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시를 이렇게 썼다 5 (4단시)
4. 사단시(四短詩)
내가 지금까지 묶어낸 4단시 시집들은 『운주천불』(우이동사람들, 2000.)을 비롯해서 『가시연꽃』(시학, 2008.) 『수수꽃다리』(움, 2019.) 그리고 출간 준비 중에 있는 『은둔에 대하여』(미간행) 등이다.
시집『은둔에 대하여』의 서문을 참고로 미리 소개한다.
네 마디 짧은 시―소위 ‘사단시(四短詩)’를 시도한 지 어느 덧 사반세기에 접어든 것 같다. 애초에 시도했던 뜻은 새로운 민중문학 장르를 세우는 것이었다. 전문적인 문학인이 아닌 일반인들도 쉽게 창작할 수 있는 대중적인 시의 장르를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즉 1) 한 마디(1행)가 4음보(어절) 이내의 짧은 길이일 것.
2) 작품 전체가 네 마디(4행)로 이루어진 짧은 글일 것.
3) 그러니 가장 짧은 형태의 4단시는 각 마디가 1음보씩으로 전체 4음보이며
가장 긴 형태의 4단시는 각 마디가 4음보씩으로 전체 16음보가 됨.
4) 따라서 4단시는 준정형시라고 할 수 있음.
그동안 인터넷을 통해서 4단시를 선보여 여러 분들의 관심을 얻은 바는 있지만 국민문학으로 발전하기는 아직도 요원한 느낌이 없지 않다. 일본의 하이쿠를 능가하는 민족문학 장르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또한 나는 첫 번째 사단시집 『운주천불』(2000)을 내면서 시집의 말미에 논문 「단형시고(短形詩考)」를 실은 바 있는데, 그 논문은 <‘사단시(四短詩)’장르 설정을 위한 시론(試論)>이란 부제를 달고 있다. 이 논문의 결론 부분을 여기에 옮겨 보기로 한다.
지금까지 1920년대 이후 한국 현대시 속에 나타난 단형시들의 여러 양상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 단형시들 가운데는 4행시, 더 적절한 표현으로는 네 마디 단형시들이 주도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이 네 마디 단형시를 편의상 사단시(四短詩)라고 부르기로 하자. 이 사단시는 현대에 와서 갑자기 형성된 것이라기보다 우리의 고대시가나 단형 민요들 속에 이미 내재해 있던 형식으로 현대의 많은 시인들에게 선호되고 있는 시형(詩形)이다. 따라서 사단시는 역사성과 보편성을 지닌 시의 한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한 문학 형태가 장르로서 양식화되기까지는 짧지 않은 역사적 배경을 통해서 보편적인 호응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사단시는 시의 한 하류 장르로서 자리 잡을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논의된 자료들을 토대로 사단시의 형식과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첫째, 행의 배열은 자유롭게 할 수 있으나 기승전결의 네 마디 구조로 전개한다.
둘째, 한 마디의 길이는 1음보 이상 4음보를 넘지 않는다. 따라서 전체 작품의 길이는 최소 4음보로부터 최대 16음보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이상적인 길이는 중간 형태인 8음보 내외라고 할 수 있다.
셋째, 각 마디의 길이가 반드시 균등해야 한다는 제한은 두지 않으나 가락을 살리기 위해서는 균등한 편이 이상적이다.
넷째, 마디와 마디의 연결 구조는 특정한 틀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구(對句)나 대조(對照) 및 반전(反轉)의 묘미가 살아나도록 한다.
다섯째, 즉물적 즉정적인 내용을 해학과 기지에 의해 인상적으로 표출해 낸다.
사단시는 시조(時調)의 형식보다는 융통성이 있는 준정형시(準定型詩)로서 단편적인 생각이나 감정을 신선하게 드러내는 시의 한 양식으로 발전시켜 나갈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사료된다.
이제 내가 그동안 써 왔던 몇 작품을 직접 감상해 보도록 하자.
<늙음>
눈 어둠은 보기를 탐내지 말라는 뜻
귀 먹음은 듣기를 탐내지 말라는 뜻
이 빠짐은 먹기를 탐내지 말라는 뜻
잠 없음은 덧없이 꿈꾸지 말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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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늙음은 생명 활동의 쇠퇴를 뜻한다.
생명체는 그들의 임무, 곧 새끼를 생산하는 일이 끝나면
그만 돌아가도록 되어 있다.
서서히 돌아가고 있는 것이 곧 늙음이다.
감각은 무디어지고 육신은 낡아간다.
