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보의 산문들/에세이

나는 시를 이렇게 썼다 15 ----사랑을 다룬 두 편의 독백시

운수재 2021. 12. 4. 11:45

나는 시를 이렇게 썼다 15

                                                             임 보

 

 

15. 사랑을 다룬 두 편의 독백시

 

「바우의 탄식」과 「빙옥도」는 시집 『장닭설법』(시학, 2007)에 수록되어 있다. 두 작품 다 성취하지 못한 사랑 얘기를 다루고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절실한 테마는 ‘사랑’이다. 사랑의 성취도 우리를 황홀케 하지만 성취하지 못한 비련의 안타까움도 우리를 얼마나 흥분케 하는가?

「바우의 탄식」은 소작인인 마름의 아들 바우가 지주의 딸―아씨를 짝사랑하다 쫓겨난 이야기다. 쫓겨난 바우가 성공하여 수십 년이 지난 뒤에 돌아와 아씨와 재회하는 장면을 그린 것인데, 전 작품이 바우의 독백만으로 되어 있다.

 

바우의 탄식

 

아씨,

나를 알아보시겠습니까?

서른 해 전 어느 동짓달 그믐밤

밤서리 맞으며 도망쳐 갔던

천한 마름의 자식 이 바우놈을

아직 기억하시지요?

설마 잊지는 않으셨지요

 

내 등짝엔 아직도

박힌 채찍의 자국이

용의 꼬리처럼 꿈틀거리고

주리에 틀렸던 두 팔목은

활의 시위처럼 흔들리네

 

아씨,

무엇이 당신의 그 고운 자태를

이렇게 헤집어 놓았는가

윤기 흐르던 그 검은머리는 어디 가고

서리 같은 백발이 흩날리네

천도보다 부드럽던 그 은백의 살결엔

악마의 발자국 같은 주름살이 고여 있네

 

아, 그러나

나를 보는 그대의 눈빛은 아직

살아 있구나

나의 한평생을 삼킨

저 깊은 눈빛은 아직도

빛나고 있구나

 

당신은 알 리 없지

하늘을 향해 천만 번 다짐했던 나의 맹세를

사방 수천 리 광대한 성을 쌓아

당신을 나의 여왕으로 가두겠다는

은밀한 내 음모를 당신은 알 리 없지

 

한때는 바다에서

태풍의 밧줄에 내 손은 이렇게 갈라지고

한때는 대장간에서

무거운 해머로 내 팔목은 이렇게 굳어졌네

등짐으로 내 종아리는 돌처럼 알이 박히고

목도로 내 어깨는 황소처럼 벌어졌네

 

아씨여, 말을 해다오

한세상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가?

행운의 여신이 그대를 외면했단 말인가?

때로는 굶고 때로는 노숙을 하면서

마차도 없이 먼 길 걸어서 왔는가?

입술도 발바닥도 다 부르텄고나

 

말을 해다오 가련한 여인이여

답답도 하구나

 

그대의 소원은 무엇인가?

나는 지금 억만 장자

그대가 원한다면

황금의 성을 쌓아 바칠 수도 있네

 

아, 젖은 눈으로 그대는 말하는구나

그것은 지나간 한때의 허망한 꿈이었다고

천한 마름의 자식이

귀한 주인의 딸을 사랑할 순 없었다고―

그렇게 말하지 말라 아씨여

나는 이렇게 돌아왔지 않는가

이 땅과 당신을 얻기 위해

한평생 나는 죽도록 달려서

드디어 이렇게 여기 돌아왔지 않는가

이제 무엇이 우리를 거역할 수 있단 말인가

 

불쌍한 아씨여

손을 좀 다오

마른 나뭇가지처럼 앙상도 하네

손톱은 굳어져 빛을 잃고

손바닥은 못의 옹이들로 갈라졌구나

신이여 비노니

여기에 생명의 물기를 더하소서

봄이면 수목들의 마른 가지에 물이 올라

재생의 환희를 누리듯이

이 여인에게도 봄을 주소서

 

신이여 말하소서

어떻게 하면 이 여인에게

다시 봄을 허락하시겠나이까?

천 캐럿의 금강석을 이 여인의 손가락에 매달까요?

천의 밤낮을 엎드려 기원을 드릴까요?

천만의 마차에 곡식을 실어

온 천하에 뿌리고 다닐까요?

