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유공희 선생님 / 구자흥
내가 만난 유공희 선생님
구 자 흥
유공희 선생님의 유고집을 발간한다는 소식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청소년들로 하여금 진정한 삶의 기쁨을 발견하기를 기대하시던 선생님의 사색의 편력을 더듬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틈틈이 써 온신 글들을 일일이 찾아 묶어 펴내는 일은 제법 번거롭기도 하고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이를 자청하신 임보 강홍기 님께 감사와 존경을 드린다.
선생님의 제자 중에는 우리 사회 향상을 위해 각 분야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하는 탁월한 인재들이 수없이 많다. 그래서 수많은 제자 중에 내가 추억담을 쓴다는 게 적절한 지에 대한 자신이 없어 망설이기도 했다. 나는 학교 성적도, 문재도 신통치 못하고 게다가 성격 또한 활달하지 못한 터라 단 한 번도 선생님으로부터 특별한 주목을 받지 못한 이를테면 열등한 제자 중의 하나이기에 애틋한 추억거리도 많지 않다.
그런데 이렇듯 만용을 부리는 것은 선생님께 사람답게 사는 법을 배웠다는 생각에서다. 물론 선생님께서는 삶의 가치나 방식에 대해 구체적으로 혹은 직접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으셨다. 그러나 수업 시간 중 적절한 방법으로 적절한 힌트를 주시곤 했다. 마치 한 개인의 일생을 좌우하는 것은 대학입시라는 사회적 분위기는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선생님께서는 오로지 공부만을 강조하던 다른 선생님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오히려 시험에 매달려 책 한 권, 음악 한 곡을 즐길 수 있는 여유라고는 전혀 없는 젊은이들의 처지를 안타까워하시는 조금은 특이한 존재였다.
21세기를 살아가는 능력이 상상력과 창의력이라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 역시 근자에 들어서야 공감하게 되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선생님께서는 일찍이 꿰뚫어보시고 독서를 통한 청소년들의 문화 감수성 훈련을 강조하셨는가 보다. 내가 미학과를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선생님 덕분이다. 미학이라는 말은 고2 국어 교과서에 실린 박용철의 「시적변용에 대하여」에서 처음 접했을 뿐, 미학에 대해 본격적으로 흥미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문학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다는 선생님의 한마디 설명에서 비롯되었다.
나는 시골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유학을 온 탓인지 아니면 세상 물정을 잘 모른 탓인지 어쨌든 출세나 명예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목표 의식이 모자랐던 것이지만. 그래서 치열한 경쟁은 늘 남의 일이었고 학교 도서관 문 닫을 때까지 소설책이나 읽고 동대문 헌 책방에서 이태준의 『문장강화』, 정지용의 『백록담』, 김안서 번역 『오뇌의 무도』 등을 발견하고 수집하는 게 커다란 즐거움이었다. 더욱이 고2 때 드라마센터에서 본 첫 연극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의 감동은 입시를 턱 앞에 둔 1월에도 명동 국립극장의 신춘 단막극 시리즈 5편을 모두 보게 만들었다.
입학 후 나는 연극반에 들어가면서 연극에 더욱 재미를 느껴 학창기간 내내 연극반 활동을 하다가 첫 직장인 극단 실험극장에 입단하여 이제껏 연극기획자로서 일생을 살고 있다. 그러나 연극인으로서 화려한 스파트를 받아본 적도 없다. 오늘의 나는 결코 성공한 인생의 모습이 아니다. 그런데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하고 싶은 일을 계속하는 것 자체를 행복하게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선생님의 교육철학의 성공모델의 하나가 아니냐고 우기고 싶다.
학창시절 중요한 시기에 선생님을 뵈올 수 있었던 것은 내게는 행운임에 틀림없다. 선생님은 올백으로 넘긴 헤어스타일도 멋있었지만 넉넉한 지적 축적과 탁월한 유머 센스 그리고 깊은 내공으로만 가능한 너그러움이 몸에 밴 분이셨다. 그리고 성적에만 매달리던 학생들에게 감성 훈련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진정한 교육 선각자이셨다.
선생님 정말 고맙습니다. 부디 편히 쉬십시오. (안산 문화예술의전당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