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의 역사 / 유공희
웃음의 역사 / 유공희
― 웃음의 회복(恢復)을 위한 노트
먼저 ‘웃음’에 대해 널리 알려진 공리(公理) 몇 가지를 더듬어 보기로 한다.
첫째로 ‘자부심(自負心)의 이론’이다.
이 이론의 시조는 17세기 영국의 철학자 홉스인데 그에 의하면 ‘웃음의 정념(情念)은 타인의 열등성(劣等性)과 비교했을 때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돌연한 우월감(優越感)의 감정’이라는 것이다.
불구자의 절름거리는 걸음걸이를 볼 때, 바나나 껍질을 밟고 졸도하는 사람을 볼 때, 우리는 누구나 ‘나는 정상(正常)이다’, ‘나는 저런 실수는 안 한다’라는 우월감에서 상대방을 웃게 된다.
사람은 곧잘 타인의 실수나 결점이나 불행을 웃어 주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있지 않을까?
프랑스 17세기의 모랄리스트인 라 로슈푸코는 ‘우인(友人)의 불행에는 언제나 우리를 기쁘게 하는 요소가 있는 법이다’고 말한 적이 있고, 프랑스 현대 극작가 마르셀 파뇰은 ‘장례식은 언제나 즐거운 기분에 차 있기 마련이다.
누구나 사자(死者)에 대한 생자(生子)라는 우월감에 도취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라고 꼬집은 일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부심의 공리’는 결국 미녀가 추녀를 보면 픽 웃는 이치와 다를 바 없으므로 이른바 ‘조소(嘲笑)’에나 적용될 이론일 것이다.
‘웃음’에 대한 또 하나의 공리는 19세기 영국의 철학자 스펜서가 발명한 ‘하강적(下降的) 부조화(不調和)의 이론’이다.
인간의 의식이 큰 일에서 작은 일로 갑자기 이행(移行)될 때, 다시 말하면 긴장된 기대심이 돌연히 무(無)로 돌아가 버릴 때 생기는 감정이 ‘웃음’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결혼식장에서 엄숙하게 주례를 서고 있는 목사가 재채기를 한다거나, 제사 마당에서 독축(讀祝)을 하던 축관(祝官)이 방귀를 뀐다거나 할 때 누구나 ‘웃음’을 터뜨리게 될 것이다.
이 경우에도 우리의 관심거리인 수수한 유머의 감각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유머의 감각은 부조화의 돌연한 출현(出現)에서가 아니라, 부조화의 점차적 인식에 의해서 일어나게 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유머의 감각에는 돌발적 자극이 필요 없다.
그것은 직접적 반응보다도 오히려 정관적(靜觀的) 습성에서 꽃피는 것이다.
유머의 감각에 가장 가까운 ‘웃음’의 공리는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의 이론’일 것이다.
‘웃음’은 어떤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에서 일어난다는 영국의 평론가 니콜슨의 설이다.
이런 ‘웃음’은 부조리에 대한 이성(理性)의 조정(調整), 축적(蓄積)된 억압으로부터 상쾌하게 해방되는 기쁨의 표현이다.
유머에 대한 해석은 구구하지만 불필요한 엄숙성을 해제하는 수단이라는 견해가 내게는 가장 공감을 준다.
터무니없이 거만한 사람이나 허영이나 욕심이 많은 사람이 곧잘 엄숙한 표정을 짓기 좋아한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특히 모자란 사람이 남의 윗자리에 앉게 될 때 우리는 그런 표본을 더러 본다.
2차 대전(大戰) 무렵의 신문이나 뉴스 영화의 화면을 독점하다시피 한 저 히틀러나 뭇솔리니나 동조(東條)의 얼굴에 ‘웃음’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히틀러의 나치스가 망한 것은 저 마음씨 고운 할아버지와 손자의 만화로 유명했던 천재적 만화가 브로우엔을 처형했기 때문이라고 단정하고 싶다.
