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시를 이렇게 썼다 (10)
나는 시를 이렇게 썼다 (10)
임 보
4. 훔쳐서 만든 시
―「두 마리의 늑대」와 「사냥」
글은 표절(剽竊)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표절은 시나 글, 노래 따위를 지을 때에 남의 작품의 일부를 몰래 따다 쓰는 행위를 이르는 말이다. 남이 애써 만들어 놓은 글을 훔쳐오는 것은 부도덕한 행위로 규탄을 받아야 마땅한 일이다.
하지만 그럴 듯한 글감을 만나면 훔치고 싶은 욕망이 일어난다. 이 세상에 새로운 것이란 없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엄격히 따져보면 우리가 쓴 말이나 글들도 이미 누군가가 사용했던 것들을 가져다 쓰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표절과 원용(援用)의 한계는 모호한 바 없지 않다.
나는 비록 비슷한 소재를 가져다 쓰더라도 새로운 구성을 통해 창조적인 작품을 만들어 낸다면 굳이 표절이라는 분홍 딱지를 붙이고 싶지 않다. 나는 평소에 재미있는 얘기를 듣거나 읽는 경우 그것을 내 작품으로 만들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내게는 그렇게 해서 만든 작품들이 비일비재하다. 특히 스토리를 담은 설화시 같은 것들은 옛 사람들의 전적에서 훔쳐온 것들이 적지 않다.
다음의 졸시 「두 마리의 늑대」(시집 미수록)는 인디언 설화에 근거를 둔 것인데 ‘일지희망편지’의 글을 읽다 만난 것이다.
인디언 마을의 한 늙은 추장이
어느 날 손자를 앉혀놓고 묻는다
“우리 마음속에는 말이다
선한 늑대와 악한 늑대가 살고 있는데
두 마리는 항상 서로 싸우는구나
어느 늑대가 이길 것 같으냐?”
손자는 선한 늑대가 이길 것도 같고
악한 늑대가 이길 것도 같아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린다
그러자 할아버지 이르시기를
“우리가 먹이를 준 늑대가 이긴단다.”
― 「두 마리의 늑대」전문
이야기의 내용은 같지만 표현과 구성은 내 나름대로 바꾼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의 끝에 주를 달아 출전을 밝혀 두었다. 이렇게 해 두면 표절의 시비에서 자유로울 수 있지 않겠나 싶어서 그런 것이다.
또 다른 작품 「사냥」(『검은등뻐꾸기의 울음』시학, 2014)을 보자. 에스키모 인들이 사냥하는 한 방법을 소개한 글이다.
에스키모 인들이 그 영악한 여우를 잡는 방법이 이렇답니다.
칼을 예리하게 잘 갈아 얼음 판 위에 거꾸로 꽂아 고정시킵니다.
그리고 칼의 표면에 꿀이나 동물의 피를 발라 놓습니다.
지나가던 굶주린 여우가 꿀이나 피의 냄새를 맡고 칼을 핥습니다.
혀가 칼날에 베이어 피가 흐릅니다.
흐르는 피가 자신의 것인지도 모르고 계속 핥습니다.
―「사냥」전문
어느 목사님의 설교 가운데 인용된 얘기인데, 그럴 듯해서 시로 바꾸어 본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피를 계속 핥으며 죽어가는 여우를 안타까워 하지만, 사실 우리 인간들도 부(富)나 명예의 미끼에 정신이 팔려 스스로 파멸의 길을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는 그런 상징성을 담고 있어 울림을 주리라 믿는다.
5. 환골탈태(換骨奪胎)
―「울타리」와 「강의실」
함민복 시인의 짧은 시 「섬」이 있다.
물울타리를 둘렀다
물울타리가 가장 낮다
물울타리가 모두 길이다
섬을 둘러싼 물을 울타리로 본 시선이 신선하다. 섬을 막고 있는 물이니 울타리라고 할 만하다. 그런데 그 울타리가 보통의 울타리와는 달리 섬보다 낮다. 그리고 배들이 자유롭게 왔다갔다할 수 있으니 길이나 다름없지 않는가?
