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하강을 쳐다보는 두 편의 시 / 안수환

운수재 2007. 11. 3. 08:05

 

하강을 쳐다보는 두 편의 시 /  安 洙 環

 

시인의 꿈이란 대개 상승에 관한 이미지로 가득 찬 것일는지 모르겠습니다. 새들처럼 비상하기 위하여 땅바닥에 주저앉듯. 날 궂은 뒤 화창한 날씨인 듯. 높은 성곽의 문이 끝판에는 떨거덩 열리고 만 듯. 바위가 으등그러진 후 분산되는 먼지처럼. 이를테면 꽃들의 만개(滿開)가 상승의 극단이 아닌지요? 그렇더라도,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입니다. 이때야말로 하강의 이미지가 시인의 심중에 내려꽂히는 시각이지요. 하강. 잠깐만. 상승의 종말이 어떤 모습인지를 먼저 묻겠습니다. 상승의 끝. 그것은 소멸입니다. 소멸이라고요. 물은 100℃에서 539cal의 증발열로 기화됩니다. 상승의 이미지는 기화의 말단을 밟고 사라지는 이른바 소멸, 즉 죽음의 미학으로 돌아갑니다. 그런 까닭에, 상승의 분기점에서 갈라져 ‘옆으로 혹은 아래로’ 삐뚜로 떨어지는 하강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 하강의 포물선은 한 위대한 시인의 손끝에서 다음과 같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고은,「그 꽃」전문

 

하강의 전모를 이보다도 달리 어떻게 또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을는지요. 이제부터는 췌론(贅論)입니다. 만일 ‘그 꽃’을 ‘올라갈 때’ 보았다고 가정한다면, 시인이 말하는 암유의 밀도가 아무리 견고한 것일지라도 그 꽃은 어디든지 되는 대로 깔려 있는 지천(至賤) 이외에 다른 아무 것도 아닐 것입니다. 지천이라고요? 지천일지라도, ‘내려갈 때’ 보는 꽃의 지천이지요. 지천은 삶의 하중이지요. 그렇습니다. 하강이야말로 삶의 하중으로 돌아오는 귀환입니다. 상승의 꽃. 반대편 저쪽 상승의 꽃이라고 한다면 이미 그것들은 아무런 고통도 없이 빈소에 둘러앉은 문상 이외의 다른 것도 아닐 것입니다. ‘내려간다’. 그렇다면 그곳에서는 ‘그 꽃’의 자리가 눈물이어도 좋고 탄식이어도 좋습니다. 눈물도 탄식도 아닌 위엄이어도 좋고 장엄이어도 좋습니다. 사각(斜角)이거나 수치이거나 이것도 저것도 아닌 육도중생의 빈혈이어도 무방합니다. 문제는, ‘그 꽃’이 ‘내려갈 때’ 보인다는 점이지요. 그렇습니다. 쉽게 생각해 보십시오. ‘올라갈 때’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를 두고, 그러니까 그것은 욕망의 교조성 때문이라는 억측을 보태더라도 나무랄 일은 아닙니다. 또한 시의 메시지마저도 교조적이라는 혐의를 타박할 일도 아닙니다. 즉단(卽斷)이 비의입니다. ‘내려갈 때’ 보이는 그 하강의 꽃. 하강. 하강의 보폭(步幅). 그것말고는 이 시의 비의 앞에서 또 달리 무슨 이야기를 덧붙일 수 있겠습니까? 시적 통찰의 위의(威儀) 한 가닥; 시의 행간에 낀 침묵은 구문론적인 여분이거나 결손 따위가 아니라 의식의 방향을 결정하는 휴지부로서, 말하자면 저와 같은 침묵을 통해 발화자는 천천히 숨을 쉽니다. 숨소리. 시적 감응의 여백을 흔들고 있는 이 숨소리. 바로 저와 같은 여백의 분사(噴射)가 좋은 시를 결재합니다.

