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보 시 해설

[스크랩] 「견자 le voyant, 타이티 섬을 넘나들다」- 임 보 시집 『아내의 전성시대』(시학, 2012)│ 홍예영

운수재 2012. 9. 3. 06:35

■서평

 

 

 

 견자 le voyant, 타이티 섬을 넘나들다

 - 임 보 시집 『아내의 전성시대』(시학, 2012)

   

 

   홍 예 영 (시인)

 

 

 

  시인이 살아가는 장소, 그곳은 시인의 상상력을 발휘하게 하는 중요한 출발점이다. 시집 『아내의 전성시대』는 폴 고갱이 만년에 많은 작품을 생산하며 살았던 타이티 섬에서 시작된다. 시인은 원시와 현대가 공존하는 장소에 기초를 두고 안과 밖을 묘사하고 있다.

 

N형,

자네의 댁내는 다 평안하신가?

나는 요즈음 몸살이네

애들은 다 아파트로 떠나가고

찾아오는 사람도 없는 적막한 집

나는 대낮부터 매실주 홀짝이며 앉아 있고

늙은 아내는 웃통을 벗어젖힌 채

빨래며 청소를 하네

고갱의 바다는 아니지만

여기는 문득 타이티 섬

세탁기며

청소기가 요란하게 돌아가는

적막한 타이티 섬

                            -「적막한 타이티 섬」 전문

 

  책의 머리에 나오는 이 시는 시작품의 전체를 재구성해 볼 수 있게 하는 몇 가지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순서를 정해보자면 첫 번째 대상이 웃통을 벗어젖힌 아내다. 아내는 친숙함의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가 아내와 주인공의 귀를 요란하게 파고드는 소리다. 청소기와 세탁기로 표현되는 전기제품은 적막한 타이티를 흔들며 21세기인 바깥과 연결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적막한 집은 알고 보면 원시와 현대가 공존하는 장소다. 세 번째가 주인공이다. 특이하게 매실주를 홀짝이고 있는데 이 모습이 시집 여기저기 배치되어 있음으로 시집은 긴장과 느림의 탄력을 알게 모르게 얻어낸다.

 

  1. 늙은 아내, 낯설지 않은 것들의 대명사

 

  시인은 고갱의 화폭에서나 만날 수 있는 ‘웃통을 벗은’ 여인과 살고 있다. 여기서 주의할 언어는 아내 앞에 붙어 있는 늙은, 이라는 형용사다. 늙음은 이 시집에서 친밀한 것, 낯설지 않은 것을 뜻한다. 시인은 고갱처럼 타이티 섬의 풍경을 가장 가까이에서부터 화폭에 담는다. 아내는 화장실 문도 갑갑해서 열어두고 일을 보며, 주어가 없는 말씀을 하시는 해탈한 여장부다. 그녀는 앉은키만 보고 시인을 골라 평생 키 타령을 하며(「키 타령」), 자신에게 실수를 거듭하여도 평생 한 미장원만을 고집하여 주인공의 미래를 안심시키는 무던한 성품을 지녔다(「미선미장원」). 또한 그녀는 운전대를 잡아 본 적이 없는 무사고 운전사이며, 노인을 대표한 노인대학 학장님(「학장님, 우리들의 학장님)이다. 그녀는 젊은 시절 키가 큰 법대생이 따라다녔단 말을 눈치 없이 반복하여 주인공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장본인이기도 하다(「아내의 전성시대」).

  아내에 관계되는 시들은 읽고 있는 독자에게 웃음을 선사한다. 시인이 친숙함에 사랑을 넘치도록 붓다가 한 마디씩 재치를 더하여 꼬집기 때문이다. 오래되고 친숙하여 시인의 사랑을 받는 상징물로는 숭례문이나 세종대왕, 커피, 명태, 황사, 보구치 등을 들 수 있다.

  시인은 시를 통해 친밀해진 아내와 같은 독자에게 크고 원대한 계명을 내리기도 한다. 가령 아메리카 대륙을 점령하고 싶을 때는 ‘아메리카로 건너가서/ 열 명의 자녀를 낳아 기른 다음/ 그 자녀들에게 또 열 명씩의 자손을 낳게 하고/ 그 자손들에게 또 열 명씩의 자손을 낳게 하라’고 권한다. 그러면 10세대가 지난 300년 후가 되고 대통령을 만들 수도 있다는 (「아메리카 대륙을 점령하는 비법」) 내용이다.

