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보 시선

[스크랩] 임보 시집 <자연학교>에서 3

운수재 2009. 10. 14.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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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보 시인  

   시집  < 자연학교 >  에서

 

 

 

 

바람들의 길임보 

 

언덕 위에 서면 바람들의 길이 보였다

바람들도 빛깔이 있었다

투명하지만 색유리처럼 맑고 깨끗한 빛깔이었다

감귤 밭을 넘어온 남풍은 노오란 빛

전나무 숲 속을 빠져나온 북풍은 청록빛

쪽빛 바다를 밟고 온 서풍은 남빛이었다

바람들은 들판에서 서로 만나 오색 실타래들이 꼬이듯 몸을

비비며 돌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떤 바람의 실가닥은 풀리어 초가집 사립문 틈으로

슬며시 스며들기도 하고

어떤 가닥은 잠자는 송아지 코 속으로 조용히 빨려들기도 했다

문득 꺽꺽꺽 장끼 한 마리 숲을 깨고 솟아오르자

황·록·청·백·홍 오색 바람들이 소용돌이치며 몰려와 눈부신

날개를 허공에 만들었다

주위를 가만히 살펴보았더니 이 어찌된 일인가

감귤 밭을 향해서는 다시 황색 바람이

쪽빛 바다쪽으론 다시 남색 바람이

전나무 숲으론 다시 청록색 바람들이

떼를 지어 달려가고 있었다.

 

 

 

 

지상의 하루임보

우리가 여기 오기 위해

몇 억만 년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는가

우리가 여기 이렇게 서기 위해

몇 억만의 우리 조상들 몸을 빌어

그렇게 숨어 흘러내려 왔는가

아 우리가 바로 이런 우리이기 위해

이 손과 발

이 가슴과 머리

바로 이러한 우리이기 위해

끝도 없는 저 우주로부터

무량의 빛과 구름을 모아

이 육신을 그렇게 빚었거니

오늘의 이 청명한 지상의 일기

산과 바다 저 찬란한 자연의 풍광

천둥과 바람 저 감미로운 자연의 운율

이보다 더 고운 낙원이 어디 또 있겠는가

천국을 팔아 지상을 더럽히는 어리석은 자들아

혹 그대 오늘의 삶이 그렇게 고되고 괴로움은

그대의 헛된 욕망과 미망 때문일 뿐

눈부신 이 지상의 하루

몇 억만 년만의 황홀이거니

깨어있는 눈으로 세상을 다시 보면

그대의 집 뜰이 낙원의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음을

비로소 눈물겹게 맞게 되리니

 

 

 

 

속리산시(俗離山詩) / 임보

 

법주사(法住寺) 해우소(解憂所)는 하두 깊어서
일을 다 보고
골마리를 여며 매고
문을 닫고 나온 뒤에사
덤벙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고
동자승이 말하자

이가 다 빠진 노(老)스님 웃으며 거들기를
네것은 유도 아니다
내것으로 말하면
새벽에 내놓은 놈이
하루 종일 내리다가
해가 질 무렵에사 첨벙 하고
떨어진다고 한다

두 노소(老少)의 얘기를 엿듣고 있던 부처도
이들 틈에 끼어든다
네놈들 것은 유도 아니다
내것으로 말하면
절 짓기 전에 내놓았던 것이
아직도 다 떨어지지 않고 내려만 가는데
날이 궂을 때는 번개소리도 내고
달이 밝을 때는 소쩍새로도 치는 것을
아마 보지 않았느냐?
보았제야?

 

 

 

 

그릇 / 임보

 

그는 맑고 투명하기가 유리와 같다
그 명랑의 즐거움이여! 그러나
깨어지기 쉬워 늘 불안하다 

 

그는 굳고 깨끗하기가 사기와 같다
그 순결의 고움이여! 그러나
너무 차가워 붙일 맛이 없다 

 

그는 무겁고 튼튼하기가 청동과 같다
그 불변의 중후함이여! 그러나
너무 과묵해서 부담스럽다 

 

그는 거칠고 투박하기가 토기와 같다 

그 소탈의 편안함이여! 그래서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즐겨 부리고 쓴다.