이 작품을 읽고 내가 떠올린 것은 ‘허공’이라는 공간이었다. 지구를 감싸고 있는 이 공간도 지구의 생명체들이 지구 밖으로 도망을 못 가게 막고 있는 보이지 않는 울타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울타리」(『눈부신 귀향』시학, 2011)라는 다음의 시를 얻게 된 것이다.
울타리는
경계와 경계 사이에 설치된 장애물이다
초가집 울타리는 수수깡이 되기도 하고
과수원 울타리는 탱자나무인 수도 있다
돌이나 흙으로 쌓은 담도 있고
철사나 철망으로 막은 철조망도 있다
개나리, 쥐똥나무의 부드러운 나무울타리
불럭이나 시멘트로 높이 차단한 단단한 벽
울타리는 도둑이나 적들을 막는 방어진인데
섬을 가둔 바다를 물의 울타리라 부른 이도 있다
인간이 만든 가장 긴 울타리는 만리장성
그러나 신이 만든 보이지 않는 울타리도 있다
보라, 지상과 천국 사이에 설치된
저 완벽한 허공!
― 「울타리」전문
각 연이 2행으로 되어 있는 전 7연의 시인데 내가 전달하고 싶은 요지는 맨 마지막 6, 7연에 담겨 있다. 앞에 제시한 울타리의 여러 종류에 대한 사설들은 ‘허공이 울타리’라는 주장을 납득시키기 위한 도입부에 지나지 않는다. 제5연 2행에는 내게 이런 시상을 안겨준 함 시인에 대한 배려를 담았다.
타인의 작품이 계기가 되어 작품을 쓰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잘못하면 아류의 작품을 벗어나지 못할 위험도 없지 않다. 환골탈태의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긴 생명을 지닌 작품을 만들어 내기가 쉽지 않다.
다음에 소개할 「강의실」은 장욱진 화백의 일화가 시의 씨앗이 되어 만들어진 것이다. 장 화백은 자주 강의를 대폿집에서 했다고 하는데 흥이 나면 자신의 신발을 벗어 거기에 막걸리를 따라 당신이 먼저 자시고 신발잔을 제자들에게 돌렸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대폿집이 좋은 강의실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만들어 본 것이다.
강의실
시인 박종달의 강의실은
거의 학교의 교실이 아니다
어느 때는 소나무 밑이기도 하고
또 어느 때는 강가이기도 하다
오늘은
서너 명의 제자들을 이끌고
허름한 주막으로 들어간다
오늘의 강의는 홍탁이다
삭힌 홍어 안주에 동동주
썩은 생선을 먹으면 배탈이 난다고?
썩혀서 먹어야 제맛인 생선도 있다
안주면 다 안주라고?
궁합이 맞아야 제 안주다!
자, 한 잔씩 쭉 걸치자!
오늘 강의 끝!
술을 좋아하는 시인 박종달 교수가 대폿집으로 학생들을 끌고 가 강의하는 장면이다. 홍어에 동동주를 마시면서 술을 가르치는 풍경이다. 교육이란 무엇인가?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훈훈한 삶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겠는가? 장욱진 화백의 일화를 생각하면서 환골탈태의 새로운 얘기를 만들어 본 것이다.
6. 엉뚱한 발상
―「새 요일에 대한 발기문」과 「영통 제4신」
새 요일(曜日)에 관한 발기문
月 火 水 木 金 土 日
왜 한 주일은 7일이어야 하는가?
