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보 시선

[스크랩] 임보 시집 <사슴의 머리에 뿔은 왜 달았는가> 에서

운수재 2009. 10. 8. 04:52

 

   임보 시집  

   사슴의 머리에 뿔은 왜 달았는가  

 

책머리에

 

시인들 역시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가 뿌리하고 있는

현실에 깊은 관심을 갖고 살아가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주어진 현실이 만족스러우면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작품을 쓰게되고, 주어진 현실이 불만스러우면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작품을 만들어내게 된다.

우리가 흔히 일컫는 저항문학이란 후자를 두고 이른 말이다.

 

이 시집에 수록된 작품들은 대개 현실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가지고 쓴 작품들이다. 물질문명에 대한 비판, 비이성적 체제에

대한 야유, 그릇된 인습에 대한 풍자 등을 담고 있다.

시도 세계를 비평하는 중요한 한 수단이다.

그러나 시적 비평은 직접적이지 않고 간접적인 데 그 묘미가

있다. 읽는 이들의 가슴속에 은근한 울림으로 가 닿기를 기대해

본다. 이 시집은 <시예술상> 수상 기념으로 출판된 것이다.

『미네르바』에 감사하는 말씀을 여기에 새겨 오래 남기고 싶다.

 

2002년 5월  청주에서  임 보 

 

 

  

 

우리들의 새 대통령 / 임보

 

 

수많은 경호원들을 대동하고 비상등을 번쩍이며 리무진으로

대로를 질주하는 대신 혼자서 조용히 자전거를 타고 한적한

골목길을 즐겨 오르내리는

 

맑은 명주 두루마기를 받쳐입고 낭랑히 연두교서를 읽기도

하고, 고운 마고자 차림으로 외국의 국빈들을 환하게 맞기도

하는

 

더러는 호텔이나 별장에 들었다가도 아무도 몰래 어느 소년

가장의 작은 골방을 찾아 하룻밤 묵어 가기도 하는

 

말많은 의회의 건물보다는 시민들의 문화관을 먼저 짓고,

우람한 경기장보다도 도서관을 더 크게 세우는

 

가난한 시인들의 시집도 즐겨 읽고, 가끔은 화랑에 나가

팔리지 않은 그림도 더러 사 주는

 

발명으로 세상을 밝히는 사람들, 좋은 상품으로 나라를

기름지게 하는 사람들의 모임에 나가서는 육자배기

한 가락쯤 신명나게 뽑아대기도 하는

 

정의로운 사람들에게는 양처럼 부드럽고 불의의 정상배

들에겐 범처럼 무서운

 

야당의 무리들마저 당수보다 당신을 더 흠모하고, 모든

종파의 신앙인들도 그들의 교주보다 당신을 더 받드는

 

정상들이 모이는 국제회의장에서는 어려운 관계의 수뇌들

까지도 서로 손을 맞잡게 하여 세계의 환호를 불러일으키는

 

어느 날 청와대의 콩크리트 담장들이 헐리고 개나리가

심어지자 세상의 담장이란 담장들은 다 따라 무너져

내리기도 하는

 

더 더욱 재미있는 것은

당신이 수제비를 좋아하자, 농부들이 다투어 밀을 재배하는

바람에 글쎄, 이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질 좋은 밀 생산국이

되기도 하는

 

어떠한 중대 담화나 긴급 유시가 없어도 지혜로워진

백성들이 정직과 근면으로 당신을 따르는

 

다스리지 않음으로 다스리는

자연과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그리고 아, 동강난 이 땅의 비원을 사랑으로 성취할

그러한 우리들의 새 대통령

 

당신은 지금 어디쯤 오고 있는가?

