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보의 산문들/에세이
이 시대 창작의 산실 / 임보
운수재
2022. 4. 9. 11:16
<이 시대 창작의 산실> / 임 보
1. 창작 산실 ―운수재에서의 반세기 서울의 우이동 삼각산 밑 내 우거에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의 후반이다. 80여 평의 대지에 아담하게 지어진 2층 양옥인데 백여 년 묵은 거목의 소나무가 대문의 입구에 수문장처럼 버티고 서 있는 게 마음에 들었다. 나는 이 집의 당호를 운수재(韻壽齋)로 달았다. 운율이 있는 글―곧 시(詩)가 오래 가는 집이란 의미를 담았다. 내 직장이 청주에 있을 때도 나는 이 운수재를 떠나지 않고 매주 오르내리며 15년이 넘게 버티었다. 그래 지금까지 반세기 가까이 살고 있는 것 같다. 지금은 많이 낡고 헐어서 볼품이 없지만 봄이면 정원에 몇 십 년 묵은 백모란이 수많은 꽃송이를 피워내 그윽한 향기와 함께 온 집안이 환하다. 내가 글을 쓰는 서재는 네댓 평 정도나 될까? 별로 넓지 않아 책들이 마루와 안방 그리고 2층의 벽들까지 점령하여 답답하다. 이 책들을 어떻게 치워야 하나 매일 생각은 하면서도 차마 버리지는 못하고 데리고 지내고 있다. 내가 글을 쓰는 장소는 주로 서재이긴 하지만 일정한 장소가 따로 없다. 잠자리에서도, 차를 타고 가다가도, 술잔을 기울이다가도 생각이 떠오르면 어디서나 메모를 해 두었다가 시상이 익으면 집필을 하게 된다. 2. 무엇을 쓰고 있나 첫째, 운율에 대한 자각 운율 곧 리듬은 우주 자연의 동적 구조다. 천체의 운행, 사계의 변화, 주야의 반복, 동물들의 보행, 심장의 박동, 호흡 등 움직이는 모든 것들의 형태가 율동이다. 이러한 율동의 구조 속에서 수만 년 살아온 생명체는 리듬이 체질화되어 있으므로 리듬 속에 있을 때 편안함을 느낀다. 다른 어떤 예술보다도 음악이 많은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갖는 것은 리듬의 힘 때문이다. 문학 가운데 가장 음악적 요소를 많이 지닌 장르는 시다. 시의 운율은 독자들의 심금을 흔드는 중요한 장치다. 나는 1980년대에 들어 운율에 대한 자각을 새롭게 하면서 「律」연작을 시도했다. 그 결과가 『목마일기』(1987)와 『은수달 사냥』(1988)에 수록되어 있다. 한편 학위논문「한국현대시운율연구」(1988)를 통해 ‘내재율’의 이론을 정립했고, 운율에 관한 다양한 논문들을 모아『현대시운율구조론』(태학사, 1999)을 엮어냈다. 둘째, 설화시와 선시(仙詩) 모색 시를 어떻게 흥겹고 재미있게 만들어 시에 대한 독자들의 환심을 다시 회복하느냐가 중요한 문제로 대두된다. 그것이 시를 살리는 길이기 때문이다. 독자들의 흥미를 유발하는 방법의 하나로 내가 생각한 것이 시에 서사성(敍事性)을 도입하는 일이다. 말하자면 소설적인 요소 곧 스토리를 시에 끌어들이는 것이다. 시의 서사성은 과거의 서사시라든지 백석이나 지용의 산문체 시에 이미 있었던 것이긴 하다. 그러나 내가 주장하는 서사성이란 그런 거대 서사는 물론이고 짧은 서정시도 이야기 형식으로 짜 보자는 것이다. 이야기는 재미있고 설득력이 있으며 또한 오래 기억된다. 나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시의 장르 명칭을 설화시(說話詩)라 부르기로 했다. 설화시를 생각하면서 처음 시도한 것이 선시(仙詩) 연작이었다. 불교의 선시(禪詩)가 아닌 신선(神仙) 사상을 다룬 작품이다. 『구름 위의 다락마을』(1998)에 수록된 작품들은 다 선시다. 화자가 천상의 신선세계를 주유하면서 그가 보고 겪은 이야기들을 단편적으로 적은 연작 형식의 시들이다. 상상력을 통해 만들어 낸 신선세계가 겉으로 보기엔 허황된 것 같지만 사실은 우리가 몸담고 살고 있는 지상적 세계에 대한 비판이며 지상적 삶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하는 소망의 표현이다. 설화시들만을 모은 시집이 『장닭설법』(2007)인데 이 시집으로 2007년 <시와시학 작품상>을 수상했다. 셋째, 사단시(四短詩) 장르 설정 시도 서사시나 장시 같은 긴 분량의 시도 없지 않지만 시의 형식은 원래 짧음이 그 특징이다. 아니, 시는 가급적 짧을수록 이상적일지 모른다. 