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보시집들/장닭설법

백제 기행

운수재 2007. 5. 30. 11:40

 

백제기행 /   임보

 

황덕주(黃悳周)씨는 부여 구아리(舊衙里)에 있는 수정(水晶)약국 주인이다. 서울에서 전전하다가 낙향한 처사다. 조그만 집 뜰 안에 수백 분의 난초들과 함께 살고 있다. 지난여름 우이동 시인들이 아내들 몰래 백제의 고도(古都)를 보러 내려갔다가 황 씨에게 붙들려 그의 집에서 그만 하룻밤 묵고 말았다. 그가 얼마나 날강도 같은 입심 좋은 술꾼이었으면 그의 아내가 홀로 지키는 산성(山城) 밑 그의 궁(宮)으로 우리 떼거리를 몰고 입성(入城)했겠는가.

그 많은 난들을 어떻게 다 돌보느냐고 했더니 그의 대답이 걸작이다. 자기가 난들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난들이 자기를 따라온다는 것이다. 남이 버린 보잘 것 없는 놈도 그의 집에 데려다 놓으면 옆 놈의 흉내를 내면서 잎에 줄을 심기도 하고 꽃에 점을 달기도 한다며 웃는다.

지칠 줄 모르고 쏟아져 나오는 그의 얘기에 홀려 어리둥절하고 있노라면 연상 빈 술잔에 오미자술을 쏟아 넣고 있다. 그리고는 술꾼에게 좋은 약이란 약은 다 갖다 멕이는 것이 아닌가. 내 생각으론 낯선 사람들도 그를 만나 이렇게 떠밀려 가거늘 하물며 분속의 난초들이 무슨 수로 그를 따르지 않고 버틸 수 있으랴 싶었다.

백제를 보러 부여에 갔다가 난초와 술독에 빠져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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