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아들에게 주는 시를 읽고.. Anak /Freddie Aguilar
아들에게 주는 시
임보
아들아,
내 무덤 앞에 한 조각 묘비(墓碑)를 세우고 싶거든
그렇게는 하라.
그러나 언어에 때묻지 않은 순수한 돌을,
길을 오다 가다 흔히 볼 수 있는,
아니, 너무 못생긴 탓으로 사람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그런 것으로 하나 골라 세우라.
그러면 아들아,
그 돌 속에 가난한 내 영혼이 깃들어
때로는 비도 맞고, 때로는 바람도 마시면서
더러는 이끼도 피우고, 작은 산나비도 앉히면서
생전에도 그랬듯이
그렇게 그렇게 지내리라.
내 서재(書齋)를 쓰려거든 아들아
그렇게는 하라.
그러나 내 한 생애를 방황케 했던
저 열병의 서책(書冊)들은 모두 불태우고
나를 밤마다 불면케 했던
저 젖은 붓과 종이도 다 치우라.
그리고 그 빈 서가(書架)에
네 애비의 사랑으로 놓고 싶은 것이 있다면,
청풍(淸風)의 수석(水石) 한 점과
무등(無等)의 춘란(春蘭) 한 분으로 채우라.
아들아,
네 애비가 살던 이 땅에서 그대로 살고 싶거든
그렇게는 하라.
허나, 불쌍한 네 이웃들에 연민하지 말고,
더러운 이 땅에 꿈의 씨를 뿌리지 말라.
우리의 세대가 너희에게 베풀었듯이
--아니 그보다 더 철저하고 용감하게
비정(非情)과 불의(不義), 음모(陰謀)와 약탈(掠奪)의 장갑차로 무장을 하고
떠가는 새, 이름없는 잡초들에게까지도
증오(憎惡)와 살육(殺戮)의 화살을 쏘아
하늘과 땅
온 산들과 강물 위에 무덤을 쌓으라.
그러면 아들아,
이 땅 위에 한 천년쯤 빙하기가 오고
또 한 만년쯤 폭풍우가 씻어 간 다음,
비로소 우리들의 잃었던 먼 마음에서 싹이 돋아
푸르게 푸르게
이 땅을 지키리라.
그러나 아들아,
세상이 네 뜻대로 되지 않아 분하고 역겨울지라도
서두르지 말라.
우리들은 인생의 짐을 번갈아 져 나르는 노역자(勞役者)일 뿐,
우리들의 것이란 애당초 이 지상에는 없었던 것,
때로는 술도 마시고, 때로는 지각(遲刻)도 하면서
네 나이 한 사십쯤 넘다 보면
문득 한 아침에 네가 제왕(帝王)이 되어
비어 있는 무거운 세상을
너의 발 아래 얻으리라.
그러면 아들아,
너도 나처럼 너의 어린 아들에게 들려 줄 너의 묘비명(墓碑銘)을
밤새워 쓸 것이다.
Anak - Freddie Aguil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