 

 

* 본문의 행을 편의 상 임의로 편집되었음을 공지합니다

 

 

 

 

내가 만일 임금이 된다면 / 임보 

 

임금은 역시 임금이고

통령은 역시 통령이야

총잽이든 칼잽이든

난 자는 난 자들이야

내가 만일 임금이 된다면

그 몸살 어이 견뎌 내리

경호실장은 누굴 시키며

안기부장은 누굴 줄 것인가

그 많은 문무백관들 자리

내 어이 다 알아

주었다 뺏었다 흔들어대리

이 놈이 이 말 하면 이런 것 같고

저 놈이 저 말 하면 저런 것 같은데

그 속에 겹겹이 숨은 뜻

내 어이 까뒤집어

콩은 콩

팥은 팥

어떻게 알리

앞집 뒷집 사돈네 팔촌들

대궐 마당 가득 떼로들 몰려와

이 사정 저 사정 쏟아 놓고 매달리면

내 무슨 수로 거절하리

돈쟁이 돈방맹이

말쟁이 말방맹이

뚝심쟁이 몸방맹이

꾀쟁이 꾀방맹이

억조창생 민주방맹이

동서남북

사시사철

기회만 보고 노리고 있는데

철갑 쓰고

복면 쓰고

내 어이 하룬들 답답해 살리

그런데 참 세상은 이상도 해

그렇게 귀찮은 임금 서로 허겄다고

박터지게 싸우는 걸 보면

나기는 난

기똥찬 분네들이야

역시 임금은 임금이고

통령은 역시 통령이야!

 

 

Camel Drivers Family Portrait

 

 

누가 고향을 사랑한다던가 / 임보 

 

말로는 고향을 떠들지만

진실로 고향을 아끼는 자는 없다

보라, 고향을 지키며 살아가는 놈이

그곳에 지금 몇이나 남아있는가?

눈이 일찍 트인 놈은

스물도 채 되기 전에 집을 떠나

이발소, 우동집 가리지 않고

팔도를 전전하며 굴러다니기도 하고

뱃보가 좀 큰 놈은

전답 팔아 짐 싸들고 서울로 기어올라

청량리, 왕십리 떠돌아다니다

다 꼬라박기도 하고, 더러는

몇 푼 벌어 사장으로 거들먹거리기도 하고

겁도 없는 녀석들은

불알 두 쪽만 차고

브라질로 엘에이로 혹은 벤쿠버로

어떻게 비비고들 건너가서

노랑머리 서양년 꿰차고

위스키 홀짝이며 살아가고 있지 않던가

보라, 지금 누가 고향에 남아

그 땅을 지키고 있는가?

있다면

그도 저도 못한 놈들이 홧김에

술만 퍼마시다 일찍 땅속에 들어

고향을 짊어지고 누워 있을 뿐이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역사를 믿는다고? / 임보

 

역사가 소중하다고 말한다

삼한 이전의 역사가 없어서

한국사를 못 쓴다고 아쉬워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분들을 만나면 눈물이 핑 돈다

그러나 애초부터 역사는 없다

역사의 이름으로 남아있는 것들은

지배자의 술수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왕들은 자기의 실록을 기록한

사관들의 팔목을 잘랐다

오늘의 역사도 다를 게 없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이 시대를 바르게 기록한다고?

청와대 비서실의 회의록이 정직하게 보존된다고?

아무리 정직하게 기록해도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신문도 방송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역사를 탓할 일도 아니고

역사를 믿을 것도 못 된다

작문을 하듯 새로운 역사를 자꾸 쓰면 된다

어차피 사실과는 거리가 먼 것이니까

어떻게 써댄들 상관 있겠는가

내 친구 하나는 역사학자가 되었는데

몇 해 동안 서른 권의 한국사를 다시 썼다

겪지도 않았던 시대를 어떻게 기록할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겪었던 놈들의 기록도 믿을 게 못 되는데 어려울 게 뭐 있느냐고 한다

역사를 믿는다고?

한 개인의 자서전도 믿을 것이 못 되거늘

하물며 역사를 믿는다고?

역사는 진실의 이름을 빌어 쓴 소설에 지나지 않는다.

 

 

 

Caged!!!