  이 계명은 불행하게도 10세대가 지나야 하기 때문에 선택의 권한은 독자에게 있다 하겠다. 그러나 시인의 권유를 신중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가까운 사람이 음식을 준비하여 간을 보라 하면 음식이 짜던 싱겁던 ‘음, 마침 맞구먼, 맛있네!’ 라고 하지 않아 불편했었다는 시인의 진실을 접할 때 더욱 그렇다.

 

아내는 새로운 음식을 만들 때마다

내 앞에 가져와 한 숟갈 내밀며 간을 보라 한다

그러면

“음, 마침 맞구먼, 맛있네!”

이것이 요즈음 내가 터득한 정답이다

 

물론, 때로는

좀 간간하기도 하고

좀 싱겁기도 할 때가 없지 않지만-

                        -「마누라 음식 간 보기」 부분

 

  누군가가 당신을 사랑하여 정성을 쏟아 음식을 준비했다면 그것이 자기의 취향과 상관이 없어도 ‘음, 좋아, 고맙네!’라는 긍정은 빠를수록 좋을 듯하다. 그런 연유로 독자를 사랑하는 시인이 권하는「아메리카 대륙을 점령하는 비법」역시 긍정적인 검토가 정답으로 보인다. ‘음, 좋아, 해볼 만 하군!’이라는 답변만이 후회를 면할 것이 분명해 보인다.

 

헌 양은 접시마냥 쭈그러들고

색깔도 많이 바래 볼품없네

게다가 부드러운 맛 다 가시고

갈수록 시끄럽기만 하네

하지만 더 부서지지 않길 바라고

아직도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것은

덜 열린 그 속이 평생 궁금하고

그네 옆자리가 그래도 무던하기 때문

                                            -「할멈」 부분

 

  ‘쭈그러들고’ ‘색깔도 볼품없는’ 아내에 대한 풍자는 시인의 사랑이 바탕이다. ‘더 부서지지 않길 바라고/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대상은 확장된다. ‘쭈그러들고’ ‘색깔도 볼품없는’ 대상이 있는 장소마다 시인은 풍자를 배치하고 있다.

  ‘온전한 사람들의 내외는 다 결손 부부’(「완전한 부부」)에서 부부의 진정한 의미를 돌아보게 하고, ‘우리나라 좋은 나라 커피 먹고 노는 나라’(「커피 타령」)에서는 커피에 대한 지나친 기호를 꼬집고 있다. 시인은 ‘휴대폰이 발산한 전자파들이 벌들의 방향 기능을 마비’(「휴대폰」)시키고 마침내 ‘사람의 마을’을 폐허로 만들고 있음에 경고음을 배치한다. 이러한 시들 모두 풍자를 통해 독자에게 웃으면서 생각하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오랜 동안 더불어 살아온 시인에게는 아내 같은 대상으로는 무엇보다 ‘시’를 빼놓을 수 없다. 그런데 그 ‘시’가 미쳐 ‘땅벌처럼’ 달려든다. ‘떫고, 껄끄럽고, 시끄럽고, 시커멓다’고 한다. 그 시들이 마침내 ‘잉잉거리며 달려와 머리에 가슴에 어둠을 박고 죽는다(「미친 시들」)’고 한다. 시를 사랑하는 독자라면 미친 시의 종말에 대해 생각을 나누어야 할 것이다.

