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보 시 해설

흥겹고 재미있게 / 임보

운수재 2007. 7. 17. 11:42

 

흥겹고 재미있게  /   임보

―<영산홍> 창작 과정

 

하나의 시의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우선 시의 씨가 있어야 한다.

그 씨를 시상(詩想)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어떤 이는 영감이라는 신비로운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흔히 쓰는 말로 이미지라고 불러도 무방하리라.

나의 경우 이 이미지는 새로운 대상과의 접촉을 통해서 많이 얻어진다. 그

래서 여행은 나에게 시의 씨를 얻는 좋은 방편이 된다.

이 글에서는 졸작 「영산홍」과 「꽃방석」이 어떤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는가를 들춤으로 내 시 쓰는 습성의 일단을 보이고자 한다.

* *

어느 해 봄의 일이다.

학생들이 졸업여행을 떠나던 날 강의를 쉬게 되어 나도 어디든 잠시 다녀오고 싶었다. 그

래서 찾아간 곳이 계룡산 남쪽 골짝에 자리한 동학사(東學寺)였다.

진달래는 이울고 철쭉이 피어날 무렵이었다.

평일이어서인지 절을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많지 않았다.

한적한 계곡길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혼자 기어올랐다.

동학사 어구에 있는 길상암(吉祥菴)이라는 작은 암자 가까이 이르렀을 때의 일이다.

주위의 산천이 마치 저녁놀에 젖듯 환하게 밝았다.

무슨 연고인가 하고 주위를 살펴봤더니, 길상암 뜰에 한 그루의 거대한 꽃나무가 꽃을 피우고 있었다. 온몸으로 수만 개의 꽃봉오리들을 밀어올리고 있는데 마치 이글거리는 모닥불 같았다.

영산홍(映山紅)이라고 했다.

평소에 작은 영산홍만 보아왔던 내게는 무척 낯설고 여간 경이로운 일이 아니었다.

꽃이 아무리 곱다기로소니 천하에 저렇게 황홀할 수가 있단 말인가.

온 산천에 울긋불긋 피어난 철쭉들이 다 이놈의 꽃그림자인 것만 같이 느껴졌다.

나는 이놈에게 한동안 정신이 팔려 멍청히 바라다보고만 있었다.

다리마저 후들거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영산홍 구경을 한 뒤 길상암 입구의 돌계단을 다시 내려오는 도중이었다.

문득 하나의 섬광이 나의 시선을 붙들어 잡았다.

한 여승이 나를 올려다보며 잔잔히 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가에 책상을 내다놓고 앉아서 기왓장 시주를 받고 있는 비구니인데 스물 한둘쯤 되었을까.

바로 그 섬광은 옥처럼 맑은 그녀의 얼굴에서 반짝이는 영롱한 눈빛이었다.

선녀의 아름다움이 아마 저러하리라.

그 여승의 신묘한 아름다움은 조금 전까지 영산홍에 사로잡혔던 내 마음을 단숨에 앗아가 버렸다.

세상에 저렇게 눈부시게 고울 수가 있단 말인가.

나는 제대로 바라볼 수도 없어서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터벅터벅 동학사를 오르는데 절은 보이지 않고 그 여승의 얼굴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기왓장 시주라도 하면서 몇 마디 얘기라도 건네볼 걸… 생각이 이에 미치자 절 구경은 안중에 없고 마음이 급해졌다.

절의 책방에 들러 김달진의 『산거일기(山居日記)』 한 권을 사들고는 서둘러 경내를 돌아 부랴부랴 다시 내려왔다.

시주하는 사람도 별로 없어서였던가 길상암의 그 여승은 자리를 거두고 막 일어서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어인 일인가.

지금의 얼굴은 조금 전의 그 여승의 것이 아니었다.

볼 옆 비스듬히 칼자국인 듯싶은 큰 흉터가 끔직스럽게 이 여인의 얼굴을 갈라놓았다.

선녀는 간 곳이 없고 흉칙한 한 여인이 주섬주섬 그 자리를 거두어 총총히 절 안으로 사라진다.

이 무슨 변고인가. 마치 도깨비에게 잠시 홀렸던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나는 절을 내려오면서 내가 겪은 일련의 사건들이 부처님의 어떤 조화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름다운 꽃에 흠뻑 빠져 정신을 잃고 있는 나를 보고, 세상에는 그 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있느니라 하고 슬쩍 보여 준 것이 아마 그 여인인지 모른다.

그래 이젠 그 여인의 아름다움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불쌍한 내 몰골을 보고, 네가 지금 마음 빼앗기고 있는 그것의 진면목은 사실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이렇게 흉칙스런 것이니라 하고 다시 일깨워 주려는 그런 의도였던 것이나 아니었는지―.

이 체험을 바탕으로 그날 저녁 밤잠을 설치며 써 내려간 것이 <영산홍>이다.