 

내 한평생 달려 달려

그대에게 이렇게 왔는데

시간의 악령이 그대를 이처럼

헤집어 놓았구나

 

청춘을 돌려다오

우리들의 청춘을 돌려다오

내 가진 억만 금 너에게 다 줄 테니

시간의 악령이여

단 하루만이라도

우리들의 청춘을 돌려다오.

 

 

짤막한 모노드라마를 생각하면서 만들어 본 작품이다.

 

 

 

「빙옥도」 역시 작품의 배경을 설명하는 서두의 모놀로그를 제외하면 전 작품이 남자 주인공 한 사람의 대사만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한 여인을 사이에 둔 두 친구의 삼각관계 사랑 얘기인데 사랑을 빼앗긴 흙수저 남자 주인공이 사랑을 꿰찬 금수저 친구에게 보복행위를 펼치는 장면이다. 극적인 사랑 이야기여서 이국적인 인물과 배경을 설정했다.

 

 

빙옥도(氷玉島)

 

------- 빙옥도(氷玉島,Ice-pearl)는 남태평양에 있는 작은 섬이다.

오색의 영롱한 빛깔을 띤 아름다운 조약돌들이 해안을 덮고 있다.

만조(滿潮)에 이 섬을 내려다보면 마치 한 마리의 청개구리 형상이다.

그러나 간조(干潮)에 보면 영락없는 도마뱀이다.

말하자면 빙옥도는 긴 꼬리를 달고 있는데 그 꼬리는 썰물인 때만

드러나게 된다. 이 섬은 이름난 뱃놈 메피스토가 처음 발견한 무인도다.

어느 날 메피스토는 그의 친구 안토니오 내외를 요트에 태우고 와서

그의 섬 빙옥도를 구경시킨다. 메피스토, 안토니오 그리고 그의 아내

바바라는 한 마을에서 자라난 죽마고우들이다.

이 작품은 메피스토 한 사람만의 대사로 되어 있다. [주(註)]----------

 

 

바바라,

당신은 이 언덕에서 기다려요

갯벌이 험해서 우리를 따라가기는 어려울 테니까

심심하면 갯바위에 매달린 굴을 따든지

웅덩이에 갇힌 게나 새우들을 잡아도 좋겠오

한 둬 시간쯤 지난 뒤

우리가 돌아오게 되면 당신은

아마 세상의 케럿으로는 잴 수도 없는

엄청난 다이아몬드를 안게 될 것이요

안토니오, 어서 서둘러 떠나세

나는 망치와 끌을 짊어지고 갈 테니

자네는 로프를 둘러메고 가세 그려

조수가 밀려오기 전에 서둘러 다녀와야지

이 영롱한 조약돌의 무리들을 보게

마치 용의 꼬리에 매달린 비늘 같지 않는가

이끼가 묻어 미끄러우니 조심하게나

그래 바닷바람도 상쾌하지

바다의 물결은 하프처럼 흔들리고

아침 햇살도 눈부시지 않는가?

우리가 지금 밟아가는 여기가 이 섬의 꼬리일세

꼬리의 끝에 5, 6미터 높이의 곧은 석주(石柱)가 있는데

그 돌기둥의 윗부분이 온통 금강석(金剛石)으로 덮여 있다네

자네 같은 알피니스트면야 식은 죽 먹기겠지만

나 같은 물놈이야 바위를 탈 수 있어야지

밑에 떨어진 몇 개의 부스러기를 줍는 것만으로도

이제는 뱃일도 팽개치고 이렇게 빈둥대며 지낼 수 있게 됐다네

믿을 만한 사람을 찾던 중

우리들의 옛 친구 바로 자네를 선택하게 된 것이야

저놈들은 상어지

갈기를 번득이며 무리를 지어 달리는 저놈들은

이빨이 사나운 바다의 사자들이지

바바라가 손을 흔들고 있군

옛날처럼 아직도 여전히 아름답네 그려

우리들의 고향은 얼마나 평화로운 마을이었던가!