  오래된 숭례문 역시 ‘늙은 아내’같은 대상이다. 독자는 ‘어쩌면 스스로 분신焚身했는지도 모른다’는 지적에 가던 속도를 멈추었을 것이다. 우리 곁을 오랜 동안 지키던 숭례문이 ‘햄버거 콜라가 식탁을 지배하고, 양복에 넥타이가 우리의 목을 졸라매고, 서풍의 격랑 속에 정신을 잃고 허둥대서’(「숭례문이여, 부끄러워라!」) 그런 세태가 안타까워 분신했다는데, 지금의 위치를 점검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문 밖의 세상이 뒤뚱거린다. 그 이유가 ‘본인의 사후 9세손까지 쓸 수 있는’ 다시 말해 ‘63빌딩의 높이만큼 쌓을 수 있는’(「조兆」) 돈의 부피가 몇 군데에 몰려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누구나 사후 9세손을 염려하는 재벌의 어리석음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그러나 다시 자기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웃음을 멈춰야 할 것이다. 이 시를 읽는 우리들 역시 사후 보이지 않을 몇 세손을 위해 때로 무엇인가를 준비하느라 지구를 기우뚱거리게 하지는 않은가 하고.

  시 「매미와 차」역시 타이티 섬 바깥세상 이야기다. 한여름에 매미들이 ‘맴 맴 맴’ ‘앵 앵 앵’ ‘쏴 쏴 쏴’ 등으로 뭉개고 있는데, 가만히 들어보니 인간도 차를 운전하며 매미와 다를 바가 없이 소리를 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큰 차, 작은 차를 타고 속도 싸움을 하느라 ‘맴맴거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적은 작가가 미물이나 빈부의 차를 가진 사람이나 똑같은 관점에서 볼 수 있는 위치에 있음을 보인다.

  이것은 21세기를 바라보는 시인의 적정처가 타이티 섬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적막한 집, 타이티는 모든 살려고 버둥대는 생명들을 멀리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공간임이 분명하다.

 

차가 달린다

고속도로 위를 차들이 신나게 달려간다

소나타가 100으로 달리자

SM이 110으로 따라 잡는다

그랜저가 120을 뽑아 대자

BMW가 140으로 기를 죽인다

그러자 티코며 다마스며 똥차들도 뒤뚱거리며

140을 좆이 빠져라 쫓아간다

속도위반

차선위반

경적을 울리고

전조등을 껌벅거리고 난리들이다

이윽고 백차와 앰뷸런스가

앵앵거리며 달려간다

                               -「매미와 차」 부분

 

  낡고 오래된 것들을 담은 화폭을 따라간다. 가볍게 꼬집고 있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가 군데군데 놓여 있다. 독자는 깨지고, 부서지며, 흘리는 눈물을 읽어내야 할 것이다.

 

  2. 낮은 하늘, 방울방울 눈물 흘리다

 

콘크리트 전주와 전주 사이 팽팽한 전깃줄 몇 가닥이

허공을 가르고 질주합니다

 

그 밑에 비스듬히 기운 전신주와 전신주 사이 낮은 공간을

대 여섯 개의 꼬인 전선들이 출렁거리며 달려갑니다

 

잘린 은행나무 중턱과 플라타너스 우듬지 사이를

두툼한 케이블들이 축 늘어져 갑니다

 

선들은 도시를 밝히는 불의 길, 빛과 소리의 통로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길을 내면서 하늘이 온통

만신창이 조각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이 깨진 금들 사이에 낮은 구름이 걸리기도 하고

새들의 다리가 끼여 날개를 퍼덕이기도 합니다

 

가끔은 떠오르던 보름달도 잠시 얹혀 머뭇거리고

바람이 불면 금 간 하늘이 삐거덕삐거덕 움직입니다

 

비가 오면 금들 사이에 빗방울이 스며 나오는데

방울방울 맺혔다 떨어지는 것이 꼭 눈물 같습니다

                                            -「내 집의 낮은 하늘」 부분

 

  글의 시작에서 인용한 시 「적막한 타이티 섬」에서 요란한 소리로 공간을 흔드는 청소기와 세탁기를 언급했었다. 이러한 21세기 물건이 돌아가게 하기 위해 대문 바깥에는 전신주들이 ‘비스듬히 기울고’ 있다. 그 사이에 걸린 전깃줄은 ‘팽팽하게 허공을 가르고 질주하고’ 그 밑 낮은 공간에서도 대 여섯 개의 전선이 출렁거린다. 그런데 꼬여 있다. 불의 길, 빛과 소리의 통로는 꼬여서, 하늘을 ‘만신창이 조각’을 내고 있다.

