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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유년(幼年)의 강 / 임보
운수재
2012. 10. 31. 10:09
유년(幼年)의 강 / 임보 고개를 넘으면 강이 있었다. 정초(正初)면 강은 항상 은빛 얼음 속에 잠들어 있었다. 우리가 떠나는 날은 으레 눈이 오셨다. 조부(祖父)의 명주 두루마기보다도 부드럽고 흰 눈이 내 왕골 꽃신을 적시며 내렸다. 강을 거슬러 40리 예닐곱 내 유년의 하례(賀禮) 길은 무거운 순례(巡禮)였다. 정오가 지나면 조부의 고희(古稀) 푸른 수염에 나의 무명 대님 끝에 고드름이 열렸다. 주막이 하나 있었다. 인가(人家)도 없는 외딴 강가에 주막이 하나 있었다. 조부가 한 잔의 청주로 목을 덥힐 때 나는 화롯가에서 마른 은어(銀魚) 안주를 씹었다. 40리 강은 내 유년의 좁은 걸음으론 쉽게 재지지 않았다. 해가 한참 기운 뒤 열녀문(烈女門)이 보여야만 우리들의 외롭고 더딘 행군은 끝이 났다. 곡천(曲川) 강이 구부러진 언덕 위에 대나무 숲, 그 속에 눈을 인 초가 지붕들이 고막껍질처럼 누워 있었다. 조부가 태어난 마을, 이가 하나도 없는 증조모(曾祖母)님은 으레 우리가 올 것을 미리 알고 종일 봉창문을 열어 놓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