 

 

사슴의 머리에 왜 뿔을 달았는가 / 임보 

 

 

동물의 왕국이라는

텔레비전 영상을 보면서

 

수천 마리 사슴의 떼들이

몇 마리 사자놈들에게 쫓겨

도망치는 장면을 보면서

 

그처럼 화려한 사슴의 뿔들이

몇 개의 날카로운 사자들의 이빨 앞에

맥도 못 추고 허둥지둥 줄행랑을 치는 꼴을 보면서

 

세상에 저런 답답도 있나

걸음을 멈추어라 이 비겁한 뿔들아

돌아서서 너희들 그 천 개의 뿔로

발리케이트 발리케이트를 쌓아라

그러면 이빨보다 긴 너희들의 뿔이

이빨들의 배때기를 가를 수도 있으리라

 

하기야 어찌 네놈들만의 비겁일까 보냐

이 세상 인간들도 다 그렇구나

만 개의 주먹들이 한 개의 칼 앞에

무릎을 꿇는구나

역사에 기록된 저 수많은 왕조들은

곧 칼들의 상표

 

보라, 하나의 성곽을 받들고 있는

수천만 개 모가 잘린 돌들의 굴종을

꿇어앉은 주먹들의 표상을

 

저 선량한 초식동물 사슴에게

저 화려한 뿔들은 왜 달았는가.

 

 

 

 

 

세상의 모든 적들 / 임보

 

세상은 온통 적들로 가득하네

질주하는 자동차들 길마다 나를 가로막고

광란의 전파 전신들 밤낮으로

내 눈과 귀를 약탈해 가네

내가 들이키는 한 컵의 물 속에서도

창을 세워 달려드는 중금속

내가 마시는 한 방울의 공기 속에도

독수리의 발톱으로 헤적이는 아황산가스

이름도 모를 세금들 개처럼 물어뜯고

주린 늑대의 이웃들 두렵기 짝이 없네

날마다 쏟아져 나온 상품과 책들

컴퓨터가 또한 나를 궁지로 몰아붙이고

교회당도 내 멱살을 잡고 흔들어만 대네.

 

 

 

 

 

전기가 구세주다 / 임보

 

전기가 가면

모두가 끝난다

승강기가 멈추고

보일러가 끊기고

냉장고가 죽는다

P.C.도 작동하지 않아서

아니, 그보다도 어두워서

詩도 쓸 수 없다

전기가 지배하는 세상

전기에 매달린 목숨

전기가 생명이다

전기가 가면

아파트는 무덤이다.

 

 

 

The 9th wave

 

 

빈정대는 노래 2 / 임보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이 있다

여의도에 60층 빌딩이 솟아오르고

바다에 둑을 막아 육지를 만드는

아마 그런 것들을 두고 이름일레라

 

그런데 개미의 눈으로 보면

모래틈에 박힌 사람의 발자국도

한 그루 나무가 바람에 무너지는 것도

다 상전벽해요

천지개벽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몇 광년 떨어진 우주의 어느 곳에서

태양계를 관찰하는 어느 큰 눈이 있다면

설령 달이 뭉개지고 지구가 깨지는 경우라도

그저 눈곱을 떼내는 일처럼 그렇게

사소할 따름일 수도 있겠구나.

 

 

 

Next station- Other side

 

 

빈정대는 노래 5 - 유리눈 / 임보

 

유리로 눈을 만들다니

너무 작아 볼 수 없는 것들을 보려

현미경을 만들고

너무 멀어 볼 수 없는 것들을 보려

망원경을 만들다니

보여 주지 않으려는 것들을 훔쳐보려

유리눈을 만들다니

말보다 빨리 달리려고 바퀴를 만들고

새보다 높이 날려고 쇠의 날개를 만들다니

물로 불을 만들고

불로 물을 만들다니

인간들의 간교여

어둡고 어둡도다.