  시인은 대문 밖에서 가장 먼저 전달하는 풍경에 귀를 기울인다. 자세히 들으니 그 금간 하늘에서 ‘삐거덕삐거덕’ 소리가 나고, 빗방울이 스몄다가 다시 나오고 있다. ‘방울방울’ 눈물 같은 것이 맺혔다 떨어진다. 금간 곳으로 스몄다가 떨어지는 것들은 눈물이 되고 있다는 지적은 상징적이다.

  이러한 ‘만신창이 조각’의 눈물은 한 바보 사내가 ‘자신을 옭아맨 그물이 서서히 죄어오자’ ‘마을의 뒷동산 부엉이바위에 올라/ 허공에 몸을 들어 올린 뒤 지구를 향해 돌진한’(「지구를 받은 바보」) 곳에서도 맺혀 떨어진다. ‘때가 되면 목숨을 걸고 모천으로 기어오르는 연어’인 ‘남자들의 순교’ (「팬티」)나 ‘몇 억 만년의 인고를 겪고’ 바위님들이 자신들의 몸을 쪼개고 쪼개어 ‘깃털보다 가벼운 몸으로’ 당도한 황사의 ‘눈부신 활공’(「황사」)에서도 「내 집의 낮은 하늘」에서 본 눈물이 맺혀 있다.

  적막의 바깥, 사람살이가 한창인 곳에서 자연은 ‘네 계절을 잘 지켜 차례대로 되풀이’를 잘 하고 있는데, 유독 사람들은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않고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간다. 그런 사람들이 ’장땡인 세상’은 오리무중 깜깜하다(「깜깜한 세상」). 보이지 않는 깜깜한 세상을 그래도 자세히 헤치며 보니 사람은 또 다른 허수아비였음을 발견한다.

  ‘고속도로 작업 구간 전방에서/ 붉은 깃발을 들었다 내렸다 하며/ 속도를 통제하는 노란 헬멧의 사내’는 한 가지 동작만을 되풀이 하고 있다. 그런데 그 모습이 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톨게이트 좁은 창틀에 끼여/ 통행료를 계산하는 손’이나 ‘온종일 자판기를 두드리는 손들’ 또한 무료한 동작을 되풀이하는 노란 헬멧과 다르지 않음을 시인은 이야기한다.

 

미싱대 위에서 바삐 움직이는 여공들의 손

뜨거운 화덕 앞에서 해머를 쥔 근육질의 손

배의 삿대를 잡은 사공의 손도 그렇고

때마다 끼니를 준비하는 주부의 손도 그렇다

 

저 무료한 반복의 동작들

 

생각하면

매일 집과 직장을 오르내리는 우리의 일상이

다 그렇고 그렇다

                        -「움직이는 허수아비」 부분

 

  생각해 보면 우리의 일상이 다 움직이는 허수아비가 아닌가?라는 질문에서 독자는 그 집 앞 전선줄에 그렁그렁 달려 있는 눈물을 읽어내던 시인을 만날 것이다. ‘수족관에 붙들린 꽃게’가 날카로운 엄지 집게를 잘라내고서야 ‘사이좋게 놀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물고 뜯기 좋아하는 사람 세상’도 조용하려면 ‘혀와 수족을 다 함께 잘라야 할 것 같다’(「꽃게」)는 낮은 목소리에서 시인의 인간에 대한 눈물이 보인다.

  이 모든 사태에 역전이 있을 수 있을까? ‘구찌의 짝퉁 팔찌’가 ‘추사의 짝퉁 춘사’가 ‘중섭의 짝퉁 종섭’이 분발하여 원조들을 누르고 역전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어리석은 군중들이 맛으로 고르지 않고, 값으로 고르며, 질로 상품을 고르지 않고, 이름으로 고르기’ 때문이다(「역전에 관하여」). ‘살구가 매실인 양/ 부서가 조기인 양’(「척」) 이름을 내세워야 하는 세상에서 보구치가 역전할 수 있는 기회는 오로지 아메리카를 점령하는 비법, 어쩌면 10세대가 지난 세상이어야 하니 그 또한 절망으로 보인다.

