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보의 산문들/수필 53

'스님'의 호칭에 관하여

‘스님’의 호칭에 관하여 임 보(林步) 일찍이 만해는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라고 했지만, 근래 ‘님’을 붙여 대상을 높이고자 하는 어법이 많이 늘어나고 있는 것 같다. ‘해님’ ‘달님’ ‘별님’ 등 천체의 이름에 붙이기도 하고, 상대방의 자녀를 높여 ‘아드님’ ‘따님’이라고 호칭하기도 한다. 이러다간 상대방의 애완동물을 지칭할 때도 님이 등장하는 날이 혹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요즘 승려가 자신의 법명(法名) 뒤에 ‘스님’을 붙여 자신이 승려임을 드러내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이러한 표현은 별로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느낌이 없지 않다. ‘스님’을 사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1) 승려가 자신의 스승을 일컫는 말. 2) 승려를 높여서 일컫는 말. ‘스님’은 ‘승(僧)..

'생명'에 대한 명상

‘생명’에 관한 명상 임 보(시인)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이 다 그렇기는 하지만 ‘생명’처럼 신비로운 것은 없다. 우선 ‘나’라는 생명체를 놓고 한번 생각해 보기로 하자. 나는 어디서 왔는가? 물론 부모로부터 왔다. 그러나 나의 근원은 부모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4분의 조부모, 8분의 증조부모, 16분의 고조부모… 한없이 거슬러 올라가면 태초의 창조주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나를 구성하는 선조들의 수효는 한 세대를 오를수록 배로 불어난다, 한 세대를 30년으로 잡고 600년만 거슬러 올라가도 20세대가 되니 2의 20승― 백만 명이 넘는다. 겨우 600년만 거슬러 올라가도 오늘의 나를 만들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던 조상들의 수효가 100만 명이..

아름다운 삶

아름다운 삶 임보 / 林步 지난 연말 무렵이었다. 시(詩)와의 인연으로 만난 시우(詩友)들의 조촐한 모임을 인사동의 한 음식점에서 갖게 되었다. 그날 연회의 첫머리에 하게 되는 건배사가 내게 맡겨졌다. 요즘 항간에는 재미있는 건배사들이 많아 주흥을 돋우기도 한다. 그런데 내가 일상 애용하는 건배사는 재미는 없지만 짧아서 누구나 쉽게 기억할 수 있다. 내가 “건강하게!”라고 선창하면 좌중이 “삽시다!”라고 제창하고, 또 내가 “즐겁게!”라고 선창하면 또 좌중이 “삽시다!”라고 제창하고, 마지막으로 “아름답게”라고 선창하면 “삽시다!”라고 제창하면 끝이다. ‘건강하고 즐겁고 아름답게 살자’는 기원을 담은 짧은 메시지다. 그런데 술잔이 한참 오고가다 한 시우가 이 건배사에 얽힌 한 에피소드를 소개하며 의문을 ..

나의 동인 활동

4. 나의 동인 활동 . . 어떤 이는 나를 두고 ‘동인지 시인’이라고 평한다는 말을 들었다. 문학지를 통해 활동하기보다는 동인지 중심의 작품 활동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리라. 그런 평을 들을 만큼 나는 많은 동인지 활동을 해 왔다. . 광주고등학교에 입학해 보니 선배들이 《태광(胎光)》이라는 동인지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었다. 이 동인지는 세대교체를 하면서 이어졌는데 1957년 내가 3학년 때 간행된 제6집의 동인들은 김범경 오병선 윤재성 이성부 이이화 그리고 필자 등 6명이었다. 이 중 오병선은 법조인으로 이이화는 역사학자로 빠져나가고 평생 문학을 붙들고 산 동인은 나와 후배 이성부 두 사람뿐이었다. . 내 두 번째 동인 활동은 병영에서였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1962년 초여름에 입대를 했는데 경리..