통치자가 ‘웃음’의 감각을 잃게 될 때 그 민족의 운명은 매우 위태로울 것이다.
진지한 문제일수록 미소를 띈 얼굴들로써 토의되어야 할 일이며, 무시로 엄숙한 얼굴을 준비하는 좋지 못한 습성을 버려야 할 것이다.
인간의 심신은 언제나 속박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동물원의 원숭이를 보고 유머러스하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유머는 인간이 인간에게만 기대할 수 있는 가장 인간다운 요소다.
유머는 불필요한 긴장을 풀어줄 뿐 아니라, 폭력도 무력하게 만드는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끝으로 베르그송의 ‘웃음’의 공리가 있다.
‘자유스러운 활동에 끼어드는 기계적 동작의 이론’이다.
인간으로서의 자유스러운 신축성과 생기 있는 융통성이 있어야 할 자리를 기계적 물리적 동작이 점령할 때 ‘웃음’이 일어난다.
인간성이 기계적 동작에 예속될 때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는 이 이론은 특히 현대와 같은 문명시대에 도처에서 실증될 수 있는 이론일 것이다.
우체국 직원이 편지 겉봉에 일부인(日附印)을 찍어가는 광경이나. 은행 직원이 지폐 뭉치를 번개같이 세어 넘기는 그 숙련된 동작은 경탄보다는 근본적으로 ‘웃음’의 대상인 것이다.
문명의 틈바구니에서 그 부속품처럼 정신없이 돌아가는 25시적 광경은 본질적으로 희극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관공서에서 흔히 보는 그 정연(整然)해 보이는 관료적 형식주의, 당자(當者)는 의기양양해 할 지 모르나 전문가들이 풍겨대는 그 부분품적 기질, 도형수(徒刑囚)처럼 제복 가슴팍에 번호를 달고 다니는 학생들….
정신을 차리고 보면 모두 우습지 않은 것이 없다.
‘웃음’에 대한 공리가 어떻든 간에 웃는다는 것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건전한 생리다.
잘난 체하는 멍텅구리나 거만한 허영쟁이가 아닌 이상, 천진스런 ‘웃음’의 감각은 만인에 부여된 보편적인 천재(天才)인 것이다.
그것은 어느 시대에나 평범한 서민들 생활 속에서 복욱(馥郁)하게 꽃피는 인간의 향기다.
기원 전 6,7세기경의 그리스 조각의 안면(顔面)에는 한결같이 화사한 미소를 볼 수 있다.
미술사가들은 이것을 ‘Archaic Smile'이라고 명명했다. 고대의 미소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미소는 다음 세기의 조각에서부터는 찾아볼 수가 없게 되고 그 대신 어딘지 마음의 무장(武裝)이 엿보이는 심각한 표정으로 바뀌어 버린다.
이것은 매우 흥미 있는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인간 대 자연의 관계가 인간 대 인간의 관계로 전환되는 시대성의 반영을 거기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Homo Ludens(遊戱人間)가 Homo Sapiens(思考人間)로 전락(轉落)되는 징표라면 지나친 억측일까?
아름다운 대자연 속에서 고대 그리스 인은 아무런 인위적 구속도 없이 천진스런 생물적 인생을 즐기며 살았을 것이다.
그들의 감성과 지성은 분열이 없는 온전한 통일체로서 자연과 완전한 조화 속에서 전인적(全人的) 생활을 마음껏 향유했을 것이다.
율리시스는 일류의 항해사(航海士)요, 조선공(造船工)이요, 일류의 궁수(弓手)요, 프로레슬러요, 일류의 통치자요, 지식인이었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 인은 무진한 생명의 건강을 누리며 살았을 것이다.
그들의 신은 삭막한 사막(砂漠)의 신같이 무서운 신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의 신은 그들 자신이 모델이 되어 탄생된 그들 자신의 이상적 분신(分身)이었다.