자네집 넓은 광속에 숨어 숨바꼭질도 하고

수수밭에 뒹굴며 간지럼도 많이 했었지

나는 바바라를 자주 울린 편이었고

그럴 때마다 자네는 늘 달래 주곤 했었지

나는 대장지기의 천한 아들이었고

자네는 대지주를 아버지로 둔 귀공자였지

바바라의 포도원에서 함께 놀던 우리들은

나이가 들면서 서로 다른 길을 걸었지

자네는 먼 도시의 학교로 유학을 떠났고

나는 더운 대장간에서 해머만 열심히 내려쳤네

한 10년쯤 지나간 뒤 자네는

이름난 알피니스트가 되어 고향에 돌아왔지

킬리만자로의 정상을 최초로 밟은 우리 고장의 영웅이라고

주민들은 플래카드를 높이 걸고 자네를 환영했었지

그리고 자네는 젊은 나이로 주의회의 의원이 되고

아무런 장애도 없이 아름다운 바바라를 신부로 맞았지

안토니오, 내가 고향을 등진 것은 바로 그날 밤이었네

자네들이 성당에서 혼배성사를 올리던 그날 말일세

아, 저기 우리의 보고(寶庫) 석주가 서 있군

기둥의 머리가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게 보이지?

이제 십여 분 후면 금강석(金剛石)의 성(城)에 오를 수 있을 걸세

고향을 등진 나는 바다로 밀려갔지

고깃배를 타고 망망한 대해에서 파도와 싸우며 그물질도 해 보았고

상선(商船)의 갑판에 올라 하역(荷役)을 하면서

이국의 수많은 항구들을 드나들기도 했지

화려한 도시의 도박장에서 전 재산을 하룻밤에 다 날려도 보았고

폭풍으로 파선한 뱃조각을 붙들고 무인도에 표류해 본 적도 있다네

이 빙옥도의 꼬리는 바로 나의 표류지(漂流地)― 내 생명의 은토(恩土)일세

안토니오, 드디어 도착했네

이 장엄한 보석의 돌기둥을 보게나

어서 로프를 걸어 저 기둥의 정상으로 기어오르세

밀물이 달려오기 전에 말일세

줄이 잘 걸렸는가?

자네가 먼저 오르게나 내가 뒤를 따를 테니

천하의 알피니스트도 이 미끄러운 바위를

줄 없이는 못 오르겠지?

자, 어떤가? 여기서 내려다보는 조망이 말일세

다이아몬드가 어디 있느냐고?

반짝이는 것은 금강석이 아니라 석영(石英)이라고?

너무 서두르지 말게나 나도 이미 알고 있었다네

이 순진한 사람아, 세상에 그런 큰 보석이 설령 있다고 치세

자네 같으면 친구와 나누어 가지겠나?

안토니오, 자네를 속였다고 너무 노여워하지 말게

다이아몬드보다 더 값진 보석을 우리는 아직 가지고 있네

저 해안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바바라 말일세

서둘러 내려갈 생각은 하지 말게

로프는 이미 물속에 떨어졌네

잠시 기다리노라면 조수가 차오를 것이고

그러면 우리는 헤엄쳐 되돌아갈 수 있네

이제 밀물이 밀려들기 시작하는군

자네는 헤엄을 잘 못한다고?

왜 이런 짓을 하느냐고?

그래 얘기해 주지

애초 우리들의 경주는 출발부터서 너무나 불공정했네

자네는 수백만 에이커의 거대한 토지를 후원군으로 지녔고

나는 서너 평 대장간의 화덕이 유일한 후견인인 셈이었지

모든 기회는 자네에게만 주어졌고

세상은 일방적으로 자네의 편이었네

그래서 자네는 킬리만자로의 정상에까지 기어오를 수 있었고

나는 바다의 밑바닥까지 밀려 내려가지 않았던가?

안토니오, 내가 바바라에게 구애(求愛)한 사실을 아는가?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라 아홉 번씩이나 말일세

애초에 우리들의 여건이 뒤바뀌었더라면

바바라는 자네가 아니라 내 아내가 되었을 것일세

우리들의 경주는 너무나 불공평했지 않는가?

자, 이제 새로운 경주를 해 보세

우리들의 출발점을 좀 바꾸어서 말일세

뭍[陸]에서는 내가 너무나 열세였지만

물[海]에서는 내가 좀 나을 듯도 싶네

조수가 이미 섬의 꼬리를 삼켜가고 있군

물이 더 차오르면 바바라를 향해 헤엄쳐 가도록 하세

먼저 도착한 자가 우리들의 보석을 얻기네

욕설은 그만 하고

자, 자네가 먼저 뛰어들게나

잘못하면 상어의 밥이 될 수도 있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랑’이 세상을 번거롭게 만든다. 모든 생명체의 삶의 목적은 자손을 퍼뜨리는 것이다. 사랑은 자손을 생산케 하는 동력으로 생명의 활력소이면서 또한 분쟁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인류의 역사는 어쩌면 사랑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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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우리시 2021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