 

 

 

thoughts of a scientist in the evening

 

 

빈정대는 노래 6 - 경기장(競技場)에서 / 임보

 

 

달리는 자의 발을 거는

장애물 경기는 왜 하는가

 

성한 자의 눈을 감기고

더듬거리며 헤매게 하는

장님 경기는 왜 하는가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는 자들에게

목표물을 못 찾아 허둥거리는 자들에게

손뼉을 치며 웃어대는 관중들아

이 눈먼 비애의 관중들아,

 

생각하면

그대들이 달려온 세상의 길목도 장애물 천지

한 치의 눈앞도 헤아리지 못한 그대들 또한 장님

수천 번 넘어진 그대들의 무릎은 깨질 대로 깨지고

수만 번 찢어진 그대들의 가슴도 아물 날 없네

 

저 넓은 운동장에서

장애물 경기는 왜 하는가

저 밝은 햇살 아래서

장님 경기는 왜 하는가

 

우리들의 어두운 초상

그것으로 웃음을 만들어 내는

자학의 슬픈 경기

저 아이러니를

 

 

 

Sleeping girl and watermellons

 

 

작은 놈들의 세상 / 임보

 

 

장마철에 뜰에 내려섰더니

잡초들이 마당 가득 돋아나 있었다

호미를 들고 한 서너 시간 실갱이를 하다 지쳐

그만 들어오고 말았다

20여 평 마당에서 겨우 한 둬 평 뽑았을까

다음날 아침 마당에 내려가 보았더니

뽑힌 자리마다 송곳 같은 작은 싹들이

아우성을 치고 다시 돋아나고 있었다

 

차를 타고 강릉을 가다 창 밖을 보니

연도의 산들이 벌겋게 마르고 있었다

푸른 소나무 숲들이 불을 맞은 듯

수만 평씩 타 들어 가고 있었다

소나무혹벌레들이 잠식해 간다고 했다

1.5mm~2mm의 작은 벌레들이

온 산천을 홍수처럼 밀어 가고 있었다

 

약육강식(弱肉强食)

강한 자가 누구인가

힘은 몸뚱이의 크고 작음에 있지 않다

육척거구 씨름꾼 내 친구 한 놈은

젊은 날에 종기를 앓아 세상을 떴는데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균들과 힘을 겨루다

그들에게 넘어져 먹히고 만 것이다

 

천 년 묵은 아름드리 거목도

백수의 제왕 사자도

그들이 이 지상을 마지막 떠날 때는

저 여리고도 작은 생명체들에게 밟히어

저들의 먹이로 분배되고 마나니

신은 무슨 뜻으로

세상을 갖는 마지막 강자를

그렇게 작은 놈들로 세웠단 말인가.

 

 

 

Ostrich (Struthio camelus), Ngorongoro Crater

 

 

<닭똥> / 임보

 

 

<닭똥>이라는 국산 영화가 있다

이 작품이 처음 상영되었을 때

영화평론가들은 한결같이

허황된 환상이라고 내돌렸다

관중들도 덩달아 재미없다고 외면했다

 

다만

서울의 한 순진한 교사가

이 영화를 보고

먼 낙도의 외로운 초등학교로

짐을 싸들고 떠났다

 

<닭똥>을 만든 영화사는

죽을 쒔다고 투덜거렸다

주연급 배우들은

다음의 일거리를 못 얻어 울상이었고

감독은 소주를 마시며

고독을 달랬다

 

그런데

한 일 년쯤 지난 후

괴상한 일이 벌어졌다

베니스 비엔나레 영화제에서

<닭똥>에게 그랑쁘리를 씌웠다

 

이 뉴스가 온 세계 통신사들을

뒤흔들었을 때

세상은 하루아침에 달라졌다

극장들은 서로 <닭똥>을 차지하려고

아귀다툼을 벌였고

군중들은 <닭똥>을 보려고

새벽부터 장사진을 쳤다

 

그러자

평론가 양반들도 남뒤질세라

입에 침이 마르도록

<닭똥>의 모든 스탭들을 칭찬했다

 

감독은 여전히 소줏병을 기울이면서

<닭똥>들이나 먹어라고 중얼거렸다.