 

동학사(東學寺) 아랫절

길상암(吉祥菴) 뜰에

흐드러진 영산홍

온산천 태우는데

고놈보다 더 고운

사미니(沙彌尼) 한 년

절문 뒤에 숨어서

웃고 섰다가

달려나온 돌부처에

귀잽혀 가네.

* 사미니:불도를 닦는 스무 살 이하의 어린 여승.

 

제6행까지는 내가 본 영산홍과 여인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그린 것이다.

그런데 그 여승의 변모를 어떻게 형상화할 것인가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한참 궁리타가 위와 같은 극적 구성으로 엮어 보았다.

가만히 세속을 엿보고 서 있는 사미니를 깜짝 놀란 돌부처가 달려 나와 귀를 잡고 끌고 들어가는 장면으로 만든 것이다.

여승의 불가사의한 변모를 돌부처의 의인화로 대치했다.

이렇게 만들어 놓고 보니 내가 겪었던 정황과는 전혀 다른 것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내가 의도했던 대로 작품이 완성되지 않더라도 별로 아쉬워하지 않는다.

체험과 작품을 반드시 일치시킬 필요는 없다.

체험보다는 상상력을 따르는 것이 더 아름다울 수 있으니까.

 

그 뒤부터 길상암의 영산홍은 내 뇌리 속에 신비로운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해마다 봄철이면 나는 길상암에 전화를 해 영산홍이 언제쯤 필 것 같으냐고 화신(花信)을 묻는다.

대개의 경우 아직 피려면 멀었다는 대답을 듣는다.

그러나 일상 속에 묻혀 살다 보면 개화의 때를 제대로 맞추어 그놈을 찾기가 쉽지 않다.

몇 주일 까맣게 잊고 있다가 문득 놀라 길상암에 다시 화신을 물으면 이제 막 지고 있다는 소식이 오기도 한다.

「꽃방석」은 그 지는 꽃의 아쉬움을 노래한 것이다.

 

동학사 봄 골짝 길상암 뜰에

영산홍 불붙었단 소문을 듣고

밤잠도 설치며 달려갔더니

지난밤 비바람에 꽃잎은 다 지고

꽃방석만 네댓 평 깔렸습디다

목탁소리 둬 자락만 감고 돕디다.

 

내가 길상암을 즐겨 찾는 까닭은 사실 영산홍도 영산홍이지만 그 사미니에 대한 신비한 체험을 다시 할 수는 없을까 하는 기대감도 은근히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 후로는 그 사미니를 다시는 볼 수 없었고 어찌된 일인지 그 영산홍꽃도 때를 맞추어 제대로 만나기가 어려웠다.

이 시에 담긴 지는 꽃에 대한 아쉬움은 그러니까 두 대상에 대한 그리움을 함께 실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

나는 시도 소설 못지않게 읽어서 즐거울 수 있기를 기대한다.

독자가 시를 외면하는 가장 큰 요인은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시들이 읽히기를 바란다면 우선 재미있게 쓸 일이다.

나는 시를 재미있게 만들기 위해 주로 두 가지 장치를 선호한다.

첫째는 가능하다면 운율에 싣고자 한다. 가락은 시를 흥겹게 한다.

같은 내용이면 가락에 실어 표현하는 쪽이 보다 효과적이다.

운율은 시를 시이게 하는 원초적인 시적 자질인데, 요즈음의 자유시들 가운데는 아예 운율을 회피하려는 경향도 없지 않다.

이는 운율을 시의 구속으로 잘못 판단하고 있는 때문으로 보인다.

운율은 시의 장애물이 아니라 독자의 흉금을 흔들 수 있는 무기다.

음악의 가락이 얼마나 놀라운 힘을 지니고 있는가만 보아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시에는 시의 형식 곧 시의 질서가 있다. 결코 무질서한 글이 아니다.

자유의 이름으로 질서를 깨뜨린다면 이는 방종에 불과하다.

아무나 시인이 될 수 없는 것은 시의 질서를 지켜 글을 쓰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운율은 시에 질서를 부여하는 중요한 장치의 하나다.

둘째는 시의 내용을 구상화하는 일이다.

달리 말하면 스토리 화한다. 흥미를 유발하는 소설적 요소를 시에 끌어들인 셈이라고 할 수 있다.

사건을 담은 시는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오래 기억에 남는다.

산문체의 긴 시에서는 물론이고 나는 짤막한 단시 속에도 즐겨 얘기를 담는다.

그러면 시가 흥겹고 재미만 있으면 다 되는가.

사실 그렇지 않다. 재미있는 소설이 다 훌륭한 소설이 될 수 없듯이 시도 마찬가지다.

격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시의 품격은 사람의 체취처럼 시인의 인품에서 자연히 스며 나온 것이므로 억지를 부려 얻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래서 나는 시인을 구도자의 반열에 앉히고자 한다. 사실 시의 어려움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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