특히 요즘처럼 복잡한 세상에서는 더 그럴 것으로 생각된다. 1920년대 이후 한국의 현대시에서 10행 미만의 단형시를 조사해 보았더니, 4행시가 압도적으로 많음을 알 수 있었다. 곧 기승전결의 전통적인 4단 구조가 단형시에서도 실현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수만 년 동안 사계의 변화가 뚜렷한 풍토에서 살아온 우리 민족의 성정에 4단 구조는 친숙하게 작용한 것 같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조건으로 사단시 곧 네 마디 짧은 시를 시도해 본 것이다. 사단시의 가장 짧은 형태는 네 마디가 각기 1음보만으로 이루어진, 전체 4음보(16음절 이하)가 되고, 가장 긴 형태는 네 마디가 다 4음보로 이루어진, 전체 길이가 16음보가 되어 평시조보다 길게 된다. 가장 이상적인 형태는 네 마디가 다 2음보 내외로 된 전체 8음보 내외의 길이다. 사단시에 대한 내 작업의 자취들은 『운주천불』(2000)과 『가시연꽃』(2008) 『수수꽃다리』(2019) 그리고 『은둔에 대하여』(미간)에서 만나볼 수 있다. 넷째, 비판적 풍자시와 자연 친화적인 시 내 시가 지닌 중요한 특징의 하나는 풍자성이다. 세상은 한마디로 모순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우주 자체도 유한과 무한을 공유하고 있는 역설적 구조지만. 생명의 조건도 양과 음, 삶과 죽음, 선과 악, 사랑과 미움 등의 이율배반적인 모순구조라 할 수 있다. 예민한 감성을 지닌 시인들은 세계가 지닌 이런 모순 구조에서 발생한 갈등들을 인식하고 비판하게 된다. 시집 『황소의 뿔』(1990)과 『사슴의 머리에 뿔은 왜 달았는가』(2002)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들은 대개 이런 비판적인 안목으로 쓴 풍자시들이다. 위의 시집들뿐만 아니라 나의 많은 작품들은 문명비판, 사회비판 그리고 우주적 모순 구조에 대한 풍자 의식이 깔려 있다. 연전에 간행된 『아내의 전성시대』(2012)도 이 범주의 시집이다. 한편 이런 비판적인 풍자 정신과 더불어 내 시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은 자연 친화의 사상이다. 문명이나 사회 비판 정신과 자연 친화의 사상은 겉으로 보기엔 다른 것 같지만 실은 뿌리를 같이하고 있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인위적인 문명이나 제도적인 사회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은 자연을 소중히 생각하는 마음과 동궤의 것이 아니겠는가? 전원에 대한 동경과 자연 친화적인 성향을 띤 작품들이 시집『자연학교』(2004)와 『눈부신 귀향』(2011) 그리고 꽃과 식물들을 노래한 『자운영꽃밭』(2013) 등에 수록되어 있다. 다섯째, 한국 현대시의 정체성에 관한 모색 우리 ‘시’는 중국의 한시나 서구의 어떤 시와도 같지 않다. 한국의 전통 음식이나 의상이 고유한 것처럼 한국의 현대시도 우리만의 개성적인 특색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우리 시를 설명하면서 지나치게 외국의 시 이론을 끌어다 금과옥조로 삼을 일이 아니다. 이는 마치 한복을 지으면서 양복 만드는 법을 바탕으로 삼으려 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한국의 현대시는 서구시 이론에 너무 의존해 와서 우리다운 특성을 많이 잃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우리다운 특성을 살려 한국시의 정체성을 수립해야 되리라 믿는다. 나는 모든 글은 욕망의 표현이라고 본다. 시 역시도 시인의 욕망의 산물이다. 그런데 시를 통해 성취하고자 하는 시인의 욕망은 세속적인 욕망과는 다른 것으로 보인다. 수많은 이들에게 회자되는 역대의 좋은 작품들을 살펴보건대 그 속에 담긴 시인의 욕망은 물질에 대한 욕구나 출세 지향적인 그런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어쩌면 세속적인 욕구를 억제하고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차원 높은 정신세계를 지향하고자 하는 것 같다. 