  그 모든 눈물들을 안개로 덧칠하는 시 「오합五合」은 독자에게 고갯마루에서 쉬게 하며 잠시 바람을 느끼게 한다.

 

먼 바다 물결 속에서 유유자적 헤엄치며 돌아다니다

어느 어부의 낚시에 잘못 걸려든 홍어,

육지의 한 농가 축사에서 무위도식 태평성대 누리다

어느 날 도살되어 실려 온 저 돈공豚公의 살점,

산비탈 양지바른 어느 밭에서 뿌리 내리고 바람 햇살 엮어

푸른 잎을 열심히 짰던 배추,

수천 리 밖에서 따로 살던 이놈들이 먼 길을 돌고 돌아

이 외로운 흑산도로 밀려와서

그것도 2010년 6월 29일 정오쯤,

섬 구경 온 서울의 한 묵객의 아구 속에서 만나다니

                                                          -「오합五合」 부분

 

  수 천리 밖에서 따로 살던 생명들이 ‘오합五合’이 되어 그것도 명확하게 ‘2010년 6월 29일 정오쯤, 한 묵객의 아구 속에서 만나’ 기구한 운명을 끝내는데 마지막 연에서 바람이 인다. ‘흑산 포구 앞 다물도인지 대둔도인지’ 이름이 쉼표 앞에서 오락가락 안개에 묻힌다. 정확한 날짜와 비장한 사연을 그려가다가 장소를 안개로 덮는(「오합五合」) 이러한 세상 바라보기는 시인만의 독특한 원근 처리 방법이 아닐 수 없다. 바람은 거기에서 신선하게 분다.

  시인은 친숙한 섬 타이티를 떠나지 않는다. 순간마다 갈고 닦은 무기로 허공을 벤다.

 

  3. 원시와 현대를 넘나드는 견자

 

  고대의 시들이 운율을 맞춘 산문에 지나지 않았다며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는 자가 시인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편 시인이 있다. 아르튀르 랭보, 이 시인은 「견자의 편지lettre du voyant」에서 진정한 시인이란 먼저 자기 자신을 깨닫고 정진하는 투시자여야 하고, 새로운 세계를 꿰뚫어 보아야 한다고 했다.

  임보 시인 역시 영혼과 영혼이 서로 통하는 과정을 거쳐 그것을 표현하는 일에 익숙해 있음을 보인다. 언어의 제약성을 뛰어넘어, 언어에 색과 리듬을 부여하는 식의 ‘공감각synesthesie’적인 방법으로 사고와 상상력의 비약을 이끈다. 시 「연밭에서」는 색체와 소리가 먼저 다가오는 구조를 보인다.

 

연밭에 수만 그루의 연들이 푸른 잎을 앞세우고 앉아 있는 걸 보면

방패 뒤에 숨어 포진을 하고 있는 중세의 병사들이 생각난다

무엇을 향해 저리 삼엄한 진을 치고 있단 말인가

빛의 화살들이 푸른 방패 위에 쏟아져 내린 걸 보노라면

천상의 어느 군병들과 힘을 겨루고 있는 것만 같다

진중에선 붉은 나팔들이 여기저기서 터지며 진군을 보채지만

한 발짝도 적진을 향해 돌진하는 놈은 없다

제트기처럼 날랜 제비들이 허공을 스치며 지나가고

몇 놈의 잠자리들이 헬리콥터 시늉을 하며 맴돌아도

무저항의 평화 군단은 미동도 없다

종일 빛의 화살을 날리다 지친 천상의 군병들도

어쩌지 못하고 마침내 노을 속에 붉게 묻히고 만다

                                                                 -「연밭에서」 부분

 

  시인은 연밭에 서서 소리와 빛을 따라가다 ‘붉은 악마’에 맞선 ‘푸른 승려 군단’을 떠올린다. 그런데 이 군단은 ‘천상의 연화세계’에 열리는 축구 경기를 관람하는지 솥뚜껑 같은 ’푸른 원형 안테나‘를 몇 개씩 달고 있다. 시인은 보지 못하는데 개구리가 알아차리고 여기저기서 ‘툼병점병 난리들’이다. 연밭을 바라보며 시인은 푸름과 붉은 색깔, 그리고 툼병점병 거리는 소리를 배치하고 이를 은하로 연결시켜 놓는다. 은하 컵을 놓고 전갈과 사자가 한 판 붙었다는 것이다.

