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보시집들/황소의 뿔

여주에 다녀와서

운수재 2009. 6. 3. 11:17

 

 

 

 

여주(驪州)에 다녀와서/                임보

 

 

 

지난 주말 여주에 가서

그릇 굽는 구경을 했다.

 

묽은 진흙을 밟고 밟아

숨을 죽인 다음

 

물레로 물레로 돌려

흙의 혼을 훑어 내고

 

항아리 그 새 형상을 빚어

천 도의 불에 태우고 태웠다.

 

그리고

인고(忍苦)의 그 영혼에서 태어난

백자 그 흰 빛을 보았다.

 

(무슨 영문인지 그 후 며칠 동안

영 마음이 내키지 않아

굶은 사람처럼 그렇게

허허롭게 빈둥거렸는데

오늘 아침 산을 오르다

드디어 그것을 알았다.)

 

천 년을 밟히고 밟힌

이 땅의 사람들이

어이해서 항아리를 즐겨 빚고

 

천 년을 태우고 태운

이 땅의 서민들이

어이해서 흰 옷을 입었는지,

 

그렇구나

인고의 불길이 뜨거울수록

굳은 도기가 태어나듯

 

오늘쯤 이 땅에

눈부신 명기(明器)들이 쏟아져 나와

인제는 세상을 울릴 만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