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보시집들/겨울, 하늘소의 춤

홍역 / 임보

운수재 2008. 9. 15. 04:38

 

 

홍역(紅疫)/    임보

 

 

자줏빛 도포였어요

외발 도깨비처럼 키가 큰 손님이

당산나무 그늘 밑에서 쉬고 있었지요

코흘리개 우리들이

베잠방이에 짚신을 헐떡이며 개울을 건넜을 때

붉은 도포가 우리를 세웠지요

얘들아, 운월티(雲月峙)로 가는 아이 없니?

문득 따가운 유월의 햇살이

우리들의 검은 이마 위에 화살처럼 쏟아졌지요

도포는 어느새

눈이 고운 순덕이 볼을 만지며 웃고 있었고

순덕이 볼이 노을보다 붉게 달아올랐지요

운월티는 어른들도 땀 흘리며 한나절을 넘어야 하는

무서운 재였는데―

우리들은 짚신을 벗어 들고

마을을 향해 줄행랑을 쳤지요

며칠 뒤

순덕이는 고운 홍역을 앓기 시작했고

운월티 산자락엔 산딸기들도

다투어 빨갛게 익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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