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미[美·味·米] 시론에 대한 부연
삼미[美·味·米] 시론에 대한 부연
임 보
나는 ‘시의 삼미[美·味·米]’란 글에서 좋은 시의 조건을 세 가지로 지적한 바 있다. 즉 ‘아름다움[美]’과 ‘재미[味]’와 ‘자양분[米]’, 이 세 가지를 갖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말은 쉽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이 문제 또한 간단치 않음을 알 수 있다.
우선 ‘아름다움’이 어떤 것인가를 한번 생각해 보도록 하자.
우리는 곱게 피어 있는 장미를 보면 걸음을 멈추고 아름답다고 탄성을 발한다. 지상에 피는 모든 꽃은 다 신묘한 아름다움을 지녔다. 꽃들만 아름다운 게 아니라, 붉게 물든 저녁노을도 황홀하게 아름답고, 녹음이 짙어가는 싱그러운 푸른 산도 아름답다. 이렇게 시각적인 아름다움이 있는가 하면, 또한 청각적인 아름다움도 얼마나 많은가? 감미로운 노래며 악기들의 선율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새들의 지저귐도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처럼 현상적인 아름다움들은 시각이나 청각 등 우리의 감각기관으로 감지할 수 있지만, 이러한 감각적인 아름다움과는 달리 심리적인 아름다움도 있다. 즉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선행(善行) 같은 것이다.
평생 쪽방에서 살던 중국집 배달원이
교통사고로 사망했습니다
고아였던 그는 도와주던 고아들 명단과
장기 기증 서약서를 남겼습니다
인용한 글은 홍사성의 「진신사리」라는 4행시다. 어떤 정황을 그리고 있는지 쉽게 이해되는 짧은 시다. 중국집 배달원으로 일하고 있는 고아 출신의 한 젊은이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몸에선 그가 평소에 도와주던 고아들의 이름이 적힌 쪽지와 장기기증 서약서가 나왔다는 얘기다.
작자는 그 쪽지와 서약서를 ‘진신사리(眞身舍利)’라고 칭하고 있다. 사리는 입적한 고승을 다비한 후에 얻은 영롱한 결정체라고 하지 않던가? 그런데 진신사리는 석가모니 부처의 몸에서 나온 사리를 일컫는 말이니 작자가 이 젊은이의 선행을 얼마나 기리고 있는지 짐작이 간다.
한 젊은이의 아름다운 선행에 우리의 가슴이 뭉클해 온다. 아름다움은 이렇게 행위나 사건이 빚어내기도 한다. 어쩌면 아름다움의 문제는 선(善)이나 진(眞)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한편 ‘재미(味)’의 문제도 간단하지가 않다. ‘재미’의 조건이 객관적으로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음식에 대한 기호가 개인에 따라 다른 것처럼 재미를 느끼는 것도 주관적이다. 활극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전원적인 서정시에 심취하는 사람도 있다.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농구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모든 사람의 구미를 사로잡을 수 있는 음식을 만드는 것이 어려운 것처럼 모든 이들이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을 만든다는 것 역시 쉽지 않은 일이다.
어떤 독자는 표현의 기발한 수사에 흥미를 느끼기도 할 것이고, 또 어떤 이는 기이한 소재의 선택에 관심을 보이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아기자기한 구성과 전개에 더 재미를 느낄지 모른다. 그러니 한 작품 속에 어떻게 재미를 담을 것인가 하는 문제도 용이한 일이 아니다.
또한 읽고 난 뒤 독자들의 마음속에 감동성 곧‘정신적인 자양소’를 남게 하는 일도 따져보면 참 막연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다음의 글은 김우전 시인의 「할매 찌찌」라는 시다.
할매 찌찌는 와 이래 쭈글쭈글한데
느그 아부지, 아지야, 고모들
목숨 만들어 멕이고 나니
이래 텅
비었다 아니가
그럼 우리 아빠한테만이라도
내 나라 하마 되잖아
하마 준 걸 우에 다부로* 돌라카노
할매, 그래도 달라 해바라
아빠 나쁘다
할매 찌찌 다 뺏아 먹고
욕실 앞을 지나다 무심코 들은 나는
말뚝처럼 박혀
먹먹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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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로’라는 뜻의 경상도 사투리.
할머니와 어린 손자의 대화를 옮겨 놓은 글이다. 할머니가 어린 손자를 씻기기 위해서 벌거벗고 욕실에 들어간 모양이다. 엄마의 젖과는 달리 축 늘어져 있는 할머니 젖가슴을 보고 손자가 묻고 할머니가 대답하는 정경이다. 할머니 젖이 왜 그리 쭈글쭈글해졌느냐고 묻자, 네 아비와 아재 그리고 고모들에게 다 뜯기고 나니 그리 되었다고 할머니는 대답한다. 그러자 손자는 아빠에게라도 먹은 거 다시 내놓으라고 하면 되잖느냐고 말한다. 그러자 할머니는 이미 준 걸 어찌 다시 내놓으라고 할 수 있느냐는 대답이다.
이러한 정황을 욕실 앞을 우연히 지나던 ‘나(화자, 아이의 아빠)’가 엿듣고 숙연해 하면서 옮겨 쓴 것으로 구성했다. 구수한 사투리가 이 작품을 더욱 감칠맛 나게 하고 있다.
이 시를 읽은 대개의 독자들은 자신도 어머니의 젖을 그렇게 빨아먹고 자랐다는 사실을 환기할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를 위해 뭘 해드렸는가 생각하면서 자신의 불효를 깨닫고 잠시 숙연해 하리라.
연령에 따라 성별에 따라 지역에 따라 계층에 따라 독자들의 성향은 다 다르다. 그러니 모든 사람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몇 사람의 독자라도 만족할 수 있는 아름답고 재미있고 감동적인 작품을 만들어 낸다면 얼마나 보람된 일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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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 21년 6월호 권두에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