 

 

 

  Kristiansand Dyrepark

 

 

개미들의 반란 / 임보

 

 

저 거구의 사자를 무너뜨린 것은

그보다 몸집이 큰 하마나 코끼리가 아니라

그가 사냥터에서 얻은 조그만 상처

그 하찮은 상처에 상륙한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균들이다

 

인간들이 쌓아 놓은 화려한

이 지상의 불야성(不夜城)도

언젠가는 무너지리라

어느 외계인의 무서운 무기나

천재지변의 대지진이나 홍수 때문이 아니라

작은 미물들의 습격으로 넘어질는지 모른다

 

무서운 것들은

덩치가 큰 것들이 아니라 작은 것들이다

어느 날 눈에 잘 띄지도 않은 작은 불개미들이

한 마을을 습격했다고 치자

살충제를 아무리 퍼부어대도

죽은 놈들의 시체를 넘고 넘어 계속 밀려온다면

수억만의 침략군들이

우리들의 마당을 점령하고

우리들의 거실을 점령하고

우리들의 침실을 점령해 들어온다면

드디어는 콤퓨터의 틈새에 끼어들어 작동이 멈추고

기계란 기계, 도구란 도구들의 사이에 파고 들어

물어뜯기 시작한다면

사람들은 집과 터전을 버리고 도망쳐 가리라

 

한 마을이 먹히고

한 도시가 먹히고

한 나라가 먹히고

한 대륙이 먹히고

그렇게 해서 사람들은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다면

한동안 허공에 매달리거나

바닷물 속에 기어들어 잠시 버티다가

이 지상에서 추방당할 것이다.

그리고 인간들이 공들여 쌓아올린

화사한 맨션의 높은 창문마다엔

개미들의 붉은 깃발이 펄럭일 것이다

 

 

 

elephant

 

 

북 / 임보

 

 

내 장차 한 장 가죽으로 남으리 

햇볕에 잘 바랜 탱탱한 가죽 

천 년 묵은 오동 만나 북으로 살리 

기러기 울며 가는 캄캄한 밤 

적막강산에 주저앉은 한많은 고수(鼓手) 

그 북채에 부딪쳐 세상을 울리리 

둥당 둥당 둥다당 둥당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 휘모리 

천지간 떠돈 혼들 다 불러모아 

얼쑤 덜쑤 어덜쑤 도리깨춤도 추리.

 

 

 

Tune Of Life #2

 

 

젖통 / 임보 

 

1 

한 반세기 전만 해도

젊은 여인들의 가슴에 매달린 젖통은

하나의 그릇에 불과했다

갓난아이의 먹이가 담긴 천연의 밥통이었다

우리가 밥그릇을 부끄러워하지 않듯

물동이를 이고 간 여인들의 젖통은

짧은 적삼의 섶 밑을 비집고 나와

동아호박처럼 넌출대며 세상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선지

그것이 옷깃 속에 감추어지면서

아이들은 플라스틱 젖병을 빨기 시작하고

세상은 이상하게 부끄러워졌다

이제 젖통은 밥통의 기능을 잃었지만

은밀히 숨어서

세상을 지배하는 법통으로 군림한다

보라, 도시의 거리를 흔드는 저 법통들을

요즈음 젊은 여성들은

법통으로 말하고

법통으로 뭉갠다.

 

2 

남성들의 가슴에도 젖이 있다

두 개의 젖꼭지가 건포도처럼 매달려 있다

그것이 왜 거기에 있는가?

태초엔 남성들도 임신을 했거나

부양의 권능을 몸소 실천했다는 증거인가?

