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수재 2007. 7. 21. 06:29

 

제3공간  /  유공희

 

인간에게는 대체로 세 개의 생활공간이 있는 것 같다.

첫째, 먹고 자고 자손을 생산하는 ‘가정’이라는 제1공간이 있다.

이 제1공간은 동물들의 세계에도 반드시 있기 마련인, 생존의 기본조건이기 때문에 어떤 형태이건 그것이 없는 인간생활이란 좀 상상하기 어렵다.

동물들의 제1공간은 때로는 인간들의 그것보다 더 오붓하고 아기자기한 것을 볼 때가 있다.

그 중에서도 새들의 그것은 얼마나 ‘집’이라는 말에 어울리는 것인지 누구나 느낄 줄 안다.

도연명(陶淵明)의 ‘山氣日夕佳 飛鳥相與還’이란 시구에는 아름다운 대자연 속의 새들의 따스한 ‘집’의 이미지가 은근히 풍기지 않는가.

생활의 제1공간이 모든 생물들의 행복한 ‘보금자리’가 되어야 함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현대의 도시생활에서는 이 행복의 보금자리가 지나칠 정도로 삭막한 공간이 되어 버린 것 같다. 생활이 거의 전투태세가 되어 버린 도시에서는 생활의 중심이 제2공간으로 옮겨지고 만 느낌이 있다. 교통지옥이란 말이 나올 리만큼 도시의 인구는 러시아워가 되면 홍수같이 제2공간으로 대이동을 한다.

그 제2공간이 다름 아닌 각종 직장임은 말할 것도 없다.

각 직장에서의 생활 표정은 실로 다양하겠지만, 조직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인간이 기계의 부속같이 움직이고 있다는 점은 어디서나 공통적일 것이다.

그곳은 인간을 인간으로부터 소외시키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지배하는 세계다.

그 세계에서 남을 이기고 앞서기 위해서는 이 소외 작용에 누구보다도 열성적으로 대응해 가야 한다.

이리하여 직장마다 자기의 퍼선넬러티가 바닥나 버린 이른바 ‘엘리트’라고 하는 꼭둑각시가 탄생하는 것이다.

그 꼭둑각시가 되는 것을 세상에서는 ‘출세’라고 하는 것이고, 그 과정이 빠를수록 ‘수재(秀才)’라고 갈채를 보낸다.

그러나 다소라도 인간의 생리를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이 제2공간의 생리에 이화감(異化感)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의 생리는 본질적으로 기계의 물리에 동화(同化)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어느 직장에서나 퇴근시간이 가까워 오면 그 인간의 생리가 기지개를 켜면서 간신히 소생을 시도한다.

무시로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옆의 친구와 짧은 사담(私談)을 나누면서 얼굴에 생기가 돈다.

생활의 보금자리인 제1공간이 그리워지는 것일까?

그러나 기다리던 퇴근시간이 되자 그들의 발길은 방향이 엉뚱하다.

그들에게는 또 다른 생활공간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생활의 제3공간― 그것은 이를테면 대폿집, 맥주홀, 당구장, 기원 등등이다.

도시의 뒷골목은 이 시각이 되면 색다른 러시 풍경을 보여준다.

이 시각이 제1공간의 가족들로서는 몹시 초조한 시각일지 모르나 본인들로서는 가슴이 부푸는 황홀한 해방의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직장에서 보는 그들의 그 한결같이 퇴색한 표정에 비해 대폿집, 맥주홀로 들어서는 그들의 얼굴이 얼마나 인간적이며 생기가 도는가는 본 사람은 잘 알 것이다.

정부에서는 이 시각의 제1공장의 삭막을 덜어주기 위하여 이른바 ‘가정의 날’이라는 것을 제정해 놓았을 터이나, 그것을 제안한 관리가 그 날마다 자기의 ‘가정’으로 곧장 직행하는지 의문이다.

우리나라처럼 여러 가지 ‘날’이 많은 나라도 드물 것이다.

그 ‘여러 가지’가 지나치게 푸대접을 받는 데서 마련된 ‘날’일 터인데, 그 여러 가지 ‘날’만치 그 ‘여러 가지’가 청승스러운 날도 없을 것이다.

 ‘어머니 날’의 어머니, ‘스승의 날’의 스승은 어느 때보다도 그 어머니와 스승이 서글퍼서 우는 날이다. ‘가정의 날’을 토요일로 정해 놓은 것부터 애당초 미련한 처사다.

다음날이 공일인지라 이날처럼 도시의 제3공간이 은성한 날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 자신 남 못지않게 이 제3공간을 좋아하는데 원래 술을 즐기는 기질이기도 하지만 각양각색의 해방된 인간 본연의 모습을 그곳에서 관찰하는 재미가 진진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막역한 K군과 단골집 B홀에서 맥주잔을 기울이고 있는 어느 저녁―. 문득 옆자리에서 들려오는 소리 “내 자네한테만 하는 이야긴데…” 이 전제가 이미 흥미를 끌기에 충분하다.

 ‘자네한테만’ 한다는 이야기 소리가 떠나가게 큰 것이 재미있는데, 목소리가 한 옥타브쯤 올라가면서 “오늘 내 그 P과장새끼 한 대 깔려다 참았단 말이야…” 한 컵 쭈욱 들이키고 맥주병을 든다.

병이 빈 모양. “야아 한 병만 더!” 소리를 지르고 나서 “언젠가는 그 P새끼 가만 안 둘 테야. 두고 보아, 제가 뭔데 나를 그렇게 따까셔?” 소리가 커선지 거의 독백같이 들린다.

