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신]
시인의 세 시각 / 임보
로메다 님, 시의 하류 장르를 어떻게 구분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하는 문제는 아직 진지하게 논의된 것 같지 않습니다. 문학개론서에서는 통상적으로 서정시 서사시 극시 등으로 나누어 설명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구분은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시도되었던 것이기는 합니다만, 현대에 이르러서는 서사시는 소설, 극시는 희곡이라는 새로운 상위 장르로 발전 분화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현대시는 서정시라는 하나의 범주 속에 포괄된다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러한 이론이 아니더라도 서정시 서사시 극시의 구분은 그 구분의 기준점이 동일하지 않다는 데에서도 문제가 없지 않습니다. 서정시는 화자의 감정 곧 서정성이 기준이 된다면 서사시는 소재의 특성이 관건이 되고 극시는 표현의 양식이 문제가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릇 모든 분류나 구분은 동일한 기준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한 객관적 의미를 확보할 수 없습니다. 예컨대 작품의 배경을 기준으로 농촌시 어촌시 도시시 등으로 구분한다든지, 다루어진 소재를 중심으로 인물시 동물시 식물시 무생물시 등으로 구분한다면 이는 일정한 기준을 바탕으로 한 설득력 있는 구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시인이 세계를 바라다보는 시각(視角)을 기준으로 하여 시를 몇 가지 유형으로 분류해 볼 수 있다는 얘기를 해 보고자 합니다.
나는 삶 즉 생명 작용을 객체의 주체화 현상이라고 규정한 바 있습니다. 곧 생명체는 생명체 밖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을 생명체 내부로 끌어들여 자아화합니다. 한 그루의 나무가 얼마나 열심히 그의 몸 밖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요소들을 그의 체내로 끌어들이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뿌리로는 땅속의 수분과 영양소를 잎으로는 대기 중의 공기와 태양의 빛을 끊임없이 받아들입니다. 그야말로 온몸으로 세계의 자아화를 실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생명체는 세계의 자아화를 통해 그의 체내에 세계성의 축적을 꾀합니다. 생명체에 있어서 모든 사물은 정복의 대상입니다. 생명체가 지닌 모든 감각기관들은 자아화할 수 있는 대상을 찾기 위한 탐색용 레이더들입니다. 생명체의 본능적인 행위들은 주체화 즉 자아확대를 위한 욕망의 실현에 근거합니다. 인간의 모든 문화 활동도 이러한 자아확대의 욕망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정치 활동은 타자의 자아화, 경제 활동은 물질의 자아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언술행위 역시 자아확대를 위한 욕망의 표현입니다. 문학은 인간의 욕망을 기술적으로 표현한 글입니다. 그 기술적인 표현 장치에 따라 시, 소설, 희곡 등의 장르가 구분됩니다. 나는 시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기술적인 표현 곧 시적 장치를 은폐지향성, 과장지향성 그리고 심미지향성 등으로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자리는 시적 장치에 관해 거론코자 하는 것이 아니므로 그만 접어 두기로 하고 대상의 자아화에 대한 문제로 다시 되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행위 역시 다른 생명 활동과 마찬가지로 대상 곧 객체의 주체화 작용 ―자아확대― 궁극적으로는 욕망의 성취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모든 생명체가 사물들을 정복의 대상으로 바라다보듯 시인 역시 사물을 성취의 대상으로 바라다봅니다. 그런데 시인이 대상을 바라다보는 자세 곧 시각은 세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의 시각은 시인이 대상을 현실적 가치관을 가지고 바라다보는 경우이고 둘째는 절대적 가치관을 가지고 바라다보는 경우이고 셋째는 초월적 가치관을 가지고 바라다보는 경우입니다. 나는 이들을 지상적(地上的) 시각, 수평적(水平的) 시각, 그리고 천상적(天上的) 시각이라고 부릅니다.
로메다 님, 다음 번에는 이 세 가지 시각에 의해 생산된 작품들을 놓고 얘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자연과 시의 이웃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