어느 교에서는
하느님이 엿새 동안에 천지 만물을 창조하고
일곱째 날에 쉬셨다고 한다
달[月]의 날
불[火]의 날
물[水]의 날
나무[木]의 날
쇠[金]의 날
흙[土]의 날
해[日]의 날
오늘에 만일 하느님이 계서
이 세상을 다시 만든다면 7일로는 부족하리라
불어난 길짐승들을 만드는 데 하루는 더 걸릴 것이고
복잡한 날짐승들을 만드는 데 하루는 더 써야 할 것이며
수많은 물고기들을 만드는 데도 또 하루는 더 필요하리라
그렇다면 수(獸) 요일
조(鳥) 요일
어(魚) 요일 등을 새로 신설함이 가하다
이렇게 함이 또한 천하 만물을 평등케 대접함이다
(헌데, 수(獸)는 수(水)와 발음이 같아 혼란이 야기될 것이므로
뭇 짐승의 대표를 사람으로 잡아 ‘수(獸)' 대신‘인(人)'을 쓰기로 한다)
그러니까 1주일은 7일이 아니고 10일이 된다
요일의 순서도 다음과 같이 배치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火 水 金 土 日 木 魚 鳥 人 月
주(週)의 전반은 자연일, 후반은 생명일이다
日요일과 月요일은 휴일이다
4일 일하고 하루 쉬기로 한다
(복잡한 세상 새로 만드시려면 하느님도 아마 중간에 쉬실 게다)
본 제안에 동의하는 이들은
발기문 끝에 첨부한 연판장에 서명하시라
민주주의 세상인데 못 바꿀 것도 없다.
[추신]
<부칙>
그 동안 1주(7일)에 이틀(土와 日일)을 놀던 분들의 불만이 있어
위의 발기문을 약간 수정키로 한다.
土와 人요일도 공일이다. 그러면 사흘 일하고 이틀 쉬는 꼴이 된다.
하지만, 놀기를 싫어하는 이들은 휴일에 일하는 것도 허용키로 한다.
「새 요일에 대한 발기문」(『검은등뻐꾸기의 울음』시학, 2014)은 그야말로 엉뚱한 발상이다. 왜 1주일은 7일로 해야 하는가? 1년이 365일이니 그것을 춘하추동 4등분하고 이를 다시 3등분하여 12개월로 하는 건 그런대로 설득력이 있다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님이 세상을 6일 동안 창조하시고 하루를 쉬었으니 7일을 한 단위로 하여 나누자는 것은 객관적인 설득력이 없다. 아마도 날마다 일만 할 것이 아니라 중간에 하루쯤 쉬는 날을 두자는 생각에서 그렇게 정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쉬는 날을 꼭 7일 단위로 해야 할 것인가? 여유로운 사회에서는 5일 단위로 쉴 수도 있고, 어려운 사회에서는 10일 단위로 쉴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이러한 발상에서 이 글이 만들어진 것이다.
영통 제4신
― 안드로메다 성좌의 한 별에 사는 목동과
안드로메다 한 별에 사는
내 목동 친구에게 지구의 소식을 전한다
내가 사는 지구별은
7할이 물로 덮여 있는 물방울이다
동은 아침인데, 서는 저녁이고
남은 여름인데, 북은 겨울이다
인종의 모양과 빛깔도
흑색 황색 백색으로 다르고
민족마다 말들도 다 다르고
의 식 주도 다 다르다
그 목동 친구도 내게 답신을 보내왔는데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그가 사는 별은 9할이 얼음으로 덮여 있어
진주와 같다
수십 개의 달이 떠 있어
밤에도 대낮처럼 환하다
눈이 없어 빛깔을 볼 수도 없고
귀가 없어 소리를 들을 수도 없지만
빛과 어둠
생각과 느낌은
언제나 환하고 밝다
보아하니
그들의 몸은 우리의 육신과는 다른 모양이다.
