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을 경계한다
김동호(시인, 성균관대 명예 교수)
"시는 흙이어야 한다
뿌리들 신이 나야 한다
시는 물이어야 한다
더럼들 깨끗이 씻겨져야 한다
시는 불이어야 한다
언 마음 사르르 녹아야 한다
시는 大氣이어야 한다
공중의 양떼들 포동포동
살이 올라야 한다
시는 空이어야 한다
이들 다이면서 다 아니어야 한다"
그러나 詩
다 도망가 버리고 없구나
우리 이렇게 떠드는 사이에
(―김동호「시로 쓰는 시론 10」『리토피아』2003 가을호)
인간에게 언어는 참으로 중요하다. 정신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어떤 언어를 먹고사느냐에 따라 인간이 달라진다. 언어가 건조하면 사람도 건조해진다. 사회도 건조해진다. 오늘의 우리 사회가 그렇다고 나는 생각한다. 논리 위주의 건조한 언어가 판을 치기 때문이다. 논리적 언어능력에만 뛰어난 사람들이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논리로만 된 언어는 인간의 언어가 아니다. 인간의 언어는 논리 외에도 감성, 감정, 상상, 은유, 직관, 암시 등이 자연스럽게 함유된 언어이다. 그런 언어를 먹고 자란 사람은 훈훈하고 따뜻하며 현명하다. 가장 인간적인 언어의 맛과 영양, 理氣와 情을 고루 받고 자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언어가 진하게 농축된 것이 시이다. 때문에 시는 인간 상호간의 내밀한 통로가 될 수 있으며 자기 구원의 길이 될 수 있다. 옛 스승들의 말대로 슬플 땐 시적 카달시스를 통해 哀而不傷의 자리에 들 수 있고 지나친 樂에 빠질 땐 시적 균제로서 樂而不淫의 자리에 들 수 있다. 탈진한 말이 이슬 맺힌 새 풀로 새 기운을 얻듯 폐부를 찌르는 새로운 싯귀 하나가 우리에게 새로운 용기와 위로, 살맛을 나게 하는 새 기운을 줄 수가 있다. 이것이 시의 第一義的 존재 이유라고 나는 생각한다. 많은 박수갈채를 받으려는 시, 상품가치로서의 성공을 거두려는 시, 이런 것은 덤으로 와도 좋고 안 와도 그만이다. 뭔가 본말이 전도된 듯한 감을 요즘 나는 느낀다
시를 가장 모르는 사람들은 유식한 사회과학자들이란 생각을 나는 가끔 한다. 논리적 언어에만 수십 년 혹은 평생을 길들여오다 보니 축축한 인간적인 언어와 가장 멀어져 있다. 메마른 언어로 남의 젖은 언어를 온전히 이해할 리가 만무하다. 가장 똑똑한 사람들을 데려다가 병신으로 키워놓는 곳이 현재 우리나라 법과대학이란 말을 어떤 법철학교수에게 들은 일이 있다. 판․검사 유식한 법률가가 시골 농부만큼도 말의 맛을 모른다. 논리적 언어로만 무장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세월이 좀먹느냐” 같은 無學의 농부들도 흔히 쓰는 이런 일상적 은유를 그들은 잘 모른다. 설사 안다 하더라도 ‘논지를 흐리게 하는 말’이라며 무시해 버리려 한다. 그런 은유가 우리의 인식 세계를 얼마나 넓혀주며 인간 상호간의 사이사이를 얼마나 적셔주는지 모르고 있다. 알려고도 않는다. “계란이 바위를 깼다”라고 한 젊은 시인이 무심코 내뱉은 이 역설에 대해 한 유식한 사회과학자가 시비를 건다. “어떻게 계란이 바위를 깰 수 있느냐”며. 나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메마를 대로 메마른 가장 큰 원인이 영재들을 데려다가 둔재를 만들어 놓는 교육에 있다고 본다. 논리적 언어만을 중시하는, 크게 봐서 考試 위주 入試 위주의 교육이 얼마나 인간의 온전한 성장에 방해를 하는지 모른다.
요즘 요란하게 떠드는 영재교육도 마찬가지라고 나는 생각한다. 가령 특수 외국어고등학교의 경우, 외국어를 습득하는 능력만 잠시 남보다 앞서 나가게 하는 교육일 뿐이다. 길게 보면 외국어에 있어서도 전인격적 교육, 인간의 언어를 고루 온전하게 먹고 자라도록 키워진 아이들에게 뒤지고 만다. 언어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술로 정복되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예를 내 주변에서 많이 본다. 과학 영재교육도 마찬가지. 과학적 머리만 남보다 조금 조숙시키는 제도이다. 그만큼 다른 재능이나 소질은 못 자라게 된다. 이것도 길게 보면 인간의 온 심성과 능력을 함께 키워온 사람, 知 情 意를 고루 옳게 키워온 사람에게 뒤지게 마련이다. 과학적 천재도 인간적 천재성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던가. 異質에서 동질을 보는 눈, 온 우주가 하나임을 깨닫는 심성 능력, 이런 큰 눈 트임에서만 발명의 눈도 博愛의 큰 눈도 열린다. 기존의 뻔한 지식, 분명한 것, 확실한 것만을 형식논리의 틀에 담아 주입시키는 교육, "불확실한 것" "막연한 것" "그럴 지도 모른다" "그럴 수도 ? 獵?“와 같은 참다운 지적 호기심의 발로나 창조적 분위기는 초반에 문질러버리는 교육은 또 하나의 유식한 편견들을 양산할 뿐이다
앞에 인용한 졸시 「시로 쓰는 시론 10」은 이런 심사에서 쓴 시이다. 요즘 범람하는 문예지들, 거기에 범람하는 시론을 볼 때마다 마음이 언짢다. 시마저 논리적 언어의 늪에 빠지게 할 참인가. 시론이 그렇게 많이 필요한 것인가. 독자들로 하여금 시를 멀리하게 하는 또 하나의 작태, 아이러니는 아닐까. 근년에 와서 人文學이 人文科學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시론마저 시를 목 조이는 데 거들고 있는 것만 같다. (우이시 제18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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