가는 것들을 억지로 붙들려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사단시는 짧은 형태의 시이기 때문에 미진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작품의 말미에 [주]를 달아 사설을 붙이기도 했다. 덧붙인 주를 필요로 하지 않는 분들은 읽지 않아도 무방하다. 사족이긴 하지만 작품에 딸린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도 상관없다.
<병(病) 1>
거 뉘신가?
내 육신에 몰래 스며들어 집 짓는 자
내 뼈를 뽑아 서까래를 엮고
내 살을 이겨 벽을 바르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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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신의 아픔으로 잠들지 못하는 밤은 참 길기도 하다.
때로는 살을 대패로 밀고 망치로 못을 치는 것도 같다.
이 작품은 굳이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쉽게 이해될 줄 안다. 병마에 시달리고 있는 환자는 얼마나 괴로운가? 누가 육신에 스며들어 뼈와 살을 헤집고 있는 것만 같다.
<장송곡>
드디어 그대는
달려가 박힌다
저 광활한 우주의
혈관 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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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이란 무엇인가?
이 몸을 빚어낸 우주의 공간 속으로 다시 흩어져 돌아가는 환원이다.
우리의 육신 ‘몸’은 ‘모으다’의 명사형이다. 우리가 끼니마다 섭취한 수많은 음식물들을 모아서 만든 것이 육신 아닌가? 그런데 깊이 살펴보면 우리의 몸뚱이―생명체는 우리가 섭취한 음식물뿐만이 아니고 공기며 빛이며 물이며 우리가 다 헤아릴 수 없는 우주 공간의 수많은 요소들의 결집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이러한 생명 작용을 나는 ‘세계의 자아화’라고 부른다. 그런데 ‘죽음’은 무엇인가? 우리의 육신을 형성했던 모든 요소들이 다시 세계 속으로 되돌아가는 것― 곧 자아의 세계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돌아가는 것’―‘환원’이다!
<풍경(風磬)>
아, 누구신가?
허공에
물고기를 매달아
날개를 기르시려는 이!
절의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風磬)은 바람에 의해 종의 방울이 흔들리면서 종을 울리게 한다. 그런데 그 방울이 물고기 모양의 얇은 금속판이다. 물고기는 잘 때도 눈을 뜨고 있어서 수행자의 경각심을 일깨우는 상징물이라고 한다. 허공에 물고기가 매달려 있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컬한 정황이다. 그 쇠물고기가 언제 날개를 얻어 허공을 난단 말인가? 어쩌면 까마득한 득도의 길을 상징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자벌레>
순례의 길을 가는
라마의 선승처럼
어느 성지를 향해
그리 바삐 가시는지
가사도 걸치지 않은
저 푸른 맨몸
일보궁배(一步弓拜)*
일보궁배(一步弓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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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보궁배(一步弓拜) : 매 걸음마다 활처럼 온몸을 굽혀 하는 절.
자벌레를 보면 성지를 향해 오체투지로 움직여 가는 라마승들이 연상된다. 가사도 걸치지 않는 푸른 나신(裸身)으로 어디를 향해 그리 바삐 가시는가? 숙연한 느낌마저 든다. 매 걸음마다 활궁자(弓)처럼 온몸을 굽혀 하는 그 절에 ‘궁배(弓拜)’라는 이름을 달아 본다.
<까치밥>
찬 하늘 빈 가지에
매달린 감 한 알
빈자의 등불처럼
환합니다
까치 부부 기웃대다
차마 못 먹고
침만 꼴깍이다가
날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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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자의 등불’은 ‘빈자일등(貧者一燈)’의 불교설화― 곧 가난한 여인이 바친
등불이 오래 꺼지지 않았다는 고사를 뜻함.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적지 않았던 것 같다. 감나무에서 감을 수확할 때도 다 따지 않고 까치를 생각해서 몇 알을 남겨 두곤 했다. 그게 ‘까치밥’인데 이 작품은 까치마저도 남을 배려해서 차마 그 까치밥을 따 먹지 않고 떠나가는 정경을 그린 것이다.
빈자일등의 고사는 [주]에서도 간단히 언급했지만, 부처님 오심을 기리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화려하게 등불을 밝혔다. 밤이 깊고 바람이 일자 많은 등불이 꺼지고 말았다. 그런데도 유독 한 등불만이 꺼지지 않고 밝게 빛나고 있었는데 이는 한 가난한 여인이 종일 구걸한 돈으로 마련한 등불이었다는 것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격언을 떠올리게 하는 고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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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 <우리시>21년 1월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