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원은 어디 있는가
도원(桃源)은 어디 있는가
임 보
지난 4월 마지막 일요일에 삼각산 밑 우이도원(牛耳桃源)에서 수십 명의 시인들이 모여 시화제(詩花祭)를 올렸다.
매년 복사꽃이 필 무렵이면 우리시회에서 행하는 연례행사다.
소박한 제수를 마련하여 천지신명께 제를 올리면서 자연에 대한 사랑을 일깨우고 시와 노래와 춤으로 하루를 즐기는 놀이다.
도선사 건너편 산자락 너머에 옛날 암자가 자리했음직한 공터가 있다.
그 주변에 아름드리 오동나무가 여러 그루 서 있는 운치 있는 골짜기다.
그곳에 백년쯤 묵은 복숭아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그런데 그놈이 봄철이면 하도 황홀한 꽃을 피워서 그 꽃구경하러 우이동 시인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그러다가 홀로 서 있는 그 복숭아나무가 외롭게 생각되어 복사꽃밭을 가꾸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10여 년 전에 50여 그루의 묘목을 그 주변에 심어 도화원(桃花園)을 만들었다.
그리고 주제넘게 무릉도원(武陵桃源)을 꿈꾸면서 이 골짜기에 ‘우이도원(牛耳桃源)’이라는 이름을 달았다.
지금은 그 묘목들이 울창하게 자라, 봄철이면 온 골짜기가 환하도록 꽃을 피워 그야말로 별유천지(別有天地)를 이룬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무릉도원의 기원은 동진(東晉)의 시인 도연명(陶淵明, 365~427)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서 유래한다.
동진(東晋) 태원연간(太元年間)에 무릉(武陵)에 살던 한 어부가 강물에 흘러내려온 복사꽃을 보고 그 근원지를 알고자 거슬러 올라간다.
상류에서 복사꽃이 피어 있는 수풀을 만나 그 속으로 들어갔는데, 길을 잃고 헤매다 숲의 끝에 이르러 깊은 동굴을 발견한다.
그 동굴을 빠져나가니 평화롭고 아름다운 별천지가 펼쳐졌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진대(秦代)의 전란(戰亂)을 피해 들어왔다고 하는데, 그때 이후 수백 년 동안 세상과 단절된 채 행복하게 살고 있더라는 것이다.
상상력이 만들어 낸 이상 세계 곧 선경(仙境)의 얘기다.
이백(李白, 701~762)의 유명한 「산중문답(山中問答)」에서도 신선사상을 엿볼 수 있다.
問余何事棲碧山 무슨 까닭으로 이 푸른 산 속에 사는가 묻는다면
笑而不答心自閑 아무 대답 않고 나는 그냥 웃기만 하리
桃花流水杳然去 복사꽃 물에 떨어져 아득히 흘러가는 곳
別有天地非人間 그대들 사는 속세와는 이 얼마나 별다른가!
이 작품 속의 ‘벽산(碧山)’은 자연을 뜻한다고 쉽게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보통의 자연과는 다르게 설정되어 있다.
‘복사꽃이 떨어져 아득히 흘러가는 특별한 곳’이라 했으니 ‘도원(桃源)’ 곧 ‘선경(仙境)’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런데 그 선경을 세상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서 납득시킬 수가 있단 말인가?.
그래서 화자는 대답 대신 그냥 웃고만 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 속의 벽산은 실제로 존재하는 선경이란 말인가? 물론 그럴 리야 없다.
원래부터 있지 않은 선경인데 이백이 무슨 수로 그 세상을 누릴 수 있었겠는가?
이백이 도원을 그리워하면서 자신이 살고 있는 자연을 그렇게 미화했으리라.
이백은 스스로를 적선(謫仙)이라고 칭하리만치 신선사상에 심취했던 시인이다.
구릉과 구릉 사이/ 한 80리쯤 될까
천지가 오동나무 밭이다
꽃이 한창일 땐/온 들판이 보랏빛 바다를 이루는데
상투를 한 새떼들이/ 일제히 날아오를 적엔
하늘이 온통 연둣빛이다
알고 봤더니/ 봉황을 기르는 새터다.
이 글은 졸시집 『구름 위의 다락마을』의 앞부분에 실려 있는 「오동나무 밭」이다.
『구름 위의 다락마을』은 선시(仙詩) 연작들로 이루어진 선시집(仙詩集)이다.
화자가 선계를 주유하면서 보고 느낀 바를 적은 글들로 되어 있다.
나는 도원(桃源)에 이르는 관문을 도화가 아닌 오동나무로 설정했다.
화자가 선계(仙界)에 들어가면서 처음 만난 광활한 오동나무 밭인데 봉황(鳳凰)의 사육장이다.
봉황은 실제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옛 사람들이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상서로운 새다. 봉황은 오동나무에 깃듦며 대나무 열매를 먹고 살아간다는 전설이 있다.
나는 신선 세계를 구현하기 위해 전설적인 신비의 새 봉황을 끌어온 것이다.
이상향에 대한 꿈은 서양에서도 없지 않았다.
영국의 사상가 토마스 모어(Sir Thomas More, 1478~1535)가 쓴 사회풍자소설 『유토피아(Utopia)』에서는 대양 한가운데 외딴 섬에 유토피아를 세운다.
또한 영국의 소설가 제임스 힐턴(James Hilton, 1900~1954)은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Lost Horizon)』에서 ‘샹그릴라(Shangri-La)'라는 이상향을 북인도와 티벳 중간의 히말라야 산 속에 설정한다.
그런데 ’유토피아‘의 어원이 ’존재하지 않은 곳‘이며, ’샹그릴라‘의 의미가 ’마음속의 해와 달‘이라고 하니 그들이 만든 이상향 역시 실재하는 세계가 아닌 가공의 세계임을 은근히 암시하고 있다.
<우리시회>에서 우이도원을 가꾸고 매년 시화제와 단풍시제를 지내는 것도 유토피아를 꿈꾸는 도원사상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넓게 생각하면 도원만 유토피아가 아니라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다 ‘이상향’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에 불만인 사람들은 날마다 꿈을 꾼다.
괴로운 현실을 벗어나는 꿈, 보다 나은 내일을 그리는 꿈, 이상적인 세상을 향해 꿈을 꾼다.
그래서 극락과 천국 그리고 도원의 사상이 생겨난 것이 아니겠는가?
현실에 가장 적응하지 못하고 꿈속에 사는 사람들이 시인인 것 같다.
그들이 만들어낸 작품인 시는 그들이 꿈꾸는 세상에 대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시는 말하자면 시인들의 도원기(桃源記)인 셈이다.
도원은 무릉에 있는 것도 아니고, 삼각산 밑 우이도원에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다.
우리가 꿈꾸는 세상, 우리가 만들어 낸 시가 곧 도원이다.
우리가 만들어 낸 아름다운 시들이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잠시라도 쉬어 갈 수 있는 도원이 될 수도 있으리라.
월간 <우리詩>가 삭막한 이 세상의 도원이 되었으면 한다.
이것이 <우리 詩> 300호를 맞는 감회다.
(우리시 2013.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