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
임보
어느 날 내 책상머리에 놓인 분매(盆梅)에 물을 주려다가
그 낮은 가지에 줄을 늘이고 있는 들깨씨보다도 작은 거미를 보았다.
그 작은 놈이 어떻게 생겨나서 무엇을 잡겠다고
이 방 안 매화가지에 그물을 치는 것인가?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한참 잊고 지내다 며칠 뒤 분에 물을 주면서 그놈을 다시 보았다,
제 몸뚱이보다 큰 분량의 줄을 뽑아 늘여 놓고
죽은 듯이 먹이를 기다리고 있는 그놈을 보고 다시 피식 웃었다.
그 뒤로는 왠지 그놈에게 마음이 자주 쓰여
하루에도 몇 번씩 놈의 그물을 훔쳐보았는데
놈은 항상 그물의 한중앙에 신기할 정도로 미동도 하지 않고
몇 날을 그렇게 기다리고 있었다.
제가 견디면 며칠을 더 견디겠는가 기다리다
소득이 없으면 다른 곳으로 옮기겠지 하고
나는 대수롭잖게 고놈을 생각했다.
헌데 고놈은 내 예상을 완전히 뒤엎고 말았다.
열흘이 지나고, 보름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도 놈은 자리를 뜰 생각은커녕
한 치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놈의 끈질긴 인내, 무서운 음모, 놈은 피식 웃었던 내 웃음을
어느덧 빼앗아 삼키고 모기 한 마리 걸리지 않는
빈 그물 속에 나를 꽁꽁 얽어매기 시작했다.
영장인 나는 드디어 심술이 나서 무력을 상용키로 했다.
펜촉으로 놈의 몸뚱이를 한 번 건드려 볼 참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었다.
펜촉이 놈의 몸에 닿는 순간 놈은 낙화처럼 힘없이 추락하여 내렸다.
떨어져 내린 그것은 생명을 벗은 마른 껍질 그것이었다.
그렇구나, 놈은 죽어 있었구나,
놈은 생명이 다하도록 자기 의지를 불태우며
그렇게 참고 견디다 산화했구나,
나는 놈의 순열 앞에 다시 기가 죽어 마음이 허탈해졌다.
놈의 죽음은 다시 나를 사로잡고 그날 오후 내내 흔들어댔다.
그런데 그 다음날 아침이었다.
화분에 다시 물을 주다 그의 빈 그물에 눈이 갔을 때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물 중앙에는 죽었던 고놈이 여전히 버티고 있는 게 아닌가,
어이된 일인가, 한의 망령이 다시 부활한 것인가,
펜촉을 들어 놈의 복부에 다시 갖다 대려는 순간,
아뿔사 이놈은 또 죽어서 떨어졌다.
그렇구나, 이놈이 또 나를 이겼구나. 백전백패(百戰白敗),
고 조그만 거미새끼에게도 늘 이렇게 지고 살거늘
이 세상에 나보다 만만한 게 뭐 있겠는가?