나는 안드로메다 성좌의 한 별에 사는 전전전생의 내 목동 친구와 교신을 하는 내용으로 십여 편의 연작시를 쓴 바 있다. 이 시는 그 연작 중 한 작품이다. 안드로메다의 그 별까지는 250만 광년이나 떨어져 있기 때문에 빛의 속도로 달려가는 전자통신의 기기로는 소통불능이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영통(靈通)’인데 영통은 마음속에 생각하면 바로 소통이 되는 통신수단이다. 이 글은 그 목동과 네 번째 주고받은 교신 내용이다. 그 별은 9할이 얼음으로 되어 있어 진주처럼 영롱한 세상이고, 수많은 달이 떠 있어 밤도 대낮처럼 환하다는 것이다. 또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이목구비가 없지만 생각과 느낌은 언제나 환하고 밝다는 것이다.
이 광막한 우주 속의 어떤 별에는 지구와 비슷한 생명체들이 살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 별에 대해 상상을 해 본 작품이다. 이름하여 ‘우주시’라고 불러본다.
7. 화답의 시
―「네루다의 질문에 대한 대답」과 「팬티」
옛 시인들은 남의 작품을 읽다 감흥이 일면 그에 화답하는 작품을 많이 썼다. 청록집에도 박목월의 「나그네」에 화답한 조지훈의 「완화삼」이 실려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런데 현대에 이르면서 화답의 풍조는 많이 사라진 것 같다. 시도 개인주의적 경향을 벗어나기 어려운지 모르겠다.
나는 타인의 시를 읽고 화답하는 작품을 여러 편 썼다. 만해의 「알 수 없어요」를 읽고 「참, 알 수 없어요」(『종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나』미출간)를 쓴 바도 있고, 파블로 네루다의 「우리는 질문하다가 사라진다」를 읽고 「네루다의 질문에 대한 대답」(2019)을 쓰기도 했다. 이 자리에선 네루다의 작품에 화답하는 시를 소개하고자 한다. 우선 네루다의 시를 먼저 읽어 보도록 하자.
어디에서 도마뱀은
꼬리에 덧칠할 물감을 사는 것일까
어디에서 소금은
그 투명한 모습을 얻는 것일까
어디에서 석탄은 잠들었다가
검은 얼굴로 깨어나는가
젖먹이 꿀벌은 언제
꿀의 향기를 처음 맡을까
소나무는 언제
자신이 향을 퍼뜨리기로 결심했을까
오렌지는 언제
태양과 같은 믿음을 배웠을까
연기들은 언제
공중을 나는 법을 배웠을까
뿌리들은 언제 서로 이야기를 나눌까
별들은 어떻게 물을 구할까
전갈은 어떻게 독을 품게 되었고
거북이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그늘이 사라지는 곳은 어디일까
빗방울이 부르는 노래는 무슨 곡일까
새들은 어디에서 마지막 눈을 감을까
왜 나뭇잎은 초록색일까
우리가 아는 것은 한 줌 먼지만도 못하고
짐작만이 산더미 같다
그토록 열심히 배우건만
우리는 단지 질문하다 사라질 뿐
―파블로 네루다 「우리는 질문하다가 사라진다」
세상이 온통 의문투성이의 신비 속에 싸여 있다는 것이다. 네루다의 의문들에 대한 대답의 형식으로 엮은 것이 졸시 「네루다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도마뱀은 딸기밭에서 물감을 사 오고
소금은 물고기 비늘에서 투명함을 빌어 오며
석탄은 천만 년의 잠 속에서 얼굴을 태운다
꿀벌은 엄마 젖꼭지에서 꿀의 맛을 처음 맡고
솔은 봄꽃들에 주눅들어 제 향기를 결심하고
오렌지는 보름달을 보며 둥근 믿음을 배우고
연기는 굴뚝을 빠져나오며 공중을 나는 법을 익히고
뿌리들은 목이 마를 때 서로를 도닥이며 이야기를 나눈다
별들은 한밤중 은두레박으로 샘물을 길어올리고
전갈은 낙타의 발굽에 맞서려 매운 독을 품게 되고
거북이는 온종일 물에 떠 명상하며 해탈을 꿈꾸고
그늘이 사라지는 곳은 어디일까? 빛의 입 속이다
빗방울이 부르는 노래는 ‘물과 바람의 판타지’
새들이 마지막 눈을 감은 곳은 열반의 언덕
나뭇잎이 초록인 건 꽃들에게 고운 색을 양보함이고…
우리가 알고 싶은 건 끝도 없어
열심히 묻고 배우고 하건만
그래도 세상은 모르는 것투성이라고?