나의 스승님들 2

나의 스승님들 2 네 번째 스승은 다형(茶兄) 김현승(金顯承) 시인이시다. 내가 다형을 처음 만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초쯤으로 기억된다. 광주의 한 신문사가 주관한 학생 문예작품 공모에 내 시가 당선이 되었는데 그때의 심사위원이 조선대학교 교수였던 다형이었다. 그런 인연으로 나는 광주 양림동에 자리한 다형 댁엘 가끔 드나들었다. 시에 대한 말씀을 기대하면서 찾아갔지만 선생님은 별로 말씀이 없었다. 마른 볼에 유난히 큰 귀가 마치 선량한 사슴을 연상케 하는 얼굴이었다. 나도 말 주변이 없었던 터라 한동안 멍청히 앉아 있다가 그만 물러나오곤 했다. 내가 서울의 대학에 진학한 1958년 무렵, 다형도 모교인 숭실대학으로 옮겨오면서 수색에 자리 잡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20여 평의 조그만 반양옥집이었는데 다형..

나의 스승님들 1

나의 스승님들 1 내 생애의 첫 스승은 조부님(後隱 姜泰秀)이시다. 나는 네댓 살 되던 때부터 조부님 사랑에서 함께 기거를 하며 지냈는데 그분은 내가 말을 익히기 시작하자 한문을 가르치시었다. 나의 첫 교재는 『추구(推句)』였는데 이는 역대의 오언절구 가운데서 뽑아 엮은 시집이다. 지금도 다음의 구절은 내 뇌리에 남아 반짝이고 있다. 狗走梅花落(구주매화락) : (개가 달려가매 매화꽃이 떨어지고) 鷄行竹葉生(계행죽엽생) : (닭이 걸어가매 댓잎이 돋아나는도다) 눈 덮인 마당 위에 생겨난 개와 닭의 발자국을 매화꽃과 댓잎에 비유한 것인데 당시의 어린 나에게 글이란 참 아름답고 신기한 것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어쩌면 내가 한평생 시를 가까이 하며 살게 된 것도 일찍이 조부께서 익혀 주신 몇 구절의 시문 때문이..

임보의 삶에 관하여

2. 임보의 삶에 관하여(거주와 직업) 나는 호적상 1940년 생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의 출생일은 1939년 (음)5월 13일이다. 그러니 경진 생이 아니라 기묘 생 토끼띠다. 태어난 곳은 순천읍 인제리(麟蹄里) 311번지인데 5살 때 조부님께서 가솔들을 이끌고 전남 곡성군 석곡면 구봉리 382번지로 이사를 했다. 가족은 증조모님, 조부모님 그리고 어머니와 나 다섯 식구였다. 아버지는 동경 유학으로 부재중이어서(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아버진 딴 살림을 차리고 있어서 본가와 소식을 끊고 지냈다) 어머니가 손재봉틀을 돌려 생계를 유지하는 처지였다. 우리가 산 집은 그야말로 초가삼간이었는데 동 남 북 삼면이 대밭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대 그늘 속에 묻혀 있어서 여름에는 시원했지만 겨울에는 몹시 추웠다. 어머..

나의 이름에 관하여

一. 나의 삶, 나의 시 . . 1. 이름에 관하여 . 나와 알고 지낸 지가 꽤 오랜 문인들 가운데서도 나를 ‘임(林) 형’이라고 호칭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임보(林步)’이니 나를 ‘林’씨로 생각할 만도 하다. 하지만 나는 ‘林’씨가 아닌, 본관이 진주인 ‘강(姜)’가다. 호적상의 내 본명은 강홍기(姜洪基)인데, ≪현대문학≫에 추천 받을 당시 우연히 ‘임보’라는 필명을 사용하게 되면서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든 것이다. 젊은 날의 내 생각은 시라는 글을 본명으로 발표하는 것이 좀 쑥스럽게 여겨졌던 것 같다. 내 필명을 두고 어떤 이는 송(宋)의 임포(林逋)를 좋아했느냐고 묻지만, 매처학자(梅妻鶴子)로 산 그 은사(隱士)를 혈기 넘쳤던 약관의 내가 좋아했을 리가 없다. 젊은 시절 나를 사로잡았던 인물은 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