나는 이를 ‘승화된 욕망’이라 부르는데, 그 승화된 욕망은 진·선·미를 중요시하고, 절조(節操), 염결(廉潔), 친자연(親自然)을 지향한다. 이것은 바로 우리 선조들이 소중히 여겼던 선비정신과 다르지 않다. 나는 이 선비정신을 한국시의 이상적인 시정신으로 삼고자 한다. 무릇 좋은 글이란 좋은 생각을 적절한 언어로 잘 표현했을 때 가능하다. 좋은 시 역시 좋은 내용을 적절한 표현 형식에 담았을 때 가능하다. 좋은 시 내용의 바탕이 되는 것은 시정신 곧 선비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적절한 표현 형식이란 작품마다 다르겠지만 산문과는 달리 시가 되게 하는 보편적인 특성이 없지 않아 보인다. 이를 나는 시적 장치라고 이르는데 이것이 또한 시와 비시(非詩)를 구분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시적 장치, 곧 시다운 표현의 특성을 나는 세 가지로 잡고 있다. 은폐지향성(감춤), 과장지향성(불림), 그리고 심미지향성(꾸밈)이다. 나는 시적 장치가 지닌 이 세 가지 경향― 감춤, 불림, 꾸밈을 ‘엄살’이라는 말로 통합해서 부르고 있다. 따라서 시에 대한 정의를 간략하게 한다면 시정신(선비정신)이 시적 장치(엄살스럽게)를 통해 짧게 표현된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시 정신과 시적 장치에 관한 그동안의 내 이론들은 시론집『엄살의 시학』(태학사, 2000)과『미지의 한 젊은 시인에게』(서정시학, 2009) 『시와 시인을 위하여』(움, 2013) 등에 수록되어 있고, 운율에 대한 이론은 『현대시 운율구조론』(태학사, 1999)에 담았다. 여섯째 집필 중에 있는 작품들 99인의 인물을 노래한 인물시집 『백인전(白人展』, 영원한 사랑을 노래한 연가집 『세상에 가득한 그대』와 실험적인 작품집 『시외별전(詩外別傳)』등을 거의 마무리하여 퇴고하고 있는 중이다. 3. 대표작 5편 적요의 밤 / 임보 적요의 밤 내 등이 가렵다 히말라야의 어느 설산에 눈사태가 나는가 보다 적요의 밤 귀가 가렵다 남태평양의 어느 무인도에 거센 파도가 이는가 보다 적요의 밤 잠이 오지 않는다 내 은하계의 어느 행성에 오색의 운석들이 떨어지고 있나 보다 적요의 밤 어디선가 밀려오는 향훈… 내가 떠나왔던 아득한 전생의 종루에서 누군가 지금 종을 울리고 있나 보다 지상의 하루 / 임보 우리가 여기 오기 위해 몇 억만 년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는가 우리가 여기 이렇게 서기 위해 몇 억만의 우리 조상들 몸을 빌어 그렇게 숨어 흘러내려 왔는가 아 우리가 바로 이런 우리이기 위해 이 손과 발 이 가슴과 머리 바로 이러한 우리이기 위해 끝도 없는 저 우주로부터 무량의 빛과 구름을 모아 이 육신을 그렇게 빚었거니 오늘의 이 청명한 지상의 일기 산과 바다 저 찬란한 자연의 풍광 천둥과 바람 저 감미로운 자연의 운율 이보다 더 고운 낙원이 어디 또 있겠는가 천국을 팔아 지상을 어지럽히는 어리석은 자들아 혹 그대 오늘의 삶이 그렇게 고되고 괴로움은 그대의 헛된 욕망과 미망 때문일 뿐 눈부신 이 지상의 하루 몇 억만 년만의 황홀이거니 깨어있는 눈으로 세상을 다시 보면 그대의 집 뜰이 낙원의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음을 비로소 눈물겹게 맞게 되리니 파리똥 / 임보 세상을 이미 떠난 어느 대가의 시詩 한 편을 놓고 기라성 같은 비평가들이 화려한 논란을 쏟아냈다 문제가 된 것은 시행詩行의 중간에 찍힌 하나의 피어리어드[종지부終止符]였다 수식어와 피수식어를 갈라놓음으로 시정詩情의 미적 확대를 의도적으로 꾀했다. [비평가 A] 의미의 연결에 포즈pause를 줌으로 이미지의 자동화를 방지한 낯선 장치다. [비평가 B] 복잡다단한 현대 도시 소시민의 순간적인 의식의 단절을 시각화한 것이다. [비평가 C] 일상적 구문의 해체로 심리적 갈등 곧 정서의 와해를 표출하려 했다. [비평가 D] 알다가도 모를 현학적인 해설들이 작품보다 더 어렵게 지상을 수놓았다 거기에 왜 마침표가 들어가야 하나? 