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 유공희의 글/유공희의 시
호수에서 / 유공희
운수재
2007. 8. 4. 05:10
호수에서 / 유공희
연애처럼 빛나는 시간이
고독한 내 두 팔에 고였다
말없이 침전된 정밀(靜謐)을 부시고
향기로운 바람 속을 걸어가는 그림자
수정처럼 맑은 두 눈이 하얀 구름을 넘어
황금빛 향연을 겨눌 때
멀리 수평선에서 밀려오는 무수한 언어가 있어
나의 선복(船腹)에 부딪쳐
그대로 심원(心願)의 노래가 되다
오수(午睡)를 삼키는 백일(白日)의 화염(火炎)―
바다처럼 충일(充溢)하는 의식이 있어
등 뒤에 떨어지는 무수한 조개껍질 위에
보얀 멸시(蔑視)가 쏟아질 때
오 일찍이 얼마나 고귀한 술이
이 광막한 명정(酩酊)을 이루었더냐
빛나는 태양
너의 성장(盛裝)을 이룬 고운 피가
여기 나의 배가 미끄러지는 곳에 가득히 굽이칠 때
나를 낳은 명석한 지혜가 있어
무수히 명멸하는 광채를 안고
내 앞에 한없이 빛나는
‘생활’의 처녀지를 꾸미는구나
오 물결!
일찍이 그 음성이 내 귀를 씻을 때
내가 간직히 상상하였던 그림자여
이제 눈앞에 헤아릴 길 없이 탄생하는
나의 시간 속에 또한
못 견디도록 피어나는 미지의 ‘나’의 생신(生身)을 거느리고
다시 무수한 나의 시체 위에서
오 나는 영원한 해바라기처럼
찬란하련다
(1942. 5. 동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