  이어 「연밭에서 2」는 ‘중세의 병사’를 닮은 연들이 삼엄한 진을 치고 ‘천상의 군병들’과 힘을 겨루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빛의 화살들’이 ‘푸른 방패’ 위에 쏟아져 내리고 ‘붉은 나팔들’이 여기저기서 터지며 진군을 보채지만 무저항으로 버틴다. 「연밭에서 2」 역시 푸름과 붉은 색을 섞고 나팔 소리와 제트기 소리를 소개하고 그 모든 공감각을 섞어 은하계의 소식을 전한다. 견자의 세계가 거침없이 펼쳐지고 있다.

  시 「솔밭 공원」에서도 견자의 시선이 돋보인다. 원추리는 ‘진군나팔’을 불고, 비비추의 무리들이 ‘보랏빛 깃발을 펄럭이고’ ‘맥문동 군단의 보병들’이 의기충천하고, ‘옥잠화 진지에서 전열’을 가다듬는다. 이러한 위기일발의 전투에서 말매미들이 울고 청설모들이 우두둑거리며 청각과 시각을 자극한다.

 

이 보라군단에 맞설 용맹한 병사들은 없는가?

옳지, 소나무 밑에 자리한 옥잠화 진지에서

전열을 가다듬는 기미를 보이기 시작한다

푸른 깃봉을 높이 세우더니 백색의 깃발을 내밀지 않는가

수국들도 포탄처럼 수십 개의 꽃봉오리를 터뜨린다

그러나 백색의 군단들은 너무 느리고 둔하기만 하다

몸이 단 말매미들이 맴맴 매 맴맴맴 매…

목이 터져라 응원을 보내고

보다 못한 청설모들도 우두둑우두둑

보라진지에 상수리 수류탄을 떨어드리기도 하지만

소수의 게으른 백군이 막강한 보라군단을 제압하고

하루아침에 전세를 역전시킬 가망은 없어 보인다

                                  -「팔월의 전선 - 솔밭공원」 부분

 

  보라군단, 푸른 깃봉, 백색의 깃발, 포탄처럼 터지는 꽃봉오리, 맴맴 매 맴맴 매, 우두둑우두둑 등 공감각의 세계가 한바탕 잔치를 하며 소란스럽다. 꽃들의 전투에 견자의 시인은 색깔과 소리를 절묘하게 섞는다.

 

그런데 어느 무더운 날 밤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천둥이 천지를 뒤흔들더니

천상의 군병들이 비와 바람의 포격으로 지상을 난타했다

불의에 기습을 당한 공원의 청백군들은

전열을 가다듬을 겨를도 없이 초토화되어 쓰러졌다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지상의 패잔병들은 깃발을 내렸다

                                                   -「팔월의 전선 -솔밭공원」 부분

 

  은하계의 소식은 전투가 주를 이룬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시인은 구경 중에 최고를 싸움이라고 했다.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것은/ 싸움 구경이다/ 쪼고 할퀴는 닭싸움/ 밀고 받는 소싸움/ 타고 달리는 경마/ 소와 겨루는 투우/ 권투 유도 씨름 레슬링 K1 프라이드… 몸싸움/ 탁구 정구 농구 배구 송구 축구 야구… 공 싸움/ 육상 경주들도 재밌고/ 수중 경기들도 즐겁다’ ‘온통 싸움판인 세상/ 이보다 더 흥겨운 굿판’(「관전觀戰」)은 없다고 했다.

  그래도 왜 유독 싸움을 즐기는지 다시 묻고 싶다. 싸움에 관한 또 다른 고백을 시 「필봉筆鋒」에서 찾아본다. 일찍이 시인은 어느 무협지에나 나올법한 광야의 검객을 꿈꾸었다고 한다. ‘전가傳家의 보검寶劍을 꿈꾼 광야의 검객’(「필봉筆鋒」)은 ‘창보다 무서운 붓의 힘’을 믿었고, 허공을 베며 때를 기다렸다. ‘필력’을 길렀다는 사연들을 정리해가다보면 허공을 베는 검객이, 싸움을 은하계까지로 확장시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솔밭 공원에 거대한 싸움판 하나를 데려다 놓은 붓의 힘은 놀랍다. ‘보검을 꿈꾼/ 광야의 검객답게’ 은하를 베어 잔치 상 하나를 거하게 차려놓은 것이다.