 

낱말과 문맥이 시의 골재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정작 감응을 주관하는 자는 시가 아니며, 그 시 속에 무르녹은 주관적인 격률도 아니며, 수사적 직능으로서의 문법도 아니며, 아니며. 시의 향기를 결정하는 주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언제나 제 분수를 확보한 저쪽에 있는 눈짓들이라는 사실이지요. 보십시오. 한 젊은 시인이 지금 물의 자리로 ‘내려간’ 다음, 그 물과 함께 속삭이고 있는 시를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내려가는 계단만 있다

모두 계단 밑을 향해 내려간다

모두 계단 위에 있다가

 

도중에 계단은 끝나고

어느새 물이다 물이 목까지 친다

올라가는 계단은 없다

 

물방울 하나 튀지 않는 소멸

차근차근 물로 들어간다 모두

차근차근 물로 들어간다

 

(떠오르지 않는 계단

모두 떠오르지 않는 계단이다)

                               ――박찬일,「베네치아․2」전문

 

‘내려간다’는 ‘물로 들어간다’의 본연입니다. 시인의 민감한 미의식을 따라가다가 보면, ‘핵심이 물에 있다’ 其樞在水(『관자管子』「수지(水地)」)는 도가적인 물의 지리학과 만나게 됩니다. 시인의 물은 이미 물질로 포착된 물이 아닙니다. ‘내려가는 계단만 있다’. 물은 ‘물방울 하나 튀지 않는 소멸’의 입지에서 차근차근 제 몸으로 들어오는 모든 계단을 지우고 있습니다. 베네치아를 추억해내면서도 시인은 물질에 대한 감성적인 조응, 혹은 활기에 찬 사물의 빛, 혹은 마음 깊숙이 가라앉은 일만 가지의 대응물을 염두에 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계단을 밟고 내려가면서 시작되는 시인의 사유는 ‘어느새 물이다’ ‘물이 목까지 친다’는 전율과 더불어 중단된 후 다짜고짜 물의 본성과 한 몸으로 뒤섞여버릴 뿐입니다. 베네치아의 경관을 노래한 시라고요? 베네치아의 정형(定形)은 물에 있었으므로, 시인의 꿈은 그에 대한 관찰만으로는 부족한 까닭에 만능으로서의 물의 자리, 즉 ‘하강’의 원초적 소묘를 이곳에서 다시 찾고 있었던 것이지요. 물은 생명의 보편적인 원소가 아니었던가요?

 

‘내려간다’. 꽃이든 물이든, 앞에서 말씀드린 두 편의 시가 다같이 ‘하강’의 이미지에 바탕을 둔 점을 저로서는 특별히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질과 꿈의 상관 가운데 시인의 상상력은 더 이상 ‘상승’의 이미지에 매달릴 것도 없이 그것 하나로 충분히 정숙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상승은 기쁨의 전이로, 하강은 고뇌의 표상으로 갈라질지라도 그 둘은 결국 몽상의 지도 속에서 한 색채로 결탁합니다. 물 위에 ‘떨어진’ 햇빛의 ‘섬광’처럼. 그런 점에서 이제부터는 물질이 거느린 그것들 완고한 고집에게 시인은 새롭게 말을 걸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물질의 안쪽에 서식하고 있던 침묵이 조금씩 솟아오르는 형상을 보십시오. 물방울을 보십시오. 물방울의 침묵. 물방울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시인이라고 한다면 사실이지 물방울의 완전한 침묵에 부합되도록 그의 명상을 소비해야 할 것입니다. 명상의 불순함에 대한 자각 없이, 혹은 상상력의 부패와 은유에 대한 혐오감 없이 시인은 결코 정직해질 수 없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린다면, 하늘을 응시하는 프로메데우스의 불꽃에서보다는 땅을 굽어보는 디오니소스의 숙취(宿醉)를 통하여 그는 더욱 정직해질 수 있습니다. 물질의 재가(裁可)를 외면한 시인의 몽상은 거짓입니다. 시와 물질과의 흡착이 자연스럽고도 구체적으로 결부될 때, 시인의 정신은 비로소 신선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의 심리는 더욱 느슨해져야 할 것이며, 그의 꿈은 ‘하강’의 몸짓으로 창공을 건너오는 공기와도 같이 대지의 뿌리 위로 흘러 넘쳐야 할 것입니다. 귓속말로 속삭이는 물질의 음성은 절망과 몰락의 음해 앞에서도 본질적으로는 썩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시인이 이것들의 위용과 친숙해지려는 꿈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정신은 물질의 비번(非番)입니다. 가령, 박찬일 시인의 발상법으로 말해서 베네치아의 그 ‘계단’이 ‘떠오르고’ 있었다면, 그것은 이미 아무런 계단도 아닌 물질의 그림자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물질의 그림자. 그렇습니다. 물질과 그 물질의 그림자에 대한 통찰이 좋은 시를 쓰게 되는 비결입니다. 그런데, 물질의 정각(正刻) 속에는 그림자가 없습니다. 정신의 정각 속에도 그림자가 없습니다. 물질의 편액(扁額). 제가 말씀드리고 있는 ‘상승’과 ‘하강’이란, 이 물질의 편액을 떼어내려는 방법론적인 서설입니다.