그들 신들의 조상(彫像)에서 우리는 언제나 영원한 인간 정신의 고향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문명이 발달하면서 인간은 자연과 담을 쌓기 시작한다.
자연에서 소외된 문명인은 인간성의 조화를 잃게 된다.
내면의 조화가 파괴되면서 인간은 건전한 ‘웃음’을 상실하게 된다.
보들레르는 그의 일기에서 ‘남성의 얼굴의 매력은 멜랑코릭한 표정에 있다’고 했다.
양미간에 ‘웃음’ 대신 심각한 내천(川)자가 패어져 있어야 여성들이 스마일한다는 이야기다.
‘웃음’은 백치(白痴)나 도통한 부처님의 표정이 되어 버리고, 햄릿이 가장 매력 있는 남성의 타입이 되었다.
조화 있는 인간성 대신 모가 나는 성격이 탄생한 것이다.
‘성격(性格)’은 실로 근대의 소산이며 그것은 인위적 환경이 자연인의 본성에 찍는 안타까운 낙인(烙印)을 의미한다.
소박미(素朴美)보다도 감상미(感傷味)가 미(美)의 권좌를 차지하게 되었다.
문학상의 근대 낭만주의는 자연을 상실한 인간의 탄식과 오열(嗚咽)로부터 출발했다.
마치 어머니의 품안에서 떨어진 어린애처럼 시인은 새삼 자연을 동경하는 것이다.
‘하늘의 무지개를 보면 내 가슴은 뛴다’는 워즈워드의 탄식은 고대 그리스 인에게는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한다. 자연을 잃은 근대인은 또한 건강한 ‘웃음’을 잃었다.
르네상스 이후의 문학 작품 속에 나타나는 ‘웃음’은 나는 세 가지의 전형으로 분류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르네상스 시대의 ‘웃음’이다.
섹스피어는 비극 속에 곧잘 코믹한 요소를 섞어서 극적 효과를 더욱 드러낸 천재적 드라마뜨루기의 소유자이다.
마치 초록색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노랑빛을 대조시키는 수법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예를 들면 『로미오와 주리엣』에 등장하는 머큐쇼의 익살이다.
섹스피어의 극을 읽으면 우선 그 등장인물들의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요설(饒舌)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머큐쇼는 티볼트의 칼에 찔려 쓰러져 목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참 잘도 지껄인다.
섹스피어의 인물들의 대사는 대화이건 독백이건 한 마디 한 마디가 시(詩)에 넘치는 웅변이요, 에스프리가 빛나는 요설이다.
인간이 어떤 득의(得意)의 절정에 서게 되면 으레 연기(演技)가 나오기 마련이고, 그것은 곧 멋있는 지껄임으로 표백되는 것이다.
섹스피어 비극 중 가장 매력 있는 인물은 햄릿이나 오셀로나 맥베드가 아니라 『헨리 4세』의 전후 편을 통해서 종횡무진으로 활약하는 저 뚱뚱보 가죽포대인 폴스탑일 것이다.
도덕적 입장에서 볼 때 폴스탑은 결코 ‘선인(善人)’의 범주에는 들 수 없는 존재다.
그러나 누가 그를 미워할 수 있는가! 폭포처럼 쏟아져 나오는 익살 속에 참말이라곤 씨를 삼으려 해도 없고, 먹고 마시는 폼은 가르강뛰어의 쌍둥이 같은, 주정뱅이요, 오입쟁이인 이 괴물에서 나는 하나의 르네상스적 인간상의 전형을 볼 수 있다고 믿는다.
가식 없이 터져 나오는 인간성 그것이 바로 르네상스적 전형이기 때문이다.
머큐쇼나 폴스탑에만 그치리오마는 비극의 주인공들도 모두 기막힌 웅변가들이다.
햄릿은 죽는 순간까지도 얼마나 그 자신이 출중한 연기자이며 달변가인가.
