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에 대한 이 생각 저 생각/ 김 광 림
세기말에 공직을 떠나 홀몸이 된 채 21세기를 맞았지만 여전히 외톨박이 신세다. 시골의 이웃 주민들과는 거의 내왕이 없어서 그런지 가끔 이런 생각도 해 본다. 한 주일쯤 전화 통화도 없으면 반벙어리가 되는 게 아닌가―고.
이웃의 영감들은 아침 식사를 마치면 출근이라도 하듯이 서둘러 집을 나선다. 그리 멀지도 않는 이웃동네에 날마다 같은 일을 되풀이하러 마실을 간다. <짓고 땡> 아니면 <고 스톱>판을 벌이기 위함인 듯, 하루해도 이걸로 보내는 모양인데 아무튼 뭔가 해야한다는데 초점이 맞춰진 현상 같다. 하지만 나는 멍청히 하늘이나 우러르고 먼 산에 눈길이 쏠렸다가 사방의 자연 풍물을 살핀다. 날마다 달라져 가는 모습에서 뭔가를 찾아내려는 듯이. 걷잡을 수 없이 막연하게 떠오르는 생각에 머뭇거리다가 별일 없으면 책과 씨름판을 벌인다. 젊었을 땐 샅바끈을 휘여잡고 기세를 올렸지만 요즘은 얼마 안 가 지쳐버린다. 휴식 겸 나동그라졌다가 다시 일어나 이번엔 펜을 잡고 앉아서 뭔가 끄적거려 본다.
일정한 종교적 신앙이라도 있으면 괴롭고 따분할 때 거기에 매달려 구원을 청해 보련만 나는 고작 책과 씨름하고 원고지와 실랑이를 벌이는 게 예사이다.
이렇듯 외톨로 견디어낼 수 있는 힘이랄까 버팀목이랄까 아니면 구원체라고 해도 무방한 것이 분명 내게도 있는 모양. 달리 말하면 내가 단단히 미친 뭔가가 있다고나 할까. 진작 나는 이런 시귀를 끄적거려 본 적이 있다.
이땅에 布敎차 온 독일 신부
안드레 에칼드는 우리의 古美術에 현혹되어
그만 聖衣까지 벗기에 이른
황홀한 破戒 앞에서
그가 펴낸 『조선미술사』가
日沒을 눈앞에 둔 내게도 어른거려
참회보다 반환을
歸依보다 摸索에 더 열을 올리는 나도
분명 뭔가에 단단히 미쳤나 보다
「뭔가에 미쳐」라는 시의 후반부이다. 사람에 따라 미쳐버릴 만한 대상이 다르다. 가령 애정에 미치는가 하면 권세에도 미친다. 재물에 미치고 풍악에 미치고 놀음에 미치고 신앙에 미치는 등 사람을 미치게 하는 요소는 얼마든지 있다. 그럼 나는 무엇에 미쳤는가.
나는 그저 놀랍고
충격적인 시만 만날 수 있다면
술도 계집도
저리 가라 할 것 같다
「一邊倒」라는 시의 끝 귀절이다. 요즘 술도 계집도 담배까지 끊고 보니 왜 사는지 모르겠다는 회의마저 들기 시작했지만 그런 대로 詩 때문에 버티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
반세기가 넘도록 이북에 두고 온 부모형제 소식도 모르고 지내는 이산의 아픔을 견디어내게 한 손길이 바로 그 시였던 것이다. 시가 아픔을 근본적으로 치유는 못해도 발상법 여하에 따라 구원을 받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시작 방법상의 테크닉이라 할까, 시정신의 소이랄까, 아무튼 해학․풍자․유머․위트 등을 거머쥔 아이러니가 작용한 데서 그것이 가능해졌다. 아이러니가 순수하게 문학상의 현상으로 나타난 것은 호머(Homer) 이래의 일이지만 문화상의 현상으로는 18세기 후반부터의 일인 것 같다.
새로운 세계관의 발전에 호응하여 아이러니도 새롭고 폭넓은 기능을 지니게 되었기 때문이지만 인생에 대한 <닫힌 세계관>에서 새로운 <열린 세계관>으로 바뀜에 따라 과학적 태도와는 상반되는 낭만주의의 출현과 더불어 아이러니는 더욱 세계에 대한 인간들의 반응방법으로서 등장하기에 이르렀던 것 같다.
이와 같은 견해에서 지금 세계에서 아이러니의 정신과 감각은 인생에서 궁지를 뛰어넘는 수단으로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
시가 이상야릇한 쾌감을 가지고 따분하고 괴로운 현실을 따분하지도 괴롭지도 않은 것으로 한다면 아이러니는 초현실의 모순과 부조화를 이상야릇한 쾌감으로 용솟음치게 하는 가장 뛰어난 방법론이라 아니할 수 없다.