상대방은 마지못해 들어주고 있다는 표정이다. 나는 웬 일인지 슬퍼진다. 물론 화제가 ‘P새끼’에만 머물지는 않는다.

거나해진 두 사람은 계산을 서로 하려고 잠깐 실랑이를 벌이더니 결국 ‘P새끼’를 가만 안 둘 사람이 계산을 치르고 일어선다.

 “한 군데 더 가자구. 기분이다. 제기랄!” 이 친구들 열심히 제3공간을 편력할 것이 틀림없다.

나는 그가 직장에서 곧장 자기 집으로 돌아갔더라면… 하고 생각해 본다. P씨를 깠어야 할 주먹이 무고한 그의 아내를 까지 않았으리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의 제1공간에서 벌어졌을 지도 모를 살벌한 광경을 눈앞에 그려보고 나는 이 제3공간이 얼마나 고마운 생활의 완충지대인가를 새삼 통감하면서 다시 잔을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이튿날 직장에 나간 그가 여느 때나 다름없이 P과장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아침인사를 바치는 얌전한 부하로 깨끗이 복원(復元)되었을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다.

‘취중진담(醉中眞談)’이라는 말이 과연 진담이라면 대부분의 인간들이 자기 자신을 되찾지 않고는 못 배기는 희한한 생리를 가진 곳이 이 제3공간인 것 같다.

그 밖의 생활공간에서는 많든 적든 간에 누구나 일종의 가면극을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 아닌가?

흔히 제3공간의 생태를 ‘탈선(脫線)’으로 보려는 상식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본성에 대해 너무도 몽매한 위선적인 판단이다.

인간은 ‘인간다운’ 존재이기 전에 먼저 ‘인간적인’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인간에게 ‘인간다운’ 당위성(當爲性)을 요구하기 전에 그 인간의 자연성(自然性)을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핏기 없는 ‘인간다움’보다는 물씬하게 ‘인간적인 것’이 만발하는 생활의 제3공간을 빈축(嚬蹙)할 탈선자의 집합소로 보려는 도학선생 중에는, 화끈한 입김만 닿아도 아슬아슬하게 깜박거리는 ‘인격(人格)’밖에 가진 것이 없는, 청승맞은 위선자가 많은 법이다.

자고로 ‘탈선’의 명수 중에 위대한 인물이 많았었다는 사실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가난한 우리 백성들은 유달리 욕을 많이 하면서 살아간다.

우리는 모두 무시로 욕이 터져나올 수밖에 없는 환경 속에서 사는 지도 모른다.

또 터지는 욕들이 유별나게 끔찍하고 지저분한 것이 특징이다.

전래(傳來)의 욕들이 그러하기 때문인지 중학교 시절의 은사 Y선생은 익살스럽게도 ‘똥 구워 먹을 녀석!’이라는 창작욕을 곧잘 활용하셨다.

가난한 서민들의 입에서 터져나오는 욕을 나는 일종의 제3공간적 폭발이라고 보고 싶다.

만약에 욕을 하는 자는 처형(處刑)한다는 법률이 공포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내 눈앞에는 생활의 제3공간이 완전히 폐쇄되어버린 야만의 도시― 처량한 지옥의 풍경이 떠오른다. 워낙 인내력이 부족한 동물이 인간이다.

터져나오려는 욕을 참다못해, 가정에서는 폭력이 난무하고 골목에서는 밤마다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거리마다 광인(狂人)이 방황하는 광경을 상상해 보라.

어려운 살림 속에서 무시로 터져나오는 갖가지 욕은 어쩌면 제3공간에서 들이키는 갖가지 술과 같은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 아닐까?

텁텁한 막걸리 한 사발 같은 욕, 독한 소주 한 잔 같은 욕…. 그때 그때 적절한 욕이 입에서 터져나옴으로 해서 폭력이 불발로 그치게 되는 것이며, 그들의 생활에 어떤 정서적 균형이 유지되어 가는 것이 아닐까?

아내에게 끔찍한 욕을 퍼붓는 남편이 누구보다도 그 아내를 끔찍이 사랑하는 남편일지도 모르지 않겠는가!

 

세상에는 제1공간과 제2공간만을 열심히 왕래하는 마치 벽시계의 추 같은 인생을 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날을 알뜰하게 ‘가정의 날’로 삼는 그를 그의 가족들이 얼마나 존경할는지 의문이다.

그런가 하면 또 생활 속에 제3공간밖에 없는 희한한 사람도 혹 있을지 모른다.

나는 저 세기말의 프랑스의 명정(酩酊) 시인 폴 베르레느와 우리의 방랑 시인 김삿갓이 어쩌다 한 자리에 어울려 주거니 받거니 술상을 기울이는 광경을 눈앞에 그려본다.

하나는 유적(流謫)의 천사(天使)의 모습이요, 하나는 탈속한 자유인의 모습이다.

그러나 천사도 아니요, 탈속도 못한 우리 범부들은 결국 제1공간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떨떨한 운명을 언제나 감수하고 마는 것이다.

나는 새가 아니라도 인간이 마지막으로 돌아갈 곳은 역시 내 ‘집’인가 보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한산도’라는 담배를 여러 개비 태웠다. 문득 각종 담배 이름들이 마음에 걸린다.

 우리의 생활에서 대표적인 제3공간적 기호품이 담배라면 그 이름들은 ‘한산도’ ‘은하수’ ‘청자’라고만 할 것이 아니라,

따로 이를테면 ‘제기랄’ ‘제가 뭔데’ 등등으로, 새 담배를 만들어 발매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고독한 실의의 군상들에게 담배의 효용이 배가(倍加)될 것이요, 국고도 그만큼 더 푼푼해질 것이 틀림없지 않겠는가!

(1975. 수필문학,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