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수재 2007. 7. 30. 16:00

 

배회 취미   /   유공희

 

내가 누구보다도 가장 경원(敬遠)하는 사람은 밥을 빨리 먹어버리는 속칭 속식가(速食家)다.

혹 동반해서 점심을 먹게 될 때 내가 미처 반도 먹기 전에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바닥을 내버리고는 유유히 담배를 피워 무는 친구가 더러 있는데 그런 때 나는 무슨 경기(競技)에서 패배한 선수같이 우울한 열등감에 젖어버린다.

이제는 식사를 같이하자고 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나보다 빠른 그 정 떨어진 속식가인지 아닌지부터 판정하게 되고, 대개의 경우 차라리 혼자 하게 될 때가 많다.

무슨 일이나 동반해서 하게 될 때 서로의 템포가 맞아야 쾌적하다는 것쯤은 상식이 아닌가.

내기도 아닌 바에 먼저 먹어치웠다고 유쾌할 까닭도 없겠지만 심신으로 피해를 입는 것은 언제나 나 같은 느리광이인 것이다.

상대방에 템포를 맞추자니 생리에 무리가 오고, 기다리게 한 것이 미안해서 그만 먹자니 억울하고, 모처럼 즐거워야 할 식사가 참기 어려운 고역이 되고 마는 것이다.

모든 것이 경기화되어 살아가기 힘든 세상에서 식사까지 경기하듯 해서야,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식사는 산책하는 마음으로 천천히 할 일이다. 인간의 건전한 생리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식탁 위의 갖가지 음식이 그러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지난겨울 한 친구와 ‘정종대폿집’이란 데서 마신 적이 있었다.

술을 ‘대포’라고 하게 된 것이 언제부터인지 궁금하다. ‘대포’ 하면 막걸리로만 알고 있었는데 정종까지 ‘대포’로 마시게 된 것을 보니 그 살벌한 경기풍조가 차원을 범한 지 오랜 모양이다.

과연 모두들 큰 맥주컵으로 들이켜고 있었다. 취한 모양들도 정상이 아닌 것 같다. 맥주컵 두 개를 가지고 다가와서 윙크하는 아가씨보고, 정종을 45도 정도로 데워서 주전자에 담아오고, 제일 작은 잔을 가져오라 일렀더니 윙크가 사라지고 해괴하다는 눈치다.

정종에는 단 맛, 쓴 맛, 신 맛, 매운 맛, 떫은 맛, 다섯 가지 맛이 있다.

그리고 사람의 혀는 그 다섯 가지 맛을 알뜰하게 알아보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따끈한 정종을 누깔사탕 한 알만큼 입안에 담고 혓바닥 위를 골고루 굴린 다음 살짝 목을 넘겨야 술도 태어난 보람을 느끼면서 사람을 기분 좋게 취하게 해 주는 것이다.

주객이 술에 따라 마시는 법도 알아야 하지만, 파는 쪽에서도 그런 것쯤은 알고 함부로 정종을 ‘대포’로 내밀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닌가?

그 아가씨가 어느 정도나 공감을 했는지 모른다.

무슨 술이나 ‘대포’로 들이켜는 무지한 행동에 비하면 속식가는 그래도 점잖은 편이다.

 

어떤 학생이 ‘교양’을 위해서 세계 명작을 읽어야겠다고 산 책이 유고의 『레 미제라블』이었다면서 지루해서 도저히 독파할 수가 없더라고 했다.

그 긴 소설을 끝까지 읽어내는 끈기가 무섭다고 했다.

그것은 끈기 문제가 아니라, 이야기의 결말을 서두르는 좋지 못한 마음가짐 때문이다.

소설은 헐덕거리며 뛰어야 하는 마라톤 코스가 아닌 것이다.

갖가지 흥미진진한 요소들이 가득히 담겨 있는 책을 명작이라고 한다.

매사가 다 그런 것이지만, 종말을 서두르지 말고 도중과 과정에 정성을 기울여 산책하듯 소요(逍遙)하듯, 한 페이지 한 페이지, 한 마디 한 마디를 음미하고 있노라면 알찬 보람과 함께 언젠가는 끝이 올 게 아닌가? 무엇이 그리 급하단 말인가?

그 학생이 유고와 얼마나 깊이 사귀었는지 모르겠다.

 

‘여행을 즐겁게 할 줄 아는 사람은 인생을 즐겁게 살아갈 수 있다.

인생은 곧 여행이기 때문이다’고 말한 철학자가 있었다.

나는 여행을 즐겁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본다.

첫째, 짐이 없을 것, 둘째, 목적지가 없을 것, 셋째, 뜻 맞는 친구가 있다면 몰라도 혼자 떠날 것. 누구나 한번 시험해 봄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해서 정말 즐거움을 실감했다면 그 사람에게서는 들어볼 만한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들어볼 만한 이야기는 체험담보다는 인생을 살아가는 슬기라는 뜻이다.

이 경우 ‘여행’을 ‘산책’이란 말로 바꾸면 더 실감이 날 것 같다.

 

인생을 살아가는 자세도 가지가지 있겠지만, 세상 탓인지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무슨 장애물경기로 여기고 있는 것 같다.

그 출발점에서 혹 그 도중에서 허둥대는, 야망에 찬 젊은이들의 눈을 많이 본다.

허다한 장애물 저 편 아득히 ‘출세’라는 고올이 기다리고 있다고 믿고 있는 얼굴이다.

이른바 ‘엘리트’의 초상이다.

오다가다 듣는 대화들도 거의가 경기장 분위기에서 일어나는 열띈 정보들이어서 때로는 살벌한 느낌이 든다. 모두가 ‘명선수’가 되는 것이 소원이다.

‘명선수’가 되어 가는 그 동안에 그 젊은이의 ‘인간’은 만신창이가 되어 가는 것은 아닌지.

 

명선수… . 실수 없이 만점만 따내는 명선수에게 쏟아지는 박수소리는 언제나 요란하다.

그러나 ‘코마네치’가 실수하는 순간에 오히려 갈채를 보내고 싶은 마음도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보다도 인생을 무슨 경기로 알고 살아가게 될 때, 너무도 소중한 본연의 것들을 잃게 된다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앞만 보고 달려서야 주위의 무엇이 눈에 들어오고, 마음에 오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인생을 혓바닥 위에 놓고 굴릴 수가 없을 바에 우리가 인생의 이 구석 저 구석을 슬슬 굴려야 인생의 참맛을 알 게 아닌가?

빈둥빈둥 두리번두리번 하는 배회 취미, 소요 취미가 필요한 소이다. (1978. 수필문학,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