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보의 산문들/에세이

현대시 운율 필요없는가? / 임보

운수재 2008. 9. 17. 03:31

   

 

 

  현대시, 운율 필요 없는가?

 

 

      임 보(시인)

 

 

 요즈음 현대시에서 운율의 문제를 논의하면 마치 시류에 뒤진 사람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없지 않은 것 같다. 

자유시에서 무슨 운율을 문제 삼는단 말인가?

 

 과거에 시는 운문이었고, 운문은 곧 운율을 지닌 글이므로 시와 운율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었다. 

정형시의 틀은 운율을 담아낸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규제와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자유의지가 주창되는 근대에 이르러 시에서도 그런 움직임이 일었다. 

그것이 곧 자유시의 출발이다.

  정해진 틀 속에서는 시인의 자유로운 상상력을 제대로 담아내기 어렵다고 생각해서 정형시의 형식을 벗어나고자 했다. 

그래서 행의 배열을 자유자재로 하면서 일관된 운율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현대 시인들이 자유시는 운율을 필요로 하지 않는 시로 잘못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유시는 정형시가 지니고 있었던 천편일률의 일관된 고정 운율을 벗어나려 한 것이지 시에서의 운율 자체를 거부한 것은 아니다.

 

  한편 현대시에서 운율을 소홀히 하게 된 것은 주지적인 문학운동의 전개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20C 초 이미지즘이라는 지적인 시운동이 대두되면서 청각적 이미지보다는 시각적 이미지를 중요시 여기는 경향이 생겼다. 

그래서 음악성보다는 회화성에 치우치게 되어 상대적으로 운율에 대한 관심도 낮아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인 문학사조는 과학문명에 편승해서 일어난 한 시대의 경향에 불과한 것이다. 

어느 시대에나 공감되는 보편성을 지닌 것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다른 문학 장르와는 달리 시문학의 근본적인 특성은 서정성이므로 주지적 사관은 그 한계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정말 현대시에 운율이 필요 없는가? 운율 없이도 좋은 시를 만들어 낼 수 있는가?

  시에서 운율이라는 것은 율격과 압운을 함께 이르는 말인데, 이는 일상에서 우리가 리듬(rhythm, 율동)이라고 일컫는 음악적 요소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만상의 동적 구조는 율동이다. 미미한 생명체의 움직임에서부터 거대한 천체의 운행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의 모든 움직임은 율동적이다. 

심장의 박동, 호흡의 간격, 보행의 보폭, 주야의 반복, 달의 기울고 참, 사계의 변화 등이 다 그렇지 아니한가. 

그런 리듬에 대한 감각이 공간과 시간 인식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것이 곧 ‘길이 단위’나 ‘시간의 단위’의 개념이다.

 

  인간은 태어나기 전 태반에서부터 모체의 심장 박동을 들으며 자라났고, 또한 수만 년 동안 율동적인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온 조상들의 삶을 통해 선천적으로 리듬에 친숙한 동물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같은 내용의 언어라도 리듬에 실려 표현된 쪽이 보다 친근하고 효율적으로 와 닿는다. 

심청전을 읽을 때보다 심청가를 들을 때 더욱 감동적인 것은 바로 그 리듬의 힘 때문이다.

 

  지금까지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훌륭한 시 작품들은 다 아름다운 운율에 실려 있는 것들이다. 

소월이나 미당의 작품 가운데서도 세상의 사랑을 받고 있는 감동적인 작품들은 다 효율적인 운율에 의존하고 있다. 

리듬은 음악을 가장 감동적인 예술로 만들고, 운율은 시를 가장 감동적인 문학으로 남게 한다. 

운율은 시에 감동성을 유발시키는 원초적인 도구다.

 

  배행된 모든 문장은 운율의 구조를 벗어날 수 없다. 

아니, 산문조차도 운율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모든 문장은 보다 효율적인 운율을 지니고 있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시를 배행한다는 것은 운율을 설정하는 행위라고도 말할 수 있다. 

설령 어떤 시인이 전혀 운율을 염두에 두지 않고 배행을 했다하더라도 그 시행에는 운율이 따라붙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어느 시인이 작품을 쓸 때 운율로부터 자유롭다고 한다면 이는 운율에 무관심해서 방치한다는 뜻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의 작품이 정련되지 않은 너절한 운율을 담고 있어도 상관하지 않는다는 태도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현대시에 어떻게 운율을 실현한단 말인가?

  4음보의 전통 율격이나, 소위 7 ․ 5 조류의 율격을 어떻게 원용할 수 있으며, 새로운 율격 형태를 어떻게 시도할 것인가?

  전통적으로 압운이 빈약한 한국시에 어떻게 압운을 실현시킬 것인가?

  외형률에만 의존하지 않고 내재율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구사할 것인가?

  등등 앞으로 시인과 문학연구가들이 탐구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는 상태다. 

 

  운율은 시를 보다 시 되게 하는 요소이며, 독자의 심금을 울리는 무기다. 

보다 감동적인 시를 쓰고자 하는 시인이라면 운율을 외면할 수는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