오셀로가 자살하는 순간에 늘어놓는 희한한 수사(修辭)를 보라.
맥베드가 던컨 왕을 살해하고 나서 두 손에 묻은 피를 보고 뇌까리는 독백은 얼마나 풍성한 말의 음악인가.
섹스피어 문학의 매력으로서 나는 언제나 그 에스프리에 넘치는 요설을 첫째로 들고 싶다.
그것은 라블레, 세르반테스와도 통하는 르네상스 문학의 현저한 특징이다.
유쾌하게 현실의 인생을 즐기며 건강한 ‘웃음’의 감각을 싱싱하게 발휘하고 사는 신명나는 인간의 모습을 우리는 거기서 볼 수 있는 것이다.
19세기 문학에서 ‘웃음’은 한번 큰 변질을 겪는 듯하다. 그것은 본연의 건강성을 잃고, 이글어진 심각성을 띈 ‘웃음’이다.
고골의 「검찰관(檢察官)」에서 우리가 웃는 것은 주인공 프레스타콥의 유쾌한 사기 솜씨가 아니라 그에게 골탕 먹는 부패한 관료배다.
무엇인가가 잘못되어 있는 것이다.
실은 한숨이 터지고 슬퍼해야 할 일이 그 ‘웃음’의 원료가 되어 있다.
고골은 관객들을 그렇게 웃기었기 때문에 망명까지 해야 했다.
웃음까지도 헌법에 걸리는 시대로 변한 것이다.
고골의 ‘웃음’의 현대판을 찾자면 쥬울 로망의 「크녹크」일 것이다.
면허도 없는 돌팔이 의사가 무지한 촌민들을 모조리 자기의 환자로 만들어 버리는 이야기. 어느 것이나 왜곡된 문명 현상에 대한 비판이지만, 그것을 ‘비판(批判)’으로서 성공하게 만든 것이 곧 작가의 건강한 ‘웃음’의 감각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체홉에 이르면 ‘웃음’은 ‘눈물’을 동반하는 미묘한 것이 된다.
‘체혼테’라는 유머러스한 필명으로 무수한 소극(笑劇,단편소설)을 썼던 아르바이트 작가 체홉은 천재적인 ‘웃음’의 창조자이었으나 그의 ‘웃음’은 모두 인생의 페이소스에 젖은 슬픈 ‘웃음’이다.
그것은 모두 왜곡된 인간 대 인간 관계 속에서 탁월한 ‘웃음’의 감각에 촉발되어 피어난 우울한 꽃들이다.
근대의 ‘웃음’은 이와 같이 그 본래의 천진성을 상실했고, ‘웃음’은 해탈한 부처가 아니면 백치의 표정으로 소외되고 말았다.
체홉의 극 속에 진실한 ‘대화(對話)’가 없는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현대극에서 ‘웃음’은 또 괴이한 변질을 겪는 성싶다.
사르트르의 일막극(一幕劇) 「닫혀진 문」(Huis clos)에서 3인의 주인공은 한바탕의 갈등을 벌인 후 지쳐버린 침묵 끝에 차례로 허망한 홍소(哄笑)를 터뜨린다.
그것은 ‘웃음’이라기보다도 허파의 경련(痙攣)이다.
내가 느끼기로는 사르트르의 작품 속에 종종 보이는 이 경련적 홍소에는 깊은 철학적 의미가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이미 여기서 이야기하는 ‘웃음’의 범주와는 거리가 먼 것 같다.
그것은 말하자면 인간이 극한상황 속에서 돌연히 절감(切感)하게 되는 절망의 표현인 것 같다.
2차의 대전을 겪은 인간의 지성은 인간 실존의 근본적 상황을 밑바닥까지 파헤치려고 한다.
신은 죽은 지 오래고 신을 잃은 인간은 부조리한 존재로밖에 실감되지 않는다.