  시인은 공감각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일에 능숙하다. 사람의 말씨에도 색깔을 입힌다. 그런데 그냥 단순한 색깔이 아니다. 말씨 앞에 형용사로 덧칠을 한다. 매끈하고, 따끈하고, 미지근하고, 단단하고, 담담한, 형용사들이 말씨의 색깔을 꿈틀거리게 한다. ‘경기는 매끈한 황색/ 호남은 따끈한 적색/ 호서는 미지근한 분홍/ 영남은 단단한 청색/ 관동은 담담한 녹색’

 

관북은 무거운 흑색

관서는 차가운 백색

해서는 메마른 갈색

 

나는 전라도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터 잡아 살면서

청주의 직장에 오르내리다 보니

내 말의 빛깔은 누르딩딩

본적을 읽은 숭늉 빛이다

                          -「말의 빛깔」 부분

 

  보검을 지닌 검객은 기존 언어의 배경을 해체하고 오로지 감각과 형상을 따라 새로운 언어를 탄생시키기도 한다. 시 「슘」은 이러한 과정을 탐색하는 본보기다. 현실과 외관을 넘어서 상상으로 만난 미지의 세계에 ‘태평양에서 살던 신묘한 고동’을 안착시키는 과정은 흥미롭다.

 

  그놈의 이름이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그의 고향 가까이 사는 열 개의 원주민들은 그를 어떻게 부르는지, 어류학자들이 붙인 학명이 무엇인지도 물론 알 수 없다. 아니 그들이 어떻게 부르든 나는 상관 않고 그놈에게 이름을 하나 달기로 한다. 호號라고 해도 무방하다. 조선조의 한 묵객은 이백 몇 십 개의 자호를 즐겼거늘 내 그놈에게 호 하나 주기로서니 크게 건방질 것도 없다. ‘슘’이라고 명한다. 무슨 의미냐고?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놈의 형상과 빛깔과 감촉과… 이러한 것들이 내 심상 속에 섬광처럼 돋아난 소리다. 문자다.

                                                                                                                           -「슘」 부분

 

  시인은 고동의 배경에는 관심이 없다. ‘열개 섬의 원주민’이나 ‘어류학자들이 붙인 학명’에도 관심이 없다. 미지의 물건과의 통신을 단지 ‘형상과 빛깔과 감촉’만으로 한다. 마침내 심상 속에서 요동을 치는 ‘슘’이라는 섬광의 문자를 건진다. 시인처럼 ‘슘’하고 발음해 보라. ‘슘’. ‘슘’. ‘슘’. 미지의 생명이 꿈틀거리며 느리게 다가오는 것이 느껴지지 않는가?

 

  4.

 

  시집 『아내의 전성시대』를 타이티 섬이라는 장소를 중심으로 두고 안과 밖 그리고 우주로 확대시켜 가는 과정을 통해 정리해 보았다. 어느 무협지에나 나올법한 ‘전가의 진검’을 지닌 시인이 전해주는 허공의 이야기를 읽는 기쁨은 컸다. 허공. 시인이 바라보는 허공은 사람도 자연의 일부분으로 그 의미가 확장되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시인은 오랜 동안 갈고 닦은 보검을 간직하고 눈앞의 사물을 면밀하게 관찰하여 색깔과 소리로 화폭을 채울 것이다. 그 필력으로 시인은 독자를 우주의 소식 어디까지에 닿게 할 수 있을까? 새로운 소식을 기다려본다.

 

 

 

 

 

홍예영 시인

2000년 계간 《시와시학》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그런데 누구시더라』가 있음.

hongein@hanmail.net

 

 

 

 

 

 

 

출처 : 우리시회(URISI)
글쓴이 : 황연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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