*
시가 정치적 사회적 현실적인 것의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이나 방법으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나는 일찌감치 시를 포기했을 것이다.
오늘날 내가 숙명적인 이산의 아픔까지 감수하면서 고향을 떠나온 것은, 아니 버리고 온 것은 당시 그곳에서는 시를 당과 인민을 위해 복무해야 하는 것으로 그 존재를 인정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는 무엇을 위해 봉사하는 도구도 수단도 아니다. 나무는 나무이고 돌은 돌이듯이 시는 언어 그 자체일 뿐이다. 다만 말에는 의미가 있어서 감동되면 좋아하고 사랑할 테고 그렇지 못하면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게 시이다.
시로서 정치를 바로잡고 사회를 개조해 보려는 시인도 간혹 있다. 그들은 시를 그러기 위한 기폭제나 뇌관쯤으로 여기는 듯한데 천만의 말씀이다.
시로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지난날 오마쥬 족들은 대통령 취임 때 찬가를 쓴 걸 보면 가진 아양과 호들갑을 떨며 청렴결백하고 참신 과감한 위정자로 한껏 추켜세우고 있었지만 결국 비리와 부정으로 얼룩져 있는 사실만 해도 그렇다. 이쯤에서 나는 W. H. 오든의 말을 상기해 본다.
詩로서 政治를 바꿀 수는 없다.
詩가 살아남는 장소는
政治家들이 손댈 수 없는 작은 溪谷이다.
거기에서 南으로 흘러
孤獨이나 歎息이나 牧場을 빠져
우리들 俗人들이 믿는다든지
죽는다든지 하는 거리를
지나는 ― 그 詩가 河口에 당도하는 것도
사소한 偶然의 일이로다.
작은 계곡의 물로서의 시가 시인의 외로움과 탄식과 평화로운 목장을 지나 사람들의 신뢰와 죽음의 거리를 거쳐 河口에까지 이른다는 것은 대단한 것일 수밖에 없다.
대개는 중간에서 고갈되거나 사라져버리기 마련인데 河口까지 당도하다니―오든은 사소한 우연이라고 했지만 소멸되지 않는 시의 경지를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많은 사람에게 한번 읽히고 마는 그런 시가 아니라 한 사람에게라도 두고두고 읽히는 시가 바로 이런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나는 시가 뉘의 사주를 받아 쓰거나 대가성을 바라 쓰여지는 것이 아님을 재확인하고 싶다.
시는 산 속의 새가 홀로 울 듯이 그저 쓰고 싶어 쓰면 된다. 사람들은 새 울음소리를 듣고 흐뭇해하고 행복감마저 느끼는 모양이지만 새는 누구를 위해 우는 게 아니라 울고 싶어 운다는 걸 생각하면 시도 그런 것이어야 한다고 여겨진다.
목적성을 거느린 시는 시가 아니다. 독자를 의식한 시도 내가 생각하는 참시는 아니다. 절벽을 뛰어내리듯 하는 왁자지껄한 시가 아니라 아무도 모르는 계곡의 물처럼 홀로 온갖 굴곡과 장애를 거쳐 河口에까지 이르는 우연성의 시, 그것이 바로 내가 생각하는 시인 것이다.
이런 뜻을 담아본 시가 근작「自然發生的」이다. 나는 지금도 자연발생적인 감정유로의 시를 경원시하고 있지만 내가 지향하는 자연발생적은 지적으로 통제된 서정의 발상을 의미한다.
나는 한때 <시작 초기엔 꽃을 꽃으로 보고 차차 꽃을 꽃으로 보지 않게 되다가 다시 꽃을 꽃으로 보게 된다>고 꽃을 꽃으로 보는 경지의 승화를 이렇게 표출한 적이 있지만 「자연발생적」도 그런 차원의 발상이다.
새가 운다/ 아니 우는 게 아니라/ 노래한다/ 아니 노래하는 게 아니라/ 외쳐댄다/ 아니다/ 그저 목청껏 울어보는 것이다// 사람들은 곧잘/ 사회니 겨레니 하며/ 그걸 위해/ 뭔가 해야 한다고 들먹이지만// 글쎄 새가 운다니까/ 그래 새 울음소릴 듣고/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지만/ 실상 새는 누굴 위해 우는 게 아니라/ 마지못해 우는 건 더더욱 아니라/ 행복과는 상관없이/ 울고 싶어 울 뿐// 어차피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새가 울 듯이/ 자연발생적으로/ 꾸밈새 없는/ 그저 하고 싶어 하면 된다
(우이시 제1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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