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수재 2009. 5. 29. 04:59

 

 

 

시와 논리/                  임보

 

 

 

시는 논리적인 성격을 띤 글은 아니다.

정보나 지식을 전달하는 산문인 경우는 명확하고 논리적인 구조를 지닐수록 설득력을 가진다.

그러나 시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객관적인 정보나 지식이 아니라 화자의 주관적인 이미지나 정서적 양태이기 때문에 이를 명확하게 표현해 내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고도의 비유나 역설, 상징, 의인법 등에 의존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수사법들은 논리의 틀에 얽매이지 않는다.

 

‘내 마음은 마른 나뭇가지’라는 시구는 A=B의 은유구조인데 이는 논리적으로 설명되기 어려운 역설이다.

마음이 어떻게 나뭇가지란 말인가. 이는 거짓말이다.

그러나 외롭고 삭막하고 거친 마음을 겨울 하늘 찬바람에 흔들리는 마른 나뭇가지를 끌어다 비유했다면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을 찾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또한 어떤 시인이 ‘울고 있는 바위’라는 시구를 구사했다고 하자.

바위가 운다? 생명이 없는 바위가 운다고 표현한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시에서는 이러한 활유법이 화자의 감정을 사물에 실어 드러내는 자리에 즐겨 사용된다.

그래서 서양의 문학이론가들 가운데는 현대시의 구조를 놓고 역설이니 의사진술(擬似陳述)이니 하고 규정짓기도 한다.

 

시의 서술구조가 논리적인 규제를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시가 비논리적인 글이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시도 설득력을 가지려면 튼튼한 논리적 구조에 자리잡고 있어야 한다.

문법의 통제에 순응해야 되고, 상식과 보편을 존중해야 하며 가급적이면 합리적이어야 한다.

시의 서술에 비논리를 허용한 것은 어쩔 수 없는 경우에 한한 것이지 그것을 능사로 여겨서는 곤란하다.

 

시에서 비 논리성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유파가 소위 초현실주의와 무의미의 시들이라고 할 수 있다.

초현실주의자들이 지향하는 것은 심층심리의 사실적 묘사다.

말하자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아무런 여과도 없이 있는 그대로 복사해 보이려고 한다.

그런데 심층심리 곧 내면세계는 여러 가지 상념들로 복잡하게 뒤얽혀 있지 않은가.

거기는 어떤 시공적(時空的) 질서도, 윤리적 규제도, 논리도 없다.

또한 무의미의 시는 의도적으로 현실적 정황을 깨뜨리거나 이질적인 대상들을 폭력적으로 결합함으로써 비지상적 세계를 창조해 낸다.

거기에는 일상적 질서와 논리가 적극적으로 거부된다.

의미를 배제한 말장난쯤으로 시를 생각한다. 세계를 온통 부정하는 허무주의에 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초현실주의나 무의미의 시파들이 걷는 길은 시의 정도(正道)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정통적인 시에 대한 저항이며 이단에 지나지 않는다.

일시적인 유행이며 극단적인 실험 이상의 어떠한 의미도 부여할 수 없다.

만약 이러한 시들을 시의 전범으로 잘못 알고 이를 흉내내는 무리들이 많아진다면 이는 시단의 큰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시의 위의(威儀)를 무너뜨리고 마침내는 시를 파탄의 길로 이끌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시가 비논리적인 글이라는 견해를 이러한 비정통적인 시류들 때문에 갖게 되었다면 이는 극히 편협된 생각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일이다.

 

한편 시적 언술의 비 논리성을 잘못 받아들여 시를 논리적인 입장에서 파악하는 일을 거부하는 경향도 있는 것 같다.

말하자면 시론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태도다.

그러나 시가 비논리적인 글이기 때문에 시라는 장르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비 논리성을 함유하고 있는 시들을 대상으로 하여 논리적인 이론(시론)을 모색하는 일은 다른 분야에 비해 상대적으로 용이치 않을는지는 몰라도 미리부터 할 수 없는 일로 치부해 버리는 것은 자포자기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논리적인 이론을 세우기가 쉽지 않은 대상일수록 이를 이론화(학문화)하는 것이 보다 더 의미가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사실 논리를 필요로 한 대상은 비논리적인 것들일지 모른다.

논리적인 체계가 되어 있는 것들은 굳이 논리적으로 따질 필요가 없겠기 때문이다.

잡다하고 모호한 구조의 것일수록 논리적인 정리를 요하는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시문학 못지않게 개성적이고 창의적인 예술이라고 할 수 있는 미술이나 음악도 이론적인 체계를 갖추려고 노력해 왔다.

그 결과로 훌륭한 ‘화론’들과 ‘화성론’의 성과를 얻고 있지 않는가.

물론 시도 이들 못지않게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시론들을 탄생시켰다.

 

시가 아름다움을 구현해 내는 언어의 구조물이라면, 그 효율적인 미적 구조를 역대의 명시들을 토대로 해서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바도 아니다.

과거 우리 시사(詩史)에서는 시를 논리적으로 밝히는 일을 소홀히 했던 것처럼 보인다.

시평(詩評)이나 시화(詩話) 등의 글이 없는 바는 아니지만 논리적 진술이라기보다는 즉흥적인 감상에 머물고 있는 단편적인 글들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양에 있어서도 서구나 중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우리 시론의 빈곤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제부터라도 시를 학문의 대상으로 삼는 활발한 시학의 연찬이 절실히 요구되는 바이다.

더욱이 한국 현대시는 서구시나 한시(漢詩)와는 다른 한국 고유의 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 시에 합당한 시론의 정립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아니, 한국 현대시의 정체성을 수립하기 위해서도 우리의 실정에 맞는 새로운 시론들의 모색은 절실히 요구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