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임보 시집 <가시연꽃> 에서 5
임보 시인
시집 < 가시연꽃 >
해변의 순교자들 / 임보
내장도 눈깔도 다 빼앗기고
바람과 햇볕에 몸을 내맡긴
일사불란한 저 순백의 순교
덕장에 매달린 오징어 떼
* 덕장에 매달린 수만 마리의 오징어 떼들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인간들이 저지른 이 만행의 업보를 장차 어찌한단 말인가.
월인月印 / 임보
도동(道洞)*의 바닷가 적벽
만월은 떠 창해에 찍히고
굴껍데기에 술을 퍼
밤새워 파도를 마신다
* 도동은 울릉도에 있는 한 포구의 이름이다.
길상사 느티나무의 말 / 임보
어제는
거문고 가락이더니
오늘은
웬 목탁 소리인고?
* 성북동 골짝에 <길상사(吉祥寺)>라는 절이 새로 세워졌다.
유명한 요정 <대원각(大元閣)>이 있던 자리다.
그 집의 여주인이 어느 스님에게 바친 것을 절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경내에 수백 년 묵은 아름드리 느티나무들이
즐비히 서 있는데 그들의 몸통엔 몇 십 년 들어온 거문고
가락이 스며 있을 것만 같다.
우리들의 생애 / 임보
가을 한나절 햇볕같이
은사시 가지 흔들며 지나가는 바람같이
주전자에 잠시 끓었다 식은 맹물같이
풀잎에 매달린 달팽이같이
* 인간의 한평생을 길게 잡아 백 년이라고 해도
덧없기는 마찬가지다.
홍안소년으로 볼이 붉던 때가 어제 같은데
이 무슨 봉두난발(蓬頭亂髮)이란 말인가.
병病 1 / 임보
거 뉘신가?
내 육신에 몰래 스며들어 집 짓는 자
내 뼈를 뽑아 서까래를 엮고
내 살을 이겨 벽을 바르나 보다.
* 육신의 아픔으로 잠들지 못하는 밤은 참 길기도 하다.
때로는 대패로 밀고 망치로 못을 치는 것도 같다.
이빨 / 임보
모기가 사장을 물자
사장이 부장을 물고
부장이 과장을 물자
과장이 사원을 물고
* 에너지 불변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하나의 요인은 결과를 낳고 그 결과는 새로운 요인이
되어 또 다른 결과를 만들어 간다. 마치 물결처럼
끝없이 번져 간다. 세상은 수많은 물결들이 뒤엉킨
그물과도 같다.
정치 / 임보
정의는 지배자의 통치수단이요
법률은 권력자의 보호막이다
우중을 잠재우는 민주주의여
세상은 언제나 힘이 다스린다
* 이 지상에 민주주의는 이상일 뿐 존재하지 않는다.
도대체 민중을 대변하는 정치가가 어디 있단 말인가?
‘정의’라는 것도 ‘법률’이라는 것도 늘 힘 있는 자의
편에서만 그 기능을 발휘한다.
시詩 바겐세일 / 임보
이백만 원 들여 여행을 하고
시(詩) 다섯 편 얻었으니
한 편에 원가가 40만원이다
세일이다! 누구 살 사람 없나?
* 99년 여름 아내와 함께 모처럼 여행을 했다.
벤쿠버로부터 토론토까지 일주일 동안 거대한 대륙을 횡단했다.
그리고 얻은 건 팔리지 않는 다섯 편의 시밖에 없다.
재미있는 세상 / 임보
병이 없으면 의사는 망하고
죄가 없으면 검사도 망한다
화재 때문에 소방서는 살고
해커들 덕분에 백신이 팔린다
* 악(惡)이 나쁘다고? 세상이 무너지지 않고 이렇게
잘 버티고 있는 것은 역기능의 상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선악(善惡)은 인간의 시점에서 보는 판단이지
절대적 시점에서는 좋고 나쁨이 따로 있지 않다.
상 도적 / 임보
세상에서 가장 큰 도적은 어떤 놈인가?
백주에 은행을 턴 날강도인가?
하루아침에 나라를 삼킨 혁명도당인가?
아니, 온 세상 뒤엎으려는 저 해탈승일세.
* 강도는 겨우 금고 속의 금은보화나 훔치는 족속
이지만, 혁명도당은 한 나라를 집어삼키니 도적
치고는 상 도적이라 이를 만하다. 그러나 진짜로
큰 도적놈은 온 세상을 통째로 집어삼키는 자다.
해탈(解脫)은 벗어남이 아니라 먹어치움이다.
상습 지각생 / 임보
30 때는 20 생각
50 때는 30 생각
환갑에 들어서도
내 동갑 못 따르네.
* 나는 늘 내 동갑쟁이들의 생각을 따라가지 못한다.
그러니 세상살이에 매양 뒤쳐질 수밖에 없다.
임보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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