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간 자리/임보
황량한 가을 들판에 남아있는 빈
그루터기일레
추수의 아픈 낫에 머리가 다 잘린
된서리 허옇게 내려앉은 모과나무 빈 가지일레
지난여름 풍성했던 꿈의
열매들 다 뜯기고 만
요란한 잔치가 끝난 집의 빈 뜨락일레
부엌엔 불이 꺼지고 잿더미만 바람에 흩날리는
가을 숲
속 어느 멧새가 남겨 놓은 빈 둥지일레
마른 나뭇가지에 소소히 바람만 드나드는
제왕을 잃은 빈 궁궐일레
당신이 없는 이
방은
아, 사랑의 파장에는
주정꾼도 없이 이리 적막한가
그러나
여기저기 당신의 체취가 아직
배어있습니다
당신이 만지던 옥합
당신이 마시던 찻잔
남은 그 향기가
나를 연명케 합니다.
[푸른 가시연꽃의 노래 24]
/ 임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