放鶴洞에 가서/ 임보
가끔 방학동(放鶴洞)에 넘어가 보았다.
누가 버린 학(鶴)이나 하나 주워 기를까 싶어 중얼대며 산을 넘곤 했다.
방학동 산기슭, 이조 어느 궁인(宮人)의 묘 곁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세상을 다시 생각해 보기도 했다.
주저앉은 봉분, 주인의 성도 제대로 맞춰 읽을 수 없이 풍화된 비문, 목이 부러진 채 누워 있는 문관석―살아 젊었을 때는 그 진한 눈썹으로 상감의 매서운 혀도 눌렀을 그 영화가 겨우 몇백 년 후 이렇게 흐르는구나, 하기야 건너편 능선에는 한 임금의 묘도 있는데, 한때 궁녀들을 죽으로 엮어 가며 옥근으로 세상을 밟아 가던 그가 신하놈들 잘못 부려 군왕의 자리에서 쫓겨난 그런 분의 묘도 있는데, 폐허로 닳아 흙으로 돌아가는 모습은 군신(君臣)이 다를 바가 없었다.
이 무덤들을 굽어보며 이 골짜기에 800년 묵은 은행나무가 하나 서서 자못 인생보다는 크고 긴 모습으로 천만 가지를 벋어 우리를 누르고 있는데, 글쎄 그도 우리보다 몇 날이나 더 여기 이렇게 버티어 있겠는가? 그래서였을까, 옛날부터 귀인들의 무덤이 많은 이 골짜기에 어느 선비는 미리 와서 鶴이나 날려 보내며 떠나는 마음연습이나 했던 곳인가 보다. 옳거니 저 언덕 위에 세심천(洗心泉) 맑은 물이 흐르는 걸 보면, 은행과 鶴과 물이 서로 짝을 이루어 무슨 싱거운 이야기 하나 만들었을 법도 하다.
그런데, 이 골짜기에 鶴들의 그림자는 볼 수도 없고, 요 몇 년째 긴 겨울 내내 비닐하우스들만 엎드려 있더니 날이 풀리던 지난 봄 하루아침에 공룡보다 큰 도저와 기중기들이 폭풍우처럼 몰려왔다. 그리하여 산허리를 굽어보는 열두 층 아파트들의 파도가 일어나 이 조용한 골짜기를 온종일 흔들어댔다. 그리고 세심천(洗心泉) 가에는 목이 쉰 아낙네들이 모여 아침부터 소주로 목을 갈기 시작했다.
며칠 전,
인제는 다시 鶴을 찾아 나서지 않기로 마음 다지면서, 그 천만 가지에 구름 같은 잎을 달고 아직도 서 있는 팔백 살 은행나무, 깨어날 줄 모르고 계속 잠들어 있는 문관석들에게 눈을 주며 두어 번 큰기침을 하고 다시 우이동(牛耳洞) 산등성이로 넘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