아무리 해도 이해를 못한 한 숙맥 시인이 출판사에 찾아가 대가의 친필 원고를 가까스로 찾아보았다 원고에 분명 마침표가 찍혀 있었다 (그러나 그 마침표의 생산자는 대가가 아니라 한 마리의 불손한 파리였던 것을 세상은 아무도 몰랐다) 울타리 / 임보 울타리는 경계와 경계 사이에 설치된 장애물이다 초가집 울타리는 수수깡이 되기도 하고 과수원 울타리는 탱자나무인 수도 있다 돌이나 흙으로 쌓은 담도 있고 철사나 철망으로 막은 철조망도 있다 개나리, 쥐똥나무의 부드러운 나무울타리 블록이나 시멘트로 높이 차단한 단단한 벽 울타리는 도둑이나 적들을 막는 방어진인데 섬을 가둔 바다를 물의 울타리라 부른 시인도 있다 인간이 만든 가장 긴 울타리는 만리장성 그러나 신이 만든 보이지 않는 울타리도 있다 보라, 지상과 천국 사이에 설치된 저 완벽한 허공! 호메로스 / 임보 2104년 봄 어느 날 새벽 대기권 밖에 설치된 천체 망원 렌즈에 새로운 별이 하나 붙잡혔다 사람들은 그 렌즈의 이름을 빌어 그 별을 호메로스라고 명명했다 그 뒤 호메로스는 수많은 천문학자들에 의해 추적되었는데 아홉 개의 긴 꼬리를 달고 은하계를 떠도는 초록빛 낙지 모양의 아름다운 혜성이라고 했다 2104년 여름 영국의 그리니치 천문대는 호메로스가 태양계의 외곽을 뚫고 우리들의 세계로 끼어들었다고 보도했다 지상의 모든 망원경들은 가슴을 조이면서 초대받지 않은 태양계의 새 손님 호메로스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2104년 가을 미국의 항공우주국은 호메로스는 지구보다 70배쯤 큰 초속 1000km의 놀라운 속도로 태양계의 중심을 향해 돌진해 들어오고 있는 녹색의 불덩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극히 기적적인 확률이긴 하지만 태양계의 아홉 개 떠돌이별 중 어느 것과 혹 충돌할 수도 있는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고 덧붙였다 2104년 11월 12일 호메로스는 천왕성과 불과 1천만km의 간격으로 스치며 지나갔다 2104년 12월 6일 지상의 모든 생명들은 지구를 향해 다가오는 거대한 불덩이 호메로스를 경악에 찬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신문과 방송들은 종일 아우성을 치고 끓어오르는 P.C.의 모니터들 앞에서 모든 일터의 일손들은 손을 멈추었다 한 시대를 주름잡는 정치가들도 천만 군병을 거느린 장군들도 억만금을 쥐고 있는 억만장자들도 다 속수무책 수만 개의 원자폭탄을 일시에 터뜨린다 해도 호메로스의 진로를 1mm도 바꿀 수 없다고 한 천문학자가 침통하게 부르짖었다 2104년 12월 7일 브라질의 한 인디오 소녀는 그의 일기장에 ‘지구는 밤을 잃었다’고 기록했다 태양이 지고 나면 호메로스가 동편에 돋아 태양처럼 지상을 다시 밝히고 하늘의 별들을 삼켜버렸다 2104년 12월 8일 알라스카의 한 에스키모 노인은 ‘우리들의 세상은 이제 무너졌다’고 중얼거렸다 그들의 백야白夜 위엔 불타는 호메로스가 지지 않고 걸려 있었다 빙산의 만년설은 무너져 내리고 빙하의 굳은 얼음 바다는 금이 갔다 2104년 12월 9일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엔 종일 폭우가 내려 한 선교사의 뒤집힌 막사가 모래의 강물에 떠내려갔다 ‘주여, 이렇게 오시나이까’ 그는 홍수 속에 휩쓸려 묻히면서 그렇게 울부짖었다 2104년 12월 10일 모든 전자기기의 바늘은 방향을 잃고 모든 동력들은 힘없이 주저앉았다 지구는 백열전구처럼 밝았지만 전파와 전신이 끊어진 세상은 암흑의 수렁이었다 2104년 12월 11일 뉴욕의 상공에 뜬 호메로스는 드디어 온 하늘을 불태우면서 번개처럼 세상을 가르고 지나갔다 그를 본 지상의 모든 온도계들은 자폭을 하고 거대한 폭풍의 손이 지표의 모든 것들을 뽑아올려 허공 속에 찢어 던졌다 바다의 물결은 그를 향해 수백m나 솟아올랐고 불타오르는 산야와 도시들 위에 다시 산맥보다 높은 해일들이 몰려와 휩쓸고 지나갔다 2104년 12월 12일 호메로스가 겨우 8백만km의 간격으로 스치고 지나간 뒤 끓어오르는 대기는 뜨거운 먹구름으로 지구를 덮었다 빙하는 녹아 폐허의 대지를 삼키기 시작하고 인간들이 빚은 지상의 모든 바벨탑들은 깊은 어둠 속에 묻혔다 2104년 12월 13일 지구는 다시 기온이 내리면서 새로운 빙하기 천만 년의 깊은 잠 속에 서서히 빠져들기 시작했다. ====================================================== * <월간문학> 2022년 4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