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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아들에게 주는 시를 읽고.. Anak /Freddie Aguilar

운수재 2012. 10. 16. 19:38

 

아들에게 주는 시

                                                                          임보

 

 

아들아,

내 무덤 앞에 한 조각 묘비(墓碑)를 세우고 싶거든

그렇게는 하라.

그러나 언어에 때묻지 않은 순수한 돌을,

길을 오다 가다 흔히 볼 수 있는,

아니, 너무 못생긴 탓으로 사람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그런 것으로 하나 골라 세우라.

그러면 아들아,

그 돌 속에 가난한 내 영혼이 깃들어

때로는 비도 맞고, 때로는 바람도 마시면서

더러는 이끼도 피우고, 작은 산나비도 앉히면서

생전에도 그랬듯이

그렇게 그렇게 지내리라.

 

내 서재(書齋)를 쓰려거든 아들아

그렇게는 하라.

그러나 내 한 생애를 방황케 했던

저 열병의 서책(書冊)들은 모두 불태우고

나를 밤마다 불면케 했던

저 젖은 붓과 종이도 다 치우라.

그리고 그 빈 서가(書架)에

네 애비의 사랑으로 놓고 싶은 것이 있다면,

청풍(淸風)의 수석(水石) 한 점과

무등(無等)의 춘란(春蘭) 한 분으로 채우라.

 

아들아,

네 애비가 살던 이 땅에서 그대로 살고 싶거든

그렇게는 하라.

허나, 불쌍한 네 이웃들에 연민하지 말고,

더러운 이 땅에 꿈의 씨를 뿌리지 말라.

우리의 세대가 너희에게 베풀었듯이

--아니 그보다 더 철저하고 용감하게

비정(非情)과 불의(不義), 음모(陰謀)와 약탈(掠奪)의 장갑차로 무장을 하고

떠가는 새, 이름없는 잡초들에게까지도

증오(憎惡)와 살육(殺戮)의 화살을 쏘아

하늘과 땅

온 산들과 강물 위에 무덤을 쌓으라.

그러면 아들아,

이 땅 위에 한 천년쯤 빙하기가 오고

또 한 만년쯤 폭풍우가 씻어 간 다음,

비로소 우리들의 잃었던 먼 마음에서 싹이 돋아

푸르게 푸르게

이 땅을 지키리라.

 

그러나 아들아,

세상이 네 뜻대로 되지 않아 분하고 역겨울지라도

서두르지 말라.

우리들은 인생의 짐을 번갈아 져 나르는 노역자(勞役者)일 뿐,

우리들의 것이란 애당초 이 지상에는 없었던 것,

때로는 술도 마시고, 때로는 지각(遲刻)도 하면서

네 나이 한 사십쯤 넘다 보면

문득 한 아침에 네가 제왕(帝王)이 되어

비어 있는 무거운 세상을

너의 발 아래 얻으리라.

그러면 아들아,

너도 나처럼 너의 어린 아들에게 들려 줄 너의 묘비명(墓碑銘)을

밤새워 쓸 것이다.

 

 

Anak - Freddie Aguilar


출처 : 자연과 시의 이웃들
글쓴이 : 아직은 적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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