 

 

 

 

풍란(風蘭) / 임보 

 

흙 버리고 

물 버리고 

모진 바닷바람
 

굳은 절벽 바위틈에 

뿌리박고 사는 그놈
 

그놈 참 

사람 기죽이네.

 

 

 

 

별 / 임보

 

어둠을 탓하지 말라 

모든 빛나는 것들은  

어둠의 어깨를 짚고 

비로소 일어선다 

어둠이 깊을수록 

별들이 더 반짝이듯 

그렇게  

한 시대의 별들도 

어둠의 수렁에서 솟아오른다.

 

 

 

 

무위이화(無爲而化) / 임보

 

숨어사는 자들은 그를 보고 물이 든 사람이라는 비난이고

드러나 사는 자들은 그를 보고 우유부단(優柔不斷)이라는 불평이다

부르면 세상에 나가 일을 하고 놓아두면 돌아와 밭에 선다

그가 터를 잡아 사는 곳도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산도 들도 아닌 어정쩡한 곳에서 집도 절도 아닌 그런 지붕 하나

덮고 지낸다

더러 옛날의 친구들이 찾아와 왜 이런 곳에 사느냐 물으면

소이부답(笑而不答)이다

얼보면 싱거운 것 같은데 보통 사람들이 그를 좋아한다

우선 그의 곁에 있으면 편하다

근엄으로 위압을 부리지도 않고

어려운 말들을 풀어 마음을 무겁게 하지도 않는다

즐겨 웃으나 말수가 적다

그러나 상하귀천 없이 편히 어울려 술이 있으면 술을 따라 하고

노래가 있으면 노래를 따라 한다

그런데 그의 곁에 잠시 머물다 간 자들은 이상하게도 사람이

달라진다

자주 웃고 말이 줄어들며 사이에 끼면 부드러워진다

그가 도대체 어떻게 가르치기에 세상을 그렇게 돌려놓는단 말인가

어느 선인(先人)은 일찍이 이를 일러 무위이화(無爲而化)라고 했다.

 

 

 

 

편지 / 임보

 

겨울 매운 바람이

나뭇가지에 매달린 마른 잎들을 찢어

허공에 흩고 있는 광경을 보았는가

어느 날 우리의 육신도

그렇게 헤어져 돌아가리니

이 육신 섬광처럼 짧고 빛나는 머묾이여

이 손바닥에 뜨거운 편지를 새기리라

영혼의 불꽃으로 깊이 새겨

허공에 띄우리라

한 억 년쯤 산하를 떠돌고 떠돌다

드디어 어느 골짝에서 다시 만나게 될

그대 수신자 나의 발이여

--------------가슴이여

--------------등뼈여

우리는 서로 알아볼 수 있을까

우리는 한때의 형제였었다고

영혼의 불꽃에 몸을 비비며

서로 붙들고 울먹일 수 있을까.

 

 

 

 

회향(回鄕) / 임보

 

눈을 감고 가도

어둠에 그냥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연어가

눈에 담아 두지도 않았던

그의 고향 길을

몸으로 거슬러 오르듯

우리도 그렇게

고향에 되돌아간다.

 

 

 

 

어때? / 임보


옥이 묻히면 어때?

햇볕에 드러나

세상의 손에 쥐어지지 않고

그냥 묻히면 어때?

옥은 옥인데

산사태로 천 길 땅 속에

더 묻히면 어때?

홀로 사는 자의 즐거움을

아는 이 없음을

쓸쓸해해서 무엇해?

천지 땅 속에 묻힌 옥들

억수로 많은데

그들과 함께

등대고 누우면 어때?

 

 

   

 

 

홀로 가는 사람아 / 임보

 

꽃보다 더 고운 꽃으로

꽃을 피워

그대를 녹이고저

불보다 더 매운 불로

불을 질러

그대를 태우고저

동짓달 그믐밤 바람 속에

홀로 가는 사람아!

 

 

 

임보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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