그래서 단지 질문하다 사라질 뿐이라고?
그러니 세상은 얼마나 살 만한 곳인가!
―「네루다의 질문에 대한 대답」전문
설명을 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가슴에 와 닿는 시적인 대답들이다. 네루다는 내가 쓴 이 화답의 시를 못 읽고 떠났지만 천국에서라도 이 사실을 알면 미소를 지을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쓴 화답시 가운데 세상의 이목을 가장 많이 받은 작품은 「팬티」(『아내의 전성시대』시학, 2012)다. 이 작품은 문정희 시인의 「치마」라는 작품을 읽고 화답하는 형식으로 쓴 것인데, 궁합이 맞은 것인지 인터넷에 떠돌며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우선 문정희의 「치마」를 읽어 보도록 하자.
벌써 남자들은 그곳에
심상치 않은 것이 있음을 안다
치마 속에 확실히 무언가 있기는 있다
가만두면 사라지는 달을 감추고
뜨겁게 불어오는 회오리 같은 것
대리석 두 기둥으로 받쳐 든 신전에
어쩌면 신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은밀한 곳에서 일어나는
흥망의 비밀이 궁금하여
남자들은 평생 신전의 주위를 맴도는 관광객이다
굳이 아니라면 신의 후손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자꾸 족보를 확인하고
후계자를 만들려고 애를 쓴다
치마 속에 확실히 무언가 있다
여자들이 감춘 바다가 있을지도 모른다
참혹하게 아름다운 갯벌이 있고
꿈꾸는 조개들이 살고 있는 바다
한 번 들어가면 영원히 죽는
허무한 동굴?
놀라운 것은
그 힘은 벗었을 때 더욱 눈부시다는 것이다
―문정희 「치마」전문
상당히 육감적인 작품이다. 그리고 은근히 여성 우월주의적 정서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내가 남성의 입장에서 화답시 「팬티」를 쓴 것이다. 이 작품은 ‘문정희의 「치마」를 읽다가’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그렇구나.
여자들의 치마 속에 감춰진
대리석 기둥의 그 은밀한 신전.
남자들은 황홀한 밀교의 광신도들처럼
그 주변을 맴돌며 한평생 참배의 기회를 엿본다
여자들이 가꾸는 풍요한 갯벌의 궁전,
그 남성 금지구역에 함부로 들어갔다가 붙들리면
옷이 다 벗겨진 채 무릎이 꿇려
천 번의 경배를 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런 곤욕이 무슨 소용이리
때가 되면 목숨을 걸고 모천으로 기어오르는 연어들처럼
남자들도 그들이 태어났던 모천의 성지를 찾아
때가 되면 밤마다 깃발을 세우고 순교를 꿈꾼다
그러나, 여자들이여. 상상해 보라
참배객이 끊긴.
닫힌 신전의 문은 얼마나 적막한가!
그 깊고도 오묘한 문을 여는
신비의 열쇠를 남자들이 지녔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보라.
그 소중한 열쇠를 혹 잃어버릴까 봐
단단히 감싸고 있는 저 탱탱한
남자들의 팬티를!
― 「팬티」전문
남성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쓴 글이다. 남성들이 읽고 얼마나 공감을 할지 모르겠다. 시도 읽는 재미가 있어야 한다. 가능하면 흥미롭게 만들어야 한다. 요즈음 시가 잘 읽히지 않는 것은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시 속에 어떻게 재미를 담을 것인가도 시인들이 안고 있는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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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 <우리시> 21-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