폐가의 허물어진 주춧돌을 보는 것처럼

남성의 가슴은 황량하다

가난한 집의 주저앉은 쌀자루처럼

남성의 가슴은 허전하다

패망의 상징―쭈그러진 두 개의 무덤

젖과 함께 남성들은 망했다. 

 

 

 

 

 

 

소요연행(逍遙戀行) / 임보 

 

젊은 날 내 수줍고 참 물정 몰라서

이루지 못한 사랑들 이제 다 해 보고 싶네

그것도 세계적으로 화끈히 해 보고 싶네

 

기모노 차림의 다소곳한 일본 여인도 괜찮으리

그녀 다다미방에 드러누워 차도 마시다

샤미탱도 뜯다 하며 며칠 뒹굴어도 삼삼하리

 

핫팬티의 싱그러운 캘리포니아년도 무방하리

무개차로 해변을 달리며 탄탄한 무릎에 기대

홀짝이는 위스키도 황홀하게 화끈거리리

 

눈처럼 흰 백러시아 소녀도 사랑스러우리

배치카에 장작불 지펴 놓고 사슴 고기 구워 가며

겨울 밤 창 밖의 눈, 보드카의 맛도 향그로우리

 

알라스카 에스키모 처녀도 감칠맛 나리

순록이 끄는 썰매를 타고 곰 가죽 북 두드리며

함께 백야의 설원을 누비는 멋도 기똥차리

 

눈 큰 아라비아 여인 그와의 밀애(密愛)도 달콤하리

차도르에 덮인 몸 달빛 아래 열어 놓고

사막에 누우면 하늘의 별들도 눈부시리

 

타이티의 가슴 큰 여인 고갱의 여자들도 찾으리

홍옥처럼 윤기 흐른 검붉은 피부

비취 바다 물결에 야자수 그늘도 어지러우리

 

스페인의 열정적인 춤, 스웨덴의 우수 어린 눈

남미의 인디오, 중국의 귀여운 꾸냥들도 놓지지 않으리

허지만 게르만의 몸집 큰 여인들도 사양하진 않으리.

 

 

 

 

 

바이러스가 뜬다는 날이면 / 임보 

 

바이러스가 뜬다는 날이면

내 컴퓨터는 닫친다

백신도 치료제도 모르는 나는

속수무책

내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는

몇 편의 시가 날아갈까 봐

기다린다

 

수십 편의 내 시들

다 달아 보아야

몇 근의 고기 값도 채 안 되는 그것을

신주단지처럼 모시고 나는

이 세상을 살아간다

 

생각하면 이 몸뚱이 깨지고 부셔져서

그 본연의 모습이 없다

한평생 내 얼마나 많은 바이러스에 시달려 왔던가.

내 인생에도 백신은 없었다

 

바이러스가 뜬다는 날이면

나는 이제 시도 쓸 수 없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바보 이력서 / 임보

 

 

친구들은 명예와 돈을 미리 내다보고

법과대학에 들어가려 혈안일 때에

 

나는 영원과 아름다움을 꿈꾸며

어리석게 문과대학을 지원했다

 

남들은 명문세가를 좇아 배우자를 물색하고 있을 때

나는 가난한 집안에서 어렵게 자란 현모양처를 구했다

 

이웃들은 새로운 터전을 찾아 강을 넘어 남으로 갔을 때

나는 산을 떨치지 못해 추운 북녘에서 반평생을 보냈다

 

사람들은 땅을 사서 값진 과목들을 심을 때

나는 책을 사서 몇 줄의 시를 썼다

 

세상을 보는 내 눈은 항상 더디고

사물을 향한 내 예감은 늘 빗나갔다

 

그래서 한평생 내가 누린 건 무명과 빈곤이지만

그래서 또한 내가 얻은 건 자유와 평온이다. 

 

 

임보 시인

카페    <자연과 시의 이웃들> http://cafe.daum.net/rimpoet

블로그 <시인의 별장> http://blog.daum.net/rimpoet

  

 

출처 : 자연과 시의 이웃들
글쓴이 : 동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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