않은 것 같은 것이고,
이러한 도로써 천하를 맡아 다스리는 것도 아무 것도 않은 것 같은 것이다.
그것은 이기지 않으려 해도 스스로 이기게 되고
맡아 다스리지 않으려 해도 스스로 맡아 다스려지게 됨을 말하는 것이다.
열자(列子)는 이 유(柔)를 천하를 움직이는 이상적인 힘으로 보았다.
여기에는 온순, 약함, 선함, 따름(從), 편안케 함 등의 덕을 담고 있다.
무릇 모든 성현들은 이 ‘유’를 극단적으로 실현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유’의 침을 맞은 사람들은 그가 아무리 강한 자라 할지라도 언젠가 무너지고 만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알을 슬어 부활하고 있는가 보면 알 일이다.
전(犭田 )은 바로 이 유(柔)을 형상화한 상징적 동물이다.
선시(仙詩)는 허황한 듯하지만 결코 허황된 얘기로 끝나 버리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