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수재 2009. 1. 24. 09:45

 

 

 

                                 임보

 

 

 

솜털처럼 고운 눈이 한나절쯤 내렸을 때 세상은 온통 환희의 축복 속에 잠긴 듯했다.

앙상했던 마른 나뭇가지, 무딘 장독대, 거칠었던 지붕들이 흰꽃 너울을 쓰고

생명을 지닌 것들보다도 더 맑고 싱싱하게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어린 아이들은 개들과 뒹굴면서 눈사람을 만들고

평소 이지러져 있던 어른들의 얼굴도 해동의 햇살처럼 환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들끼리도 서로 눈인사를 주고받으며 즐겁게 거리를 오고갔다.

말하자면 지극히 가볍고 부드러운 하찮은 눈송이들이 겨우 몇 시간만에

이 세상을 천국의 문턱쯤으로 만들어 놓은 셈이었다.

 

그러나 솜털처럼 그렇게 고운 눈이 한 사나흘 내렸을 때 세상은 그렇게 즐겁지만은 않았다.

백년 묵은 푸른 소나무 가지들이 눈의 무게에 견디다 못하여 부러져 내리고 비닐하우스 지붕들이 주저앉았다.

도로가 막혀 차들이 움직이지 못하고 신문과 방송은 종일 눈의 횡포를 떠들어대고만 있었다.

어른들은 걱정스런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아이들을 방 속에 가둬 놓고 밖에 내놓질 않았다.

 

그런데 솜털처럼 고운 그 눈이 한 보름쯤 더 내렸을 때 세상은 마침내 눈의 지옥이 되고 말았다.

눈은 이 지상을 한 스무 자쯤 깊이 덮고 사람들은 두더지처럼 눈 속에 묻혀서 허둥댔다.

전원도 끊어지고 연료도 바닥이 나고 식량도 다 떨어져 버린 무덤처럼 어둡고 추운 방 속에 갇혀서

가끔 산계곡을 밀어 내리는 천둥보다 사나운 눈사태의 포효를 들으며 사람들은 눈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도 부드러운 눈이 이 세상에서 가장 무겁고,

그렇게도 하얀 눈이 이 세상을 가장 어둡게 하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드리고 사람들은 드디어 무릎을 꿇고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