 

‘하강’을 쳐다보는 눈매. 앞에서 말씀드린 물질의 편액이란 그것들과의 접촉을 통해 얻은 정신의 응고(凝固), 즉 아둔한 필법으로 시인의 몽상과 상상력까지 구겨 놓은 위축(萎縮)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구습(舊習)이지요. 꿈 이야기 한 토막; 저는 물가에 나앉아 분문(糞門)을 씻고 있었지요. 어릴 적 물장구치며 놀던 그 냇물. 기분 좋은 찰라, 우지끈 뚝딱 영문도 모르는 번갯불이 별안간 물줄기를 찢고 지나갔습니다.󰡒아이고, 죽었구나.󰡓라고 느끼는 순간, 다른 음성이 또 들려 왔습니다.󰡒네 콩팥이 쪼그라들었을 것이다.󰡓 아닌게아니라 배꼽 가슴팍 어디랄 것도 없이 제 하복부는 깻묵처럼 오그라들어 있었지요. 깻묵을 쳐다보며 불현듯 눈을 떴습니다. 새벽 3시. 어둔 밤 창밖에는 마침 번개가 치고 빗방울이 사납게 내려꽂히고 있었지요. 이불잇으로 둘둘 말아 옥죄고 있던 가슴팍이며 하복부며 배꼽 부분을 그동안 번갯불이 핥고 지나갔던 것이지요. 보십시오. 물질과의 접촉. 무의식을 흔들고 지나가는 물질들의 타액(唾液). 착상은, 그러니까 물질의 후미를 만지고 돌아오는 비번인 셈이지요. 시인이 물질 위에 군림한다고요? 아닙니다. 그는 물질의 예하(隸下)에 있습니다. 이 점이야말로 그의 몸을 낮추고 또 낮출 수밖에 없는 겸손이랄 수 있으며, 그와 같은 당위는 마침내 물질의 타액을 씻어낸 다음 깨닫게 되는 황홀이랄 수 있습니다. 그의 인식의 촉매는, 그러므로 정신활동의 자족적인 과부하에 붙은 통념이 아닌 물상 하나하나의 지문(指紋)임에 분명합니다. 감정이입(empathy)이 아닙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물질이 시인을 지배합니다. 물질이 정신으로 들어가 무르녹는 아픔을 받아들일 때, 이때야말로 시적 표현의 한 매듭이 완성되는 순간입니다. 물질의 객체화가 깨지는 순간입니다. 그것은, 또한 시인의 문맥이 비로소 물질을 제압하는 순간이기도 하지요. 묻겠습니다; 시는 언제 태어나지요? 시인의 갱신을 주도한 물질의 그림자가 아무런 여한도 없이 소거되는 찰나입니다. 이때부터는 물질도 없고, 문맥도 없으며, 다만 시인 자신의 자존적(自尊的) 욕망인 지락(至樂)밖에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우이시 제17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