‘웃음’의 감각 앞에 이제는 어떤 구체적인 타자(他者)가 아닌 바로 자기 존재 그 자체가 엉뚱한 난센스로서 나타난 것이다.
처량하게, 오지도 않는 고도(Godot)를 기다리는 두 사람의 피에로 에스트라공과 브라디미르는 사무엘 베겟의 ‘웃음’의 감각 앞에 화석(化石)되어 버린 인간 실존의 극한적 형상이 아닌가?
그들은 이미 ‘성격’도 없는 하나의 ‘물건’ 같은 존재다.
무대 위의 두 사람을 보고 어떤 관객이 과연 ‘웃음’을 웃을 수 있을 것인가?
살고 있다는 것이 기가 막혀서, 자의(自意)도 아닌데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창피해서 돌연히 터지는 홍소가 아니면 가만히 있을 수도 없어 실의에 차서 두덜거려 보는 독백(獨白)… 그것이 현대의 ‘웃음’이요 산다는 모습일까?
웃는 데드 마스크를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람이 죽을 때에 남긴 말들을 모아 놓은 책을 보았다.
웃으면서 죽는 사람의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모두 무엇인가 ‘말’을 남기고 죽는데 어떤 이는 죽는 순간까지도 수사(修辭)를 한다.
희한한 것은 대 발작이다.
‘비앙숑! 비앙숑을 불러 주어! 그가 내 병을 고칠 수 있어!’ 그러나 ‘비앙숑’은 알고 보니 그의 소설 속에 나오는 의사의 이름이었다.
소설가로서 위대한 순직(殉職)이 아닐 수 없다.
베토벤은 ‘희극은 끝났다’고 고대 그리스 철학자의 말을 표절했다.
죽는 순간이나마 고대의 미소를 회복할 재주가 없을까?
우리에게 더 가까운 관음보살의 ‘웃음’이 더 좋은 것 같다.
그곳에서 우리 동양인의 슬기의 고향을 볼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서양의 ‘웃음’은 모나리자가 대표한다면 둘 사이에는 차원적(次元的) 차이가 있을 것 같다.
생을 완전히 달관한 원만구족(圓滿具足)의 ‘웃음’, 마하(摩詞) 가섭(迦葉)의 염화미소(拈華微笑), 여산(廬山) 골짜기에서 도연명(陶淵明), 육수정(陸修靜), 혜원법사(惠遠法師)가 마주 보고 웃었다는 호계(虎溪)의 삼소(三笑), 선가(禪家)의 가가대소(呵呵大笑)….
이렇게 더듬다 보니 ‘웃음’의 달인은 역시 우리 동양인이었던 같다.
영국의 유머, 프랑스의 위트가 유명하다지만, 무진한 생의 인식을 그윽하게 담은 동양의 ‘웃음’은 끝끝내 우리가 터득해야 할 ‘철학’ 이전의 슬기일 것 같다.
문명이 발달된 끝에 인간이 별에서 별로 왕래하는 시대가 오고 있다.
인간은 실로 엄청난 것들을 손에 넣었다. 그러나 한편 끔찍이도 소중한 것들을 잃어가고 있는 것 같다. 우리 죄없는 생활인들의 천재인 건강한 ‘웃음’의 감각을 잃지 말아야 하겠다.
적의(敵意) 없는 인간이 인간끼리 만났대서 서로 교환하는 말없는 미소(微笑)… 그것은 인간이 상실해서는 안 될 영원한 생의 향기다.
우리의 생활 속에는 어디서나 건강한 ‘웃음’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배만 나오고 이마만 벗겨져 가는 정치가, 학자, 실업가보다도 청신한 ‘웃음’의 감각을 지닌 천재적인 만화가(漫畵家)나 코미디언이 더 보배롭다는 것은 비단 필자가 갖는 생각만은 아닐 것이다.
(1972. 4. 드라마, 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