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보의 산문들/수필

도원홍의도를 보며

운수재 2009. 5. 22. 06:59

 

 

 

도원홍의도(桃源紅衣圖)를 보며

                                                                                                        임 보

 

 

 

우거(寓居) 운수재(韻壽齋)의 식탁 내 자리의 맞은편 벽에 세로 반절 크기의 동양화 한 폭이 걸려 있다.

안개 속에 절벽이 솟구쳐 있는 심산유곡인데 온 계곡이 만발한 복숭아꽃으로 가득하다.

좌상(左上)에는 길게 폭포가 드리워져 있고, 그 폭포와 복숭아꽃을 밀치고 좌중(左中)에 거대한 반석이 하나 벋어 나와 있다.

그 반석의 가장자리쯤에 엄지 손마디 크기의 한 작은 인물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 그림의 대각선이 만나는 정 중앙이다.

다리를 포개고 단정히 앉아 있는 좌상(坐像)으로 검은 머리에 붉은 장삼을 걸쳤다. 곁에는 빈 바리가 하나 놓여 있고….

 

한창 젊었던 시절, 욕망의 회오리를 이기지 못해 시중을 떠돌며 지내던 때가 있었다.

수묵(水墨)의 힘을 빌어 혹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을까 하여 한 화실을 드나들었는데, 이 그림은 그때 그 화실의 주인이 내게 그려 준 것이다.

 

“이 인물이 바로 임보 형입니다!”

 

그림 속의 인물을 가리키며 내게 말하던 그의 목소리가 아직도 내 귀에 감돌고 있다.

무슨 생각으로 복사꽃 만발한 도원의 한가운데 붉은 옷을 입혀 나를 앉혀 놓았단 말인가.

운영실주인(雲影室主人)이라는 아호를 가진 그 화가는 나보다 몇 살 밑이었는데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소식이 묘연하다.

오늘 저녁 매실주 한잔 홀짝이며 이 그림을 한참 바라다보다가 문득 이름을 다노니, 「도원홍의도(桃源紅衣圖)」라 칭하기로 한다. 피안의 도원경이 참 그윽도 하다.

 

‘나’는 세상의 한중심이다.

지금 내 눈으로 보고, 내 귀로 듣고, 내 손으로 만지고 있는 이 세상은 나만의 것이다.

비록 같은 식탁에서 음식을 함께 나누고 있는 친구가 있다 할지라도, 그가 나처럼 보고, 듣고, 느낄 수는 없다. 그의 감각으로 인식하는 내용과 나의 것은 같지 않다.

만일 그가 내 맞은편 의자에 앉아 있다면 내가 바라보고 있는 시야와 그의 시야는 얼마나 다르겠는가.

같은 접시 안의 동일한 음식이라도 그의 젓갈이 집어간 것과 내가 집어온 것은 같지 않다.

어떤 것도 동일한 시간에 동일한 체험을 공유할 수는 없다. 어떤 존재도 같은 시간과 공간에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몇 사람이 둘러앉아 화병 속에 꽂힌 한 송이 장미를 바라보면서 서로는 같은 체험을 하고 있다고 믿기 쉽다.

그러나 동일한 꽃을 보고 있더라도 인식의 내용은 제 각기 다르다.

바라다보는 각도도 서로 다를 뿐만 아니라 바라다보는 주체의 성격이나 취향 그리고 정서 등이 한결 같지 않기 때문이다.

 

부부가 함께 며칠 낯선 고장에 여행을 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그들이 맞는 대상은 동일한 것들일지 모르지만 그들이 보고 느끼는 체험 내용은 결코 같을 수가 없다.

같은 시대 같은 사회에 몸담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같은 세상을 살고 있을 것이다’라는 판단은 커다란 오류다. 하물며 시대와 지리적 풍토가 다른 조건에서 산 사람들이 파악한 ‘세상’은 얼마나 서로 다르겠는가?

 

이 지상의 어느 누구도 나처럼 보고 듣고 느끼며 사는 사람은 없다.

내가 인식하고 있는 이 ‘세상’은 오직 나에게만 체험되는 유일무이한 절대적인 세계다.

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이 세상은 나로 말미암아 비롯되었다가 나와 더불어 닫힌다.

그러니 이 세상의 주인은 누구인가? 바로 ‘나’― 자신이다.

정승도 자기 세상의 주인이지만, 걸인 또한 자기 세상의 소중한 주인이다.

 

우리는 가끔 스승이나 선배들로부터 세상이 어떻다느니, 그러니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한다느니 하는 충고를 듣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깊이 따져보면 이러한 충고는 어쩌면 부질없는 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충고자 자신이 보고 겪어온 세상과 인생은 충고를 받는 사람이 겪고 있는 세상이나 인생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나의 왕국이며, 나는 이 왕국의 제왕이다. 따라서 내가 있는 곳이 이 세상의 한중심이다. 내가 움직이면 바로 세상이 움직인다.

 

도원홍의도의 한가운데에 자리한 홍의의 인물을 바라다보고 있노라면, 내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그런 생각을 떠올리게 된다.

이 그림을 그렸을 당시의 운영실 주인은 겨우 30대 초반이었는데, 이런 생각을 이 그림 속에 담아 방황하는 나를 붙잡아 주려 했던 것인가?

하기야 예수는 서른의 나이에 세상의 물정을 이미 다 깨달았고, 마야부인의 옆구리를 뚫고 나왔다는 석가는 태어나자마자 일곱 걸음을 걸은 뒤 좌우의 손으로 땅과 하늘을 가리키며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외쳤다지 않는가.

석가뿐만 아니라 우리는 다 ‘유